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소년 오수 (3)
소년들의 회의는 그 뒤로도 약 30분이 더 지난 뒤에야 끝이 났다.
이번에도 앞으로 나선 건 안대 쓴 소년이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이곳에서 그를 부르는 이름은 ‘두 번째 형제’였다.
“회의 결과를 알려 주지. 우린 아직 너흴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너흰 증명해야 한다. 정말로 다른 도시에서 온 게 맞는지, 그리고 괴물을 상대할 힘이 있는지.”
“어떻게 증명하면 되지?”
강우의 물음에 소년이 잠시 멈칫했다.
마치 그 질문은 예상하지 못한 듯한 반응이었다.
“그건 아직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기다려라. 다시…….”
설마 또 회의를 하겠다는 건가?
아이들이라 그런지, 회의가 무척이나 비효율적이었다.
결국 참지 못한 강우가 그를 만류했다.
“그만.”
“뭐냐? 우리의 결정에 항의라도 하겠다는 거냐?”
“내가 해결안을 제시하겠다.”
“…해결안을?”
소년이 말해 보라는 듯 턱을 까닥이자, 강우가 말을 이었다.
“청소부를 없애 주지.”
“…뭐라고?”
다시 한번 소년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그러나 강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우린 이 도시에 계속 머무를 생각이 없다. 청소부를 없애야만 나갈 수 있는 것 같으니, 우리가 놈을 처리하고 도시를 나가겠다. 그 뒤는 너희가 알아서 해라.”
“아저씨…….”
뒤늦게 다가온 암천도시의 소년 오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으나, 강우의 결정은 변함없었다.
강우는 여전히 고민 중인 안대 쓴 오수에게 말했다.
“내일 밤이다. 놈을 해치우는 과정에서 우리가 죽는다고 해도 어차피 너희는 손해 볼 일이 없지. 반대로 우리가 정말 해치운다면 좋은 일이고.”
“그, 그렇긴 하지만…….”
결국 강우와 레비아탄이 청소부를 처치하는 것으로 회의는 끝이 났다.
암천도시의 청소부를 처치하면 소년 오수와 그들은 다른 도시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고, 나머지 소년들 역시 방해 없이 문을 지나갈 수 있을 터였다.
새로운 환경에서 소년들이 무엇을 마주하는가는 강우와 상관없는 일.
그가 할 일은 그저 청소부를 처치하는 데까지였다.
강우는 이번 도시를 끝으로 이 탑을 나갈 생각이었으니까.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는 레비아탄의 말이 강력한 힌트가 되었다.
― 기억의 파편이 몇 개인지도 모르는데, 그것들을 모두 소멸시킨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수백 년이 걸리는 일일 수도 있어. 이건 애초부터 답이 정해져 있던 거다.
단번에 모든 기억의 파편을 소멸시키는 방법.
그건 파편의 보금자리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탑을 무너뜨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보다 더 쉬운 건…….’
바로 <사이트 스톤>을 부수는 것.
강우는 이 탑에서 나가 <사이트 스톤>을 부술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본체 오수가 자신에게 바란 방법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때였다.
“나, 나 저 사람 기억났어!”
아까 눈이 마주치자 책 속에 얼굴을 숨긴 어린 소년이 갑자기 강우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저, 저 사람은 탑 밖에서 온 사람이야!”
“마흔 번째 형제여, 또 그 소리인가?”
“저, 정말이라고! 나는 이 도시 밖을 알아! 그리고 저 아저씨들은 탑 밖에서 온 사람이야!”
하지만 다른 오수들은 책 든 소년의 말을 듣지 않았다.
“얘는 매번 이렇게 엉뚱한 소리를 한다니까. 이 도시가 탑에 세워진 거라니…… 그게 말이나 되냐?”
“에휴, 우리 마흔 번째는 언제 철이 드냐?”
“저, 정말인데…….”
형제들의 지적에 책 든 소년은 금세 주눅 든 표정이 되었다.
다행히 잘 넘어가긴 했지만, 강우는 궁금했다.
저 아이는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알아챈 거지?
하지만 괜히 물었다간 의심을 살 수도 있는 일.
강우는 잠자코 있었고, 다소 지루하기까지 하던 그날의 소집은 그렇게 끝났다.
* * *
“문이 열리는 건 내일이에요.”
다시 돌아온 암천도시에서 소년 오수는 내일 있을 전투를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는 자신의 오랜 비밀 창고에서 그간 묵혀 둔 장비들을 꺼내 들었고, 그건 다름 아닌 전투복이었다.
아이는 사막 지형에서나 입을 법한 방탄 헬멧과 전투복을 걸친 채 소총 하나를 손에 쥐었다.
보기만 해도 어딘가 위태로운 모습.
전투화만 해도 정강이를 덮을 정도라 사이즈가 아이의 몸엔 하나도 맞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우가 물었다.
“그런 건 다 어디서 났지?”
“예전에 여길 지키던 어른들이 쓰던 무기래요.”
“이곳에 어른들이 살았었나?”
“예. 그런데 다 죽거나 도망가고, 이제 이 도시에는 아이들만 남았죠.”
“…….”
아무래도 오수의 유년기는 내전이 벌어지던 국가에서 보낸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배경에, 이런 주민들은 말이 되지 않으니까.
어쩌면 지금도 도시를 떠도는 유령들은 그때 희생당한 아이들일지도 몰랐다.
오수는 자신이 목격한 모든 죽음을 기억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여기서 나가면 어쩔 생각이지?”
“말했잖아요, 우릴 이곳에 가둔 놈을 죽일 거라고.”
“너흰 이 도시의 밖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누군가 너흴 가뒀다고 어떻게 확신하지?”
“간단해요.”
소년 오수가 자기 몸통만 한 소총을 끌어안은 채 말했다.
“이곳에는 시스템이 있으니까요. 이틀에 한 번 문이 열리고, 청소부가 그 문을 지켜요.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형제들끼리 얼굴을 볼 수 있고요. 이 모든 건 일종의 규칙이자 시스템이에요. 그러니 분명히 이 모든 시스템을 만든 자가 있을 거예요. 여긴 일종의 감옥이니까요.”
아이치고는 꽤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실제로도 어느 정도는 맞는 이야기기도 했고.
“…그렇군.”
“그러니까 우린 이곳을 반드시 나가야 해요. 이곳에 갇혀서는 계속 친구만 잃을 뿐이니까……. 아저씨도 자신이 한 말은 꼭 책임져야 해요. 청소부를 죽이겠다고 했으니, 꼭 그래 주세요.”
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상황을 파악하느라 그냥 넘겼지만, 청소부에게서 느껴진 마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레비아탄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법한 마물이었다.
문제는 청소부가 아니었다.
‘탑을 부수면 기억으로 남겨진 오수들은 모두 소멸한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자신이 왜 이곳에 갇혀 지내야 하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던 아이들이 그렇게 소멸해도 되는 걸까?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다, 아무것도 모른 채 소멸하는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답답하군.’
하지만 강우의 머릿속이 어쨌든 시간은 계속 흘렀고, 마침내 결전의 순간이 찾아왔다.
* * *
“아저씨! 저기예요!”
소년 오수의 신호에 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그가 말한 ‘문’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문은 일전에 섬에서 본 것과 똑같은 형태였다.
“우선은 최대한 접근할 수 있는 데까지 접근한다.”
“예! 모두들, 가자!”
오수의 신호에 잔뜩 겁먹은 유령들이 그 뒤를 따랐고, 강우는 그들을 보낸 뒤 유심히 마력의 흐름을 감지했다.
이윽고 그가 기다리던 ‘청소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
검은 황소가 축 늘어진 살을 흔들며 포효했다.
그러나 놈의 목소리는 방음벽에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소리 없는 포효.
하지만 실제가 없는 목소리와 달리 놈의 움직임은 진짜였다.
어느새 놈의 손으로 생겨난 할버드가 검은색 마력을 뿜어 댔다.
콰과과과과!
“조심해라!”
청소부가 할버드를 바닥으로 내리찍자 거대한 파장과 함께 땅이 일직선으로 부서져 나갔다.
목표는 단연 소년 오수.
강우는 서둘러 앞으로 나가며 <진(眞)피바라기>를 소환했다.
‘살(殺).’
검은 단검에서 번쩍인 빛이 순식간에 청소부의 마력을 삼키고 되레 놈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그러자 흠칫한 청소부가 황급히 할버드를 거두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콰득!
<살(殺)>에 당해 허물어진 공간이 아무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소년 오수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저, 정말로 청소부를 죽이고 왔군요?”
“그래! 우리 대한족 전사는 진짜배기라니까?!”
하지만 오수와 레비아탄의 호들갑에도 강우는 흔들림 없이 청소부 쪽을 향해 서 있었다.
비록 놈이 몸을 피하긴 했으나, 아직 싸움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이제부터 놈이 어떤 실력을 드러내느냐에 따라 이번 싸움의 난이도도 정해질 터였다.
놈이 자세를 다잡기 전에 강우가 소리쳤다.
“모두 달려라!”
“가자!”
그사이, 정신을 차린 청소부는 사태를 깨닫곤 덩치를 불리기 시작했다.
놈이 빈 손바닥을 허공으로 내밀자 마치 자석이라도 달린 듯 유령 몇몇이 그곳으로 끌려갔다.
“아앗…… 애들아!”
놀란 오수가 비명을 질렀으나, 이미 유령들은 청소부의 배 속으로 들어간 뒤였다.
어느새 3미터까지 몸집이 커진 청소부가 포효하며 강우를 노려보았다.
“대한족의 위대한 전사여! 저놈에겐 시간을 줘선 안 된다! 처먹으면 처먹을수록 더 상대하기 어려워져!”
하지만 레비아탄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미 강우는 저 멀리 튀어나간 뒤였다.
그의 손에서 검은 마력이 강렬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서걱!
강우의 검이 단숨에 놈의 손목을 잘랐다.
그리고 미처 놈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목 깊숙이 검을 찔러 넣었다.
[……!]
그러나 예상과 달리 놈은 즉각 숨통이 끊어지지 않았다.
괴력을 발휘해 강우를 떨쳐 낸 놈이 비틀비틀 물러서는 사이, 목에 박혀 있던 <진(眞)피바라기>가 연기로 변해 산화했다.
강우는 어느새 제 손에서 다시 생성된 검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언데드들의 땅임을 잊고 있었군.”
청소부도 언데드였던 것이다.
강우는 다시금 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저 멀리 문에 다다른 유령들이 황급히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놈의 숨통을 끊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저들이 이곳을 안전하게 빠져나가는 것.
강우는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눈앞의 적에 집중했다.
‘유령들을 다 빼내지 않으면 오수도 나가지 않을 테지.’
그러는 사이, 위기를 느낀 청소부가 유령들을 하나둘 뱉어 내고 있었다.
소년 오수의 말대로였다.
‘일단 제압한 뒤, 모든 유령을 빼낸다.’
상대가 언데드인 게 오히려 더 다행인 상황이었다.
하마터면 유령들을 모두 구하기도 전에 놈을 죽일 뻔하지 않았는가.
[……?!]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강우가 놀라웠는지, 청소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놈의 표정은 경악과 공포, 그리고 충격으로 물들었다.
콱! 콱! 콱!
그것은 일종의 매질이었다.
강우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청소부를 쥐어 패기 시작했다.
어쩐지 이승우 이후로 맨손으로 상대를 패는 게 익숙해진 기분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살이 찐 황소.
때릴 곳도 많고, 타격감도 좋았다.
그리고 강우가 주먹질할 때마다 놈의 입 밖으로는 적게는 둘에서 많게는 열까지 유령들이 튀어나왔다.
“아, 아저씨! 모두 나왔어요!”
그렇게 모든 유령이 구출되었을 때, 강우는 주저앉아 신물을 토해 내는 청소부를 향해 검을 들었다.
“죽어라.”
콰직!
검은 황소의 두개골이 쪼개지며 얼굴이 두 쪽 났다.
놈의 피를 소량 흡수한 강우는 서둘러 몸을 돌려 소년 오수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혹시라도 전처럼 세계가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가 도착할 때까지 도시는 무너지지 않았고, 그들은 무사히 문을 넘어갈 수 있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