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헌터-146화 (147/186)

[146화] 태동 (2)

임가은을 돌려보낸 박도진이 저택으로 들어왔을 때, 거실 소파에선 유아라와 김민정의 대화가 한창이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유아라가 일방적으로 말하고, 김민정이 거기에 고개를 끄덕여 주는 식이었다.

“하여튼 이상하다니까? 아깐 강우 씨를 남자 친구라고 하는 거 있죠?”

“…속상했겠네요.”

“아무래도 날 잡아서 한 번 제대로 대화를 해 봐야겠어.”

박도진이 거실로 들어오자, 그를 발견한 김민정이 슬쩍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도봉순, 도봉팔 콤비의 도움으로 어머니와 남동생을 무사히 한국으로 들인 김민정은 그전과 비교해서 확실히 나아진 모습이었다.

파이터로 활동하던 시절만 해도 우스꽝스러운 은색 가발에, 그늘진 얼굴에, 늘 상처투성이였던 몸이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어졌다.

현재 그녀의 가족들은 안정적인 한국 정착을 위한 일종의 ‘적응 학교’를 다니는 중이었다.

방으로 가려던 박도진이 말했다.

“오늘 저녁은 버섯전골입니다. 어린이집에서 가족 식사 사진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으니, 괜찮으시면 다들 참여해 주십시오.”

“오, 버섯전골 좋죠! 당연히 참가할게요!”

유아라가 신나서 외치는 가운데, 김민정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 말에 수긍했다.

유아라가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강우 씨는 언제 돌아오려는 걸까요?”

“저희가 알 수 없다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요. 정말 귀띔이라도 주면 좋으련만…….”

강우가 종종 집을 비우긴 했어도 이번처럼 한 달씩이나 비운 적은 없었다.

유아라가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는 사이, 김민정은 두 남녀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관찰했다.

‘한강우.’

그는 이 집의 집주인이기도 하지만, 그 존재감은 고작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이 두 남녀는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했으며, 심지어 이 집에 사는 꼬맹이, 박수영도 틈만 나면 그의 이야기를 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김민정이 아는 강우는 <발광 균열>에서 본 모습이 유일했다.

확실히 강하다는 건 알겠는데, 대체 그 무뚝뚝하고 무례하게까지 보이는 그 남자가 뭐가 좋아서 이토록 걱정한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재미를 붙인 저격총을 쥐게 된 것도 다 그의 안배라고 했다.

‘범상치 않은 사람인 건 분명해.’

그사이, 대화를 마친 박도진은 방으로 들어가고, 유아라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녀가 <발광 균열>에서 강우에게 고백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새로워진 주제에도 김민정은 여전히 고민에 잠겨 있었다.

‘…….’

이 저택에서의 생활이 점차 길어지면서 김민정은 점점 이곳에 정을 붙여 가는 중이었다.

북한을 탈출한 이후로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자 본 날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이렇게 좋아도 될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자신의 시야에 있고, 그들의 안전함이 보장되는 것만으로도 삶이 충만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곳에 언제까지 있을 수 있을까.

‘지금에야 갈 곳이 없어 받아줬다지만, 언제까지고 살 순 없겠지.’

검계는 곧 새로운 저택을 마련해 주겠노라 말했지만, 정작 김민정은 이 집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집 때문이 아니라, 이곳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좋았다.

그리고 이 집에 남고 싶은 또 하나의 이유.

김민정은 박도진이 들어간 방 쪽을 슬쩍 확인했다.

‘…지금 내가 뭘 하는 건지.’

사실 박도진은 알지 못했지만, 그는 김민정과도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중이었다.

아마도 편지에 새겨진 글씨의 주인공이 박도진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비록 편지를 보내라고 지시한 건 강우이지만, 김민정에게 직접 편지를 쓰고, 택배를 보낸 건 박도진이었다.

김민정은 여전히 그때의 감정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갑자기 편지가 그쳤을 땐, 아쉬움과 섭섭함까지도 느꼈더랬다.

‘…모르겠어.’

분명 파이터 시절에도 자신에게 접근한 남자는 많았지만, 다들 그 목적이 분명했다.

승부 조작을 위해서거나, 스카우트를 위해서라거나, 여자 파이터와 한 번 자보고 싶어 하던 남자들.

늘 자신을 채근하던 사장도 그렇고, 그녀는 한국에서 정상적인 남자를 만난 기억이 없었다.

그런 자신이 남자에게 관심을 갖게 되다니…….

참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민정 씨, 지금 내 말 듣고 있어요?”

그때, 김민정은 유아라의 채근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잠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김민정이 서둘러 대답했다.

“예, 계속하세요. 지금 어떤 말을 해 줘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아, 그랬구나. 그래서 제가 어쨌느냐면요,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거짓말에 김민정은 작은 죄책감을 느꼈지만, 다행히도 유아라는 자신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큰일이야.’

김민정은 오늘도 박도진에 대한 관심을 애써 감췄다.

한강우, 박도진.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랑을 받는 두 남자였다.

* * *

“그럼 이번 주는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죠. 부산 쪽 균열은 이미 입찰이 끝났으니, 우리는 비교적 입찰이 적은 충청도 쪽 균열을 맡겠습니다. 다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스톰의 회의실.

서유리가 회의의 종결을 알리자, 모두가 작게 박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당당하게 5대 길드장에 이름을 올린 오만석도 그곳에 있었다.

5대 길드장들의 회의이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오만석 길드장님? 잠시 저 좀 보실까요?”

“…예? 예.”

갑작스러운 서유리의 부름에 오만석이 얼떨떨하게 대답하는 사이, 그 상황을 아는 다른 길드장들이 킥킥대며 자리를 떠났다.

본래는 강우를 길드원으로 둔 만석을 중심으로 재편성된 5대 길드였으나, 확실히 실무 쪽은 오만석보다 서유리가 더 뛰어났다.

이미 수년간 거대 길드의 수장으로 지내면서 쌓아 온 데이터의 양적 수준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오만석은 요즘 만석의 길드장으로서, 5대 길드의 소속원 중 한 명으로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각성자 중 한 사람으로서 서유리에게 각종 실무를 배우고 있었다.

“제가 분명히 입찰 쪽은 꼼꼼히 챙겨야 한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예, 그랬죠.”

“그런데 이번에 만석이 맡은 익산 쪽 균열 입찰은 왜 구멍이 났을까요?”

“…그러게요. 왜 그렇게 됐을까요. 하하…….”

오만석이 멋쩍게 웃자 서유리가 그를 쏘아봤다.

뒤늦게 표정을 굳힌 오만석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더 신경 쓰겠습니다.”

“하아, 이미 5대 길드는 한 번 신뢰를 잃은 상태예요. 물론, 그때 스톰은 5대 길드였고, 만석은 아니었으니까 제가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이제는 같은 5대 길드잖아요. 다른 길드장분들도 예전보다 곱절로 더 신경 써서 일하고 있고요. 만석도 그래 주실 거라 믿습니다.”

“…옙.”

“…그럼 계속 고생해 주세요.”

할 말을 마친 서유리는 책상에 널브러진 서류 뭉치를 챙겼다.

그때, 오만석이 쭈뼛대며 그녀를 불렀다.

“저…… 서유리 길드장님.”

“예.”

“오늘 제가 너무 죄송해서 그런데… 저녁 식사라도…….”

“나가세요.”

“…예. 고생하십시오.”

시무룩해진 오만석이 밖으로 나가는 사이, 서유리는 그 뒷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만석이 다소 허술해 보이긴 해도 확실히 능력은 있는 사람이었다.

책임감도 강하고.

다만, 그 능력이 사무 쪽보다는 현장 일이 더 잘 어울린다는 게 문제였다.

그는 책상에 앉아 일하는 걸 다소 지루해하는 듯했다.

부길드장 로드리게 역시 마찬가지.

‘그나저나 요즘 그 사람은 통 안 보이네.’

오만석에 대한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서유리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한 번쯤 회의장을 찾을 만도 하건만, 강우는 몇 주째 깜깜무소식이었다.

‘요즘은 선화랑 가은 언니도 바쁜 듯하고.’

직접 연락을 해 볼까도 싶었지만, 그러기엔 요즘 자신도 너무 바빴다.

일단은 여전히 브레이크와 이승우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부터 살리는 게 먼저였다.

‘유리야. 일하자, 일.’

그녀는 서둘러 회의실을 나섰다.

하지만 서유리는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

곧 자신이 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 들어올 거란 사실을 말이다.

* * *

“알아봤느냐?”

“죄송합니다. 어찌나 동선이 깔끔한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임무에 실패한 청익이 고개를 숙였지만, 황 노인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나 양복점으로 가자던 정체불명의 청년.

그는 석탈해와 강우 다음으로 자신의 <심안>을 피해 간 세 번째 청년이기도 했다.

“마음이 심란하구나.”

황 노인은 며칠 전부터 불길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제 그림자에 괴물이라도 도사리고 있는 듯 께름칙한 기분.

여전히 세상은 각성자들의 급격한 성장으로 떠들썩했다.

안 그래도 얼마 전 왕린도 자신이 4차 각성의 경지에 들어서려는 것 같다며 연락을 해왔다.

청익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곧 다음 각성을 앞둔 듯 보였고.

‘뭔가 심상치가 않다. 불길해.’

고위 각성자가 늘어난다는 건 좋아할 일이지만, 시기가 묘했다.

석탈해가 실종되고, 강우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각성자들이 쏟아져 나오다니.

폭풍전야에 벌어진 풍요랄까.

어쩐지 황 노인은 지금의 상황이 꼭 전쟁을 앞둔 것처럼 불안불안하기만 했다.

결국 불안을 참지 못한 황 노인이 자신의 손자를 불렀다.

“한수야.”

“예, 할아버지.”

청익이 고개를 숙인 순간부터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던 황한수가 서둘러 그 앞으로 다가왔다.

잠시 고민하던 황 노인이 말했다.

“넌 지금부터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브레이크가 있거든, 하나도 빠짐없이 내게 보고하거라.”

“전…부요?”

“그래. 크고 작은 것 할 것 없이 모두.”

할아버지는 갑자기 왜 타국의 브레이크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일까?

황한수는 할아버지의 지시가 의아했으나, 더 반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확인한 할아버지의 능력은 자신의 상상을 한참이나 초월했으니까.

애초에 할아버지의 뜻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알겠어요.”

“지금부터 모든 단원은 24시간 대기 상태에 돌입한다. 호출 시 즉각 반응해야 하며, 호출에 불응하거나 늦을 시 엄벌에 처한다. 예외는 없다.”

“존명. 그런데 몇 주째 연락이 없는 그 아이는…….”

곧장 청익이 말하는 ‘그 아이’를 알아챈 노인이 말했다.

“…그 아이는 예외다.”

“알겠습니다.”

청익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분명 이 예리한 수장은 범인은 느낄 수 없는 위기를 감지한 게 분명했다.

그런데 청익이 수장의 명령을 전하기 위해 나서려던 찰나.

“청익, 너는 단원 둘을 데리고 치악산에 다녀오거라.”

“스승에게 전할 말씀이 있으십니까?”

“그래. 이걸 전해 다오.”

황 노인은 청익에게 서신을 건넸고, 그는 서둘러 양복점을 나갔다.

‘심상치 않아.’

할 일을 마친 황 노인은 곧 상념에 빠졌다.

어쩌면 이번에도 심수련의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몰랐다.

* * *

그리고 그로부터 몇 주 뒤.

『강원도 평창 방림면, LV. 4 균열 발생!』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LV. 5 균열 발생!』

…….

황 노인의 우려대로 전국적인 브레이크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미 몇 달 전 겪은 똑같은 상황이지만, 이번에는 규모와 무대가 많이 달랐다.

『샌프란시스코 상공에 거대 하피 수십 마리가 등장해 시민들이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

『영국 맨체스터에 브레이크가 일어난 지 나흘째. 레이드에 수 차례 실패한 영국 정부는 결국 국제 사회에 원조 요청을…….』

『일명 아이티 브레이크! 현재까지 집계된 사망자만 6,721명…….』

『파괴된 백악관, 미국 대통령은 어디로 갔나. 국제 헌터 연합에게로?』

『홍콩 마카오! 마물들에게 점령당하다!』

『카지노 계의 거물, 후버. 탈출 시도 과정에서 헬기가 추락해 사망…….』

이번 무대는 전 세계였다.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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