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태동 (4)
강우가 시공을 초월해 이 시간선에 떨어졌을 때.
그가 가장 궁금했던 건 단연, 한 사람의 존재였다.
장혜진은 어디로 갔는가.
만약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거라면, 당연히 장혜진도 존재해야 맞는 일이었다.
분명히 그녀는 미래에 존재했으므로, 그 존재를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강우가 직접 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고, 그 숨결을 느낀 유일한 사람이니까.
강우는 금방이라도 울컥할 것 같은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말을 계속했다.
“이 시간선에 장혜진은 없었습니다. 과거 함께하던 신라 길드원도 몇몇 보이지 않았기에 애써 그러려니 넘어갔고요. 하지만 얼마 전 알아본바, 그들은… 모두 존재했습니다.”
그건 이승우가 폭주하기 전의 일이었다.
<데스 나이트>에게서 시간선에 대해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강우는 황한수에게 신라에서 사라진 길드원들을 찾아보게 했다.
아마도 김민정의 의뢰를 수락할 때쯤이었을 거다.
“물론 과거와 달리 이미 죽어 버린 자도 있었지만, 그들이 이 세계에 살았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단지 이번 시간선에선 신라 길드원이 되지 않았을 뿐.
그들은 분명 이 시간선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존재했다.’
그렇다면 장혜진은?
어째서 그녀만은 보이지 않는가.
아무리 찾으려 애써도 이 세상에 그녀가 존재했던 흔적만은 도무지 발견할 수 없었다.
유일한 건 자신의 집에 남아 있던 ‘빨간 밥통’뿐.
“내 손으로 죽인 황 노인도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어째서 혜진이는 보이지 않는 겁니까?”
강우가 처음으로 동요하는 눈빛으로 오수를 바라봤다.
“당신은 알고 있겠지요, 혜진이가 어디로 갔는지.”
계속해서 꾹꾹 억누르고 있던 질문이었다.
장혜진에게 자꾸 매달리게 되면 자신이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의 눈빛, 목소리, 숨결, 귓등에 있는 점 하나까지.
대나무 숲에서 혜진이의 허상을 본 이후로, 줄곧 그녀의 얼굴이 강우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장혜진.
그녀는 강우에게 있어 가장 확실한 역린이었다.
분명 오수라면 그녀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
하지만 정작 오수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다소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그것이 다 알면서 말할 수 없다는 표정인지, 아니면 정말 몰라서 짓는 표정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다만, 강우는 그의 두 눈으로 ‘착잡함’이 스쳐 지나갔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오수가 잠시 뒤편을 바라본 듯한 건 강우의 착각이었을까.
“당신의 정인에 대해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없소.”
오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현재 당신이 있는 시간선에 닿아 있다는 것이오.”
“시간선에…… 닿아 있다고?”
“그렇소. 그녀는 지금 당신과 같은 시간선에 머무르고 있소. 그게 언제까지일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강우의 머릿속이 멍했다.
‘혜진이가 나와 같은 시간선에 머무르고 있다고?’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까지는 1분여가 더 걸렸다.
이내 그 말뜻을 깨달은 강우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혜진이가… 나와 같은 시간선에 있다고… 그렇다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혜진이는 어디에 있지?”
강우답지 않게 초조함마저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그 얼굴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오수가 말했다.
“그건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오. 본체 오수만이 알고 있을 뿐, 내가 가진 기억은 당신이 시간선을 넘은 직후까지니까.”
그 대답에 강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애써 돌려 말했지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것부터가 이미 그 정답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오수의 목을 비틀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애써 화를 달래며 물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 본체라는 자 말입니다.”
“글쎄… 본체는 시간선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소. 시간선을 오가며 인과를 부여하지. 그는 유일하게 하나의 몸으로 여러 시간선을 사는 존재요. 그러니 나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소. 그에게 나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니까.”
“…….”
“하지만 너무 초조해하지 마시오.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건 본체이니, 분명 때가 되면 직접 찾아올 것이오. 우선은 그가 당신에게 넘겨준 이 탑을 모두 오르고 나면 말이오.”
또 기다림인가.
그러나 아무리 오수의 목을 비튼다고 한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은 듣지 못할 터였다.
결국 지금 강우가 할 수 있는 건 서둘러 탑을 오르는 것뿐.
다만, 이전과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바로 강우의 마음가짐이었다.
‘본체 오수.’
지금까지는 데스 나이트와 오수가 시키는 대로 잘 따라왔다.
그들과 자신은 석탈해를 처치한다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을 믿을 수 있다는 근거가 되지는 못했다.
‘이들은 여전히 내게 숨기는 게 많다.’
그리고 그것이 장혜진과 관련된 것이라는 걸 이번 기회에 똑똑히 알았다.
― 불행해질 것이다. 설사 그렇다 해도?
만약 그들이 말한 불행이 ‘내’가 아닌, ‘장혜진’과 연관이 있는 거라면…….
‘누구든 가만두지 않겠다.’
강우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설사 그게 날 이곳으로 데려온 존재일지라도.’
* * *
다음 날.
<검은 태양>이 거둬진 섬은 환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활기찬 파도 소리 속에서 강우는 마지막 작별을 위해 오수와 똑바로 마주 섰다.
오수는 말했다.
본체 오수가 바라는 건 이 탑에 사는 그의 모든 기억을 삼키는 것이라고.
그 말인즉, 눈앞의 오수도 죽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강우의 눈에서 그 뜻을 읽은 오수가 슬며시 웃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당신이 날 직접 죽일 필요는 없으니까. 그저 내가 당신에게 내 몸을 맡기면 그만이오.”
“…….”
오수가 오른손을 들어 강우의 어깨에 올렸다.
“고마웠소. 당신 덕분에 나도 이곳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게 되었구려.”
그의 미련인 대나무 숲은 이미 불타 없어진 지 오래.
숲이 사라지자 숲 귀신과 그곳에 살던 허상들도 자연스럽게 소멸했다.
오수가 희미하게 웃었다.
“부디 건투를 빌겠소.”
스르륵―
오수의 몸이 점차 빛나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작은 빛 입자가 되어 부서지고, 바람에 따라 흩어졌다.
마치 수천수만 마리의 반딧불이가 한데 모여 있다 흩어지는 모양새였다.
“앗! 주인장!”
오수에게 작별의 선물을 주겠다며 유채꽃을 꺾으러 간 레비아탄이 그 이름을 부르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의 손에서 반쯤 꺾인 유채꽃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것을 본 오수가 환하게 웃으며 손 인사를 건넸다.
“레비아탄, 당신도 건투를 빌겠소.”
“이렇게 가다니… 나도 그간 고마웠다! 도루묵도! 감자도! 방도! 호박도! 다른 생선……!”
레비아탄이 지금껏 감사했던 것들을 다 나열하기도 전에, 오수는 완전한 빛의 조각이 되어 소멸했다.
레비아탄이 뭉클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주인장…….”
그간 정이 꽤 많이 든 모양이지만, 그 여운을 느낄 새는 없었다.
쿠구구구구!
어느새 이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으악!”
놀란 레비아탄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강우는 조각조각 부서져 떨어지는 세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떨어지고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레비아탄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으나, 강우는 담담하게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저곳으로 나가야 하는 것 같군.”
“뭐?”
언제 생겨났는지, 하늘에 떡하니 검은 문 하나가 자리해 있었다.
레비아탄이 부리나케 <스컬 드래곤>을 소환하는 사이, 강우는 이 세계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뭘 감상하고 앉았어?! 얼른 타지 않고! 얼른 타래도?!”
레비아탄이 성화를 부린 뒤에야 강우는 <스컬 드래곤>의 등에 올랐다.
카아아악!
머리가 두 개로 늘어난 <스컬 드래곤>이 바닥을 박차고, 강한 바람이 두 사람의 몸을 강타했다.
쿠구구구!
세계가 무너지는 잔재는 허상처럼 보였으나, 위력만큼은 실제였다.
흡사 콘크리트를 방불케 하는 덩어리들이 쉴 새 없이 바닥으로 낙하해 크고 작은 폭발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스컬 드래곤>의 목으로 떨어지던 잔해를 가까스로 피한 레비아탄이 비명 같은 욕설을 내뱉었다.
“망할!”
드래곤의 목뼈가 저 잔해들을 견뎌 낼 수 있을지도 궁금했지만, 그걸 굳이 지금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황급히 <스컬 드래곤>을 문으로 몰았고, 드래곤이 360도로 여섯 차례나 회전한 뒤에야 그들은 목표한 검은 문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저 아래로 부서지는 섬과 끓어오르는 바다.
그게 강우가 기억하는 첫 관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우라질… 여긴 또 뭐야?”
검은 문을 지나오자, 스산한 바람과 함께 황량한 잿빛 대지가 펼쳐졌다.
밤하늘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건 황폐한 대지에 자리한, 부서진 회색 도시.
한바탕 내전이라도 벌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느껴지는 기운은 없는데.”
강우도 레비아탄의 말에 동의했다.
그들은 이내 지상으로 내려와 폐허가 된 회색 도시에 발을 디뎠다.
한차례 바람이 불자, 시멘트 냄새와 함께 콘크리트 가루가 날아다녔다.
오수의 섬을 벗어난 지 불과 5분이 채 지나지 않은 탓에 레비아탄은 주변으로 보이는 콘크리트 잔해만 봐도 소름이 끼치는 모양이었다.
그가 부서진 건물들을 둘러보며 께름칙한 얼굴로 말했다.
“처음 보는 석재로 만든 건물이다. 냄새는… 마치 죽음의 냄새 같네. 차가우면서 싸늘한 냄새가 나.”
그것이 이계인 출신 사내가 묘사한 콘크리트의 냄새였다.
그들은 <스컬 드래곤>을 시험 삼아 계속 날려 보낸 뒤, 끝없이 펼쳐진 회색 도시를 천천히 걸었다.
여전히 느껴지는 기척은 없지만, 이곳 또한 탑의 일부이니 기억의 파편인 오수가 존재할 것은 자명했다.
강우는 섬에서 본 오수의 기운을 떠올리며 주변을 수색했다.
하지만 그렇게 걷기를 약 한 시간.
결국 망가진 도시 외에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그들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예상대로 스컬 드래곤은 도시를 벗어나자 자연스럽게 소멸했다. 이제 어쩌지?”
이미 오수가 살던 섬에서 경험한 바였다.
오수는 본토에서 물건을 사 왔다고 했지만, 정작 강우와 레비아탄이 섬을 나서려고 하자 탑은 그것을 거부했다.
섬에서 일정 반경 이상 벗어나면 자동으로 오수의 집으로 <텔레포트>된 것이다.
아마도 이곳의 오수는 기억의 파편에 불과하니, 그 기억 너머의 공간으로는 향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레비아탄의 말에 강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 이곳의 오수는 이 도시에 있다. 그는 죽음을 기억하는 듯하니, 어쩌면 이 도시에서 죽은 자들과 관련이 있을지도.”
“응?”
그런데 그때였다.
레비아탄이 뒤에서 느껴진 기척에 고개를 돌리는 사이, 강우도 그와 같은 것을 발견했다.
그건 ‘아이’였다.
열 살쯤 됐을 법한 소년이 초라한 몰골로 무너진 건물 뒤에 숨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기척만 느꼈을 뿐, 소년에게서 마력은 전해지지 않았다.
숲 귀신 때를 떠올린 강우가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레비아탄이 자신의 대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사령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년의 등 뒤로 수십 마리의 언데드 마물들이 스멀스멀 나타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 레비아탄이 이를 갈았다.
“제기랄…….”
어느새 온 도시를 가득 메운 수천 마리의 사령들.
기괴하게 생긴 놈들이 강우와 레비아탄을 보며 히죽대고 있었다.
“…….”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강우는 적어도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았다.
오수가 이 탑을 통해 자신에게 주려는 것이 무엇인지.
‘살(殺).’
피슛!
강우의 손아귀에서 짧은 섬광이 일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