[153화] 소년 오수 (5)
“나는 잠시 주변 좀 둘러보고 올게.”
드문 경우이지만, 레비아탄은 강우와 <데스 나이트>의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하지만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한참이 지난 뒤에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마침내 먼저 입을 연 건 <데스 나이트> 쪽이었다.
[탑을 다 오르지 않았더군.]
“애초에 이 탑은 인간인 내가 다 오를 수 없는 곳이었다.”
강우는 <데스 나이트>의 등 뒤로 우뚝 선 거대한 탑을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탑의 내부는 자신이 아는 일반적인 형태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데스 나이트>는 이따금 힌트를 주었다.
저곳에 들어가는 순간 자신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먹혀 버릴 거라든가, 고리가 다섯 개가 되는 날 비로소 진정한 탑을 보게 될 거라든가.
만약 그때의 자신이 숲 귀신의 환영에 시달렸더라면, 자신은 장혜진이 자리한 그 숲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녀가 없는 참담한 현실보다 그녀가 있는 찬란한 거짓이 더 달콤하다 여기지 않았을까.
이제 현실에서 그녀를 되찾을 방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지금쯤 자신은 그 숲에 오두막을 짓고 장혜진과 사랑하는 자식을 기르며 살고 있을지도 몰랐다.
박도진, 유아라, 검계의 수장과 그 단원들, 5대길드장들, 만석 길드원 등을 전혀 알지 못한 채.
“…….”
결국 저 탑은 취하는 것보다 깨부수어야 할 게 더 많은 탑이었다.
이제야 강우는 저 탑을 왜 <바벨탑>이라 지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탑의 이름을 지은 건 오수인가?”
[…그래.]
오수는 저 탑을 오르기 위해 만든 게 아니었다.
부수려고 만든 것이지.
어쩌면 <사이트 스톤>에 탑을 세운 것도 다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지금 어디 있지?”
[글쎄, 무수한 시간선 중 한곳에 있겠지. 그는 지금 석탈해의 일을 수습하느라 바쁘니까.]
“처음부터 내가 이 탑을 부술 걸 예상했나?”
[그에 대한 대답도…… 글쎄로군. 그는 자신의 생각을 내게 다 말해 준 적이 없다. 그저 널 이곳에 들이라는 말뿐이었지. 그는 신적 존재다. 그의 뜻을 내가 다 알 순 없다.]
이제 더 숨길 것도 없다는 듯 <데스 나이트>는 제 얼굴을 드러냈다.
석탈해.
강우가 당장에라도 그 눈깔을 전부 파내고 싶은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왜 바로 알려 주지 않았지? 그저 수련시킬 생각이었다면, 이곳에서도 충분했을 텐데. 계속 고민해 봤는데도 굳이 날 탑 안에 들인 이유를 모르겠군.”
[그건 네가 가진 힘 때문이다.]
“내가 가진 힘?”
강우가 의아하다는 듯 묻자, 잠시 생각을 정리한 <데스 나이트>가 말을 이었다.
[네가 가진 힘은 죽음을 마주할수록 강해진다. 오수가 주는 힘이란 대부분 그런 것이지. 레비아탄도, 왕족들도 자신의 죽음을 바치고 강해졌듯이 말이다. 죽어 갈수록 강해진다고 하면 이해가 쉽겠군.]
죽음을 경험할수록 강해진다니.
그러고 보면 확실히 자신은 <데스 나이트>를 통한 수백 번의 죽음과 <백귀 균열>을 겪으면서 월등히 강해졌다.
‘그런 이유였나.’
문득 강우는 자신도 죽으면 레비아탄이 말한 ‘지옥’이란 곳에 가게 되는 건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묻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날 탑 안에 들여 죽음을 보게 했다?”
[그래. 생각보다 많이 보고 온 것 같지는 않지만.]
비로소 오수가 자신을 탑에 들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마주한 모든 죽음을 기억하는 자.
오수의 기억만큼 강우를 강해지게 만드는 것도 없었다.
그 탑은 온통 죽음으로 가득 찬 세계였으니까.
[넌 이미 수많은 죽음으로 완성된 존재다. 네가 이곳에 오게 된 것도, 네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도, 앞으로 감당해 내야 할 것들도. 전부 그 죽음들과 관련이 있지.]
“…….”
[하나의 축복에 하나의 저주가 깃든다고 했던가. 네게 있어 행운은 반드시 죽음을 동반한다.]
― 불행해질 것이다. 설사 그렇다 해도?
강우는 <데스 나이트>의 말을 곱씹으며 되물었다.
“그게 너희가 내게 말한 불행인가?”
[그래.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넌 아직 네가 감당해야 할 죽음을 모두 마주하지 못했다는 거다.]
콰르르릉!
돌연 내리친 벼락에 강우가 하늘을 올려다보자, 어느새 용암 지대에는 먹구름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검은 구름 아래서 <데스 나이트>, 아니, 석탈해가 그늘진 얼굴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이미 죽어 버린 사람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눈이었다.
[그 모든 죽음을 마주하는 날, 넌 두 번의 삶을 살게 된 대가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 * *
쏴아아아아―
<데스 나이트>는 내리는 비를 맞으며 아까부터 말이 없는 강우를 지켜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의 뒤에 달라붙은 수많은 죽음을 보고 있었다.
‘부족하다.’
지금의 석탈해는 어떨지 몰라도, 최후의 석탈해를 상대하기에는 턱 없이 모자란 힘이었다.
이대로라면 강우는 놈에게 생채기 하나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패할 터였다.
‘오수여,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데스 나이트>의 꿈은 석탈해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영원한 안식.
그가 바라는 건 오직 그뿐이었다.
‘홍련.’
처음 홍련이 보낸 전서구를 받았을 때.
<데스 나이트>는 실로 오랜만에 감정이 요동침을 느꼈다.
이제는 희미해진 오랜 향수.
영원히 맡을 수 없다고 여긴 그 향기를 다시 한번 마주한 까닭이었다.
그는 그간 강우에게 모든 것을 들려주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진실만은 끝까지 지켜 내려 애를 썼다.
여기까지 돌아온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강우는 누구보다 강한 전사이지만, 장혜진이라는 커다란 약점이 있었으니까.
애초에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회귀를 선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도 버티지 못했지.’
홍련이 죽던 날.
<데스 나이트>는 태어나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여전히 눈앞에서 죽어 가던 그녀의 얼굴이 생생했다.
― 포기하지 마. 자책하지도 말고.
그녀는 오랜 연인의 두 뺨을 만지작대며 속삭였다.
석탈해의 미친 짓거리를 막는 일을 포기하지 말라고.
홍련은 석탈해의 첫 번째 사도였고, 제 연인이 미래에 그런 미친 짓을 벌이리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홍련이 우려한 건 오직 한 가지였다.
<데스 나이트>가 미래의 자신에게 회의감을 품고 죄의식에 시달리는 것.
하지만 그녀가 죽자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데스 나이트>는 지독한 무력감을 느꼈다.
사랑하는 연인을 죽인 건 다름 아닌 미래의 자신이었으니까.
게다가 자신은 그녀를 두 번, 아니, 수십만 번도 더 죽이지 않았던가.
아무리 홍련의 선택이었다지만, 그 점은 분명히 <데스 나이트>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
<데스 나이트>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강우는 사색에 잠겨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앞으로 마주하게 될 죽음들에 대해 추측하고 있을 터였다.
정작 바로 눈앞에 가장 큰 죽음을 보지 못하고서 말이다.
죽음의 기사는 여전히 강우의 곁에 있는 한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한결같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죽음을 결심한 순간부터, 그가 회귀를 택하고, 검계에 들어가고, 유아라를 살리고, 박도진과 김민정을 구하던 때까지.
모든 자리에 그녀는 존재했다.
존재감은 갈수록 희미해져 갔으나,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신이 되살린 남자를 지켜볼 뿐.
‘그대의 생각이 궁금하군.’
하지만 아쉽게도 이미 죽어 버린 그녀는 말을 할 줄 몰랐다.
같은 선택을 내린 홍련도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데스 나이트>는 어느새부터 나타나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레비아탄을 쳐다봤다.
스틱스의 강물을 담아 놓은 듯한 보랏빛 눈.
그건 죽음을 볼 수 있는 눈이었다.
분명 레비아탄도 강우에게 들러붙은 그림자를 볼 수 있을 터였다.
‘말해, 말아?’
입가에 양손을 댄 채 소리 없이 뻐끔대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그도 강우에게 그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데스 나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진실을 깨닫고 미쳐 날뛰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강우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냉담한 진실을 마주하는 건 석탈해를 죽이고 난 뒤에도 늦지 않았다.
[보아라.]
이윽고 <데스 나이트>는 입을 열었다.
칠흑같이 깊고 어두우며, 무수한 죽음을 담은 두 개의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의 기사는 그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이제 남은 건 단 하나다.]
그가 손짓하자 어느새 공간이 뒤틀리며 새로운 세상을 뱉어 냈다.
어두워진 검보라 빛 하늘 아래, 붉던 용암지대는 마계의 땅처럼 온통 잿빛으로 변했으며, 탑이 있던 자리에는 하늘에 닿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나선형 계단이 자리했다.
[올라라. 그것이 이곳에서 네가 할 마지막 일이다.]
강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 아가리를 벌린 듯한 회색빛 계단을 올려다보다 물었다.
“이곳을 다 오르면 어떻게 되지?”
[이곳을 나갈 수 있다.]
“그러면 넌 어떻게 되지?”
[…….]
잠시 말이 없던 <데스 나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세계는 계단과 함께 소멸할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겠지. 나는 이곳에 얽매인 존재니까.]
“…그럼 이게 마지막인가?”
[그런 셈이지. 애초부터 나는 가이드에 불과한 몸. 내 쓸모는 이제 다했다.]
츠츠츠츳!
<데스 나이트>가 손을 뻗자, 그의 가슴속에 있던 붉은 핵에서 마력이 흘러나와 강우의 몸으로 향했다.
곧 마력은 강우의 팔에서 다섯 번째 고리로 재탄생됐다.
죽음의 기사의 생명을 유지하던 마력이었다.
“…….”
강우는 제 생명을 스스로 꺼뜨리고도 여전히 담담한 눈앞의 기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 <사이트 스톤>에 들어와 만난 이계의 존재.
그와 벌인 559번의 싸움과 수백 번의 추격전, 그 뜻을 파악하기 어렵던 수많은 선문답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강우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평소처럼, 그저 넌 평소처럼 묵묵히 네 갈 길을 가면 된다. 언제는 우리가 대화가 통했던가? 장담하건대, 내가 살면서 본 자들 중 네가 가장 불통이었다.]
<데스 나이트>의 최후의 농담에 강우는 소리 없이 웃었다.
검은 기사의 마지막이었다.
강우는 그대로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고, 뒤늦게 사태를 깨달은 레비아탄이 황급히 달려왔다.
“같이 가!”
그러나 <데스 나이트>는 그를 저지했다.
<죽음의 고리>를 완성한 건 강우뿐이므로, 이 계단을 오를 자격도 그에게만 있었다.
[넌 돌아가라. 이미 바깥세상이 엉망이다.]
“내가 왜? 나랑은 크게 관련 없는 세상인데?”
[지금 바깥에서 활개 치는 게 바로 네 부족을 섬멸한 놈들이다.]
그러자 레비아탄의 표정이 바뀌었다.
원수를 갚을 기회를 얻었는데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당장 나가겠다.”
[좋은 선택이군.]
그사이, 강우는 이미 저만치 계단을 올라가 있었다.
하늘로 솟은 계단이 퍽 위태로워 보였으나, 강우는 망설임 없이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그러던 중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계단 아래로 땅을 내려다보자 어느새 다시 투구를 쓴 죽음의 기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할 최후의 얼굴로 나쁘지 않은 모습이었다.
어떻게 보면 <데스 나이트>와의 이별은 스승과의 이별이나 다름없었다.
본래는 자신의 것이 아니던 이 세계에서 고민을 나눌 유일한 상대이기도 했고.
곧 강우의 입이 열렸다.
“…고맙다.”
[…건투를 빌지.]
그것을 끝으로 강우는 긴 계단을 계속 올라갔다.
이윽고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데스 나이트>가 중얼거렸다.
[오랜만이군.]
강우가 <사이트 스톤>에 들어온 이후로 되풀이되던 세계의 멸망은 멈추었다.
최후의 석탈해에 의해 자신이 살던 시간선이 파괴되는 순간을 <데스 나이트>는 평생 잊지 못했다.
매일 밤이 지옥이었고, 그 한이 새겨져 멸망이 되풀이되는 이 세상을 만들었다.
‘…홍련.’
<데스 나이트>는 죽어서도 보지 못할 그녀를 떠올리며 지친 몸을 바닥에 눕혔다.
죽음의 기사가 된 이후로 처음 누워 보는 순간이었다.
“괜찮냐?”
레비아탄이 걱정스럽게 그를 내려다봤지만, <데스 나이트>의 표정은 평안했다.
“…편하군.”
이대로 세상이 멈춰 버렸으면.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이 세계는 멈추지 않는 세계니까.
그는 무너질 세상을 기다리며 두 눈을 감았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평온이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