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헌터-142화 (143/186)

[142화] 섬의 손님 (1)

강우가 돌아왔을 때, 오수는 집에 있었다.

그의 초가집에서는 대나무 숲 전체가 내려다보였는데, 오수는 마루에 앉아 빨갛게 타오르는 불길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힘없이 고개를 들어 강우를 바라봤다.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오셨소?”

그러나 강우는 말없이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고, 오수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알싸한 탄내가 사방에서 진동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마루에 앉아 대나무 숲을 탐욕스럽게 집어삼키는 붉은 화마를 지켜보았다.

어찌나 불길이 큰지, 섬 전체가 거대한 황혼에 접어든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숲이 절반 이상 타들어 갔을 때, 오수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구려. 좀 더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20년이나 못 해낸 일을 반나절 만에 해내다니… 솔직히 조금 놀랐소.”

“…….”

“숲에서 누굴 보았소?”

그러나 강우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날카롭게 보며 되물었다.

“당신은 숲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해 나에게 맡겼습니다. 내 생각이 맞습니까?”

오수는 부정하지 않았다.

“맞소.”

“왜 그랬습니까?”

잠시 침묵하던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밖에서의 나는 수천 년을 살았소. 내가 그 시간을 살아오면서 몇 번의 죽음을 마주했는지 아시오?”

“…….”

“모두 삼천칠백사십오만 이천삼백오십칠 명이오.”

37,452,357명.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숫자이지만, 그보다 오수가 그 숫자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나는 그들을 잊을 수가 없소. 왜냐하면 그게 내 숙명이기 때문이지.”

숙명(宿命).

그는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게 자신의 운명이라 말하고 있었다.

오수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나에 대해 들은 게 있소?”

“…탑 밖에 있던 석탈해가 말하길, 인과율을 담당하는 신이라고 하더군요.”

“신이라…….”

오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메마른 우물처럼 건조하게 들렸다.

“신이라는 게 초월적인 존재를 뜻하는 단어라면, 그건 정확하지 않소. 나 또한 시간과 인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이니까.”

“…….”

“나도 당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이오. 그저 조금 더 오래 살다 보니, 세상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됐을 뿐. 오히려 오랜 세월 동안 희석된 정신은 당신들보다 더 연약하지.”

크게 와닿지는 않는 말이었다.

하긴, 수천 년을 더 살아온 존재의 말이 와닿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였다.

“내가 왜 숲을 당신에게 맡겼느냐고 물었소? 그건 당신 말대로 내가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오. 그 숲에만 들어가면 삼천만 명의 환영이 나타나 내게 하소연하지. 개중에 꼭 인간만 있는 건 아니오. 그들이 한마디씩만 해도 내 정신이 버텨 내지 못해. 실제로 한 번은 죽을 뻔도 했고.”

“그럼 처음부터 숲을 불태우지그랬습니까.”

강우의 말에 자조적으로 미소 지은 오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능하오. 나는 내 앞에서 죽어 간 지난 죽음을 모두 기억하고 있소. 모두 내 의지에서 비롯한 결과들이지. 그런데 어찌 내 손으로 또 그들을 죽일 수 있겠소.”

“…그걸 나에겐 잘도 맡겼군.”

참지 못한 강우가 비아냥거리자,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인정하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신이 아니오. 오히려 인간에 더 가깝지. 그래서 난 이기적이라오. 내가 삼천만을 죽이느니, 그대가 열 명을 죽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지. 이제 와서 사과한다고 기분이 풀리지도 않겠거니와, 나도 그리 뻔뻔하지는 않으니 사과는 접어 두겠소.”

그 기막힌 변명에 강우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얼마간 고민에 잠겼다.

그동안 예상하던 오수와 현재 눈앞에 오수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 때문이었다.

강우는 이 탑을 세운 게 오수라고 추측했지만, 인제 보니 그도 탑 안에 속박된 존재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만약 탑을 세운 게 그도 아니라면, 대체 이 탑을 세운 자는 누구지?

마침내 강우가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당신이 왜 이 탑에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이 탑을 세운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까? 그럼 당신은 대체 이곳에서 뭘 하는 겁니까? 내게 원하는 건 또 뭐고?”

강우는 자기도 모르게 다소 신경질적으로 말하고 말았다.

답답한 탓이었다.

만약 오수도 <데스 나이트>처럼 모호한 대화 방식을 사용한다면, 바다를 직접 헤엄쳐서 나가는 수가 있더라도 이 섬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오수는 강우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해 주었다.

“하나씩 설명하자면, 이 탑은 내가 만든 게 맞소. 하지만 엄밀하게는 ‘나에 의해 세워진 것’이지, 내가 세운 건 아니오. 이곳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만들어진 세계니까.”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탑은 내 관념이 만들어 낸 허상이오. 신도 아닌 내가 어떻게 수천 년을 버텨 냈겠소? 아무리 뛰어난 정신도 수천 년의 세월을 감당할 순 없다오. 그래서 나는 내 대부분의 기억을 머릿속 밖에 두고 살고 있소. 그게 바로 이 탑이지. 굳이 빗대어 말하자면… 이곳은 내 기억 저장 창고인 셈이오.”

오수의 기억 저장 창고.

그게 바로 이 탑의 진짜 정체였다.

강우가 다음 질문을 던지기 전에 오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둘째로, 내가 이곳에서 지내는 이유를 묻는 거라면… 나는 유랑을 하고 있소. 다시 유랑하는 이유 묻는다면, 그건 조금 더 뒤에 알려 주지. 다음으로 세 번째, 당신을 왜 데려왔느냐고 물었소?”

오수가 강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당신이 이 탑을 무너뜨려 주길 원하기 때문이오.”

탑을 무너뜨린다.

그 정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 강우가 물었다.

“탑을 무너뜨린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간단하오. 내 기억이 파괴된다는 뜻이지.”

오수가 작게 웃었다.

“당신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 머리는 이미 과부하 상태요. 이미 꽉 찬 머리에 새로운 경험을 꾸역꾸역 집어넣고 있지. 그동안은 이 탑에 백업해 두는 방식으로 머리를 비워 냈으나, 이젠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소. 음, 뭐랄까…….”

그가 잠시 고민하는 빛을 보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내 머리는 컴퓨터와 달라서 하나의 기억을 저장할 때마다 하나의 파일이 필요하오. 그리고 그 파일은…….”

그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바로 나 자신이지. 기억들을 백업할 때마다 적게는 열에서 많게는 수십의 내가 생성되고 있소. 이미 이 탑에는 만에 가까운 내가 존재하고 있지. 그들은 오수이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아니오. 나 역시도 오수지만, 그들은 내가 아니지. 우리는 각자만의 자아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모두 성정이 다르오. 어떤 기억을 저장하는 데 사용됐는가에 따라 그 성격도 모두 다르지.”

놀라운 이야기였다.

기억을 저장할 때마다 오수가 하나씩 늘어난다니.

시간 선에 따라 여러 인간이 존재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중에는 이 탑에 남아 있는 것에 불만을 품은 자도 있다는 것이오.”

오수의 얼굴이 심각했다.

“근래 이 탑을 빠져나가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소. 그들이 본격적으로 폭주하기 전에 나는 그들을 처리할 생각이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닌 본체 오수의 계획이지.”

결국 오수의 부탁은 이 탑의 자신을 죽여 달라는 것이었다.

* * *

저녁 메뉴는 멧돼지 고기였다.

오수는 뭍에서 사 왔다면서 고기 위에 연신 붉은 양념을 발랐다.

어제 도루묵에 바른 바로 그 소스였다.

“드시오.”

이윽고 식사가 시작된 가운데, 문득 궁금해진 강우가 물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 보시오.”

“왕족들에겐 왜 저주를 내린 겁니까?”

이전부터 궁금하던 내용이었다.

오수는 왜 굳이 왕족들을 찾아가 저주를 내렸을까.

그들의 소원이 말도 안 되는 것이긴 했지만, 들어주지 않으면 그만.

구태여 그들을 찾아가 저주를 내릴 필요는 없었다.

“간단하오.”

오수가 말했다.

“그건 저주가 아니니까.”

“…저주가 아니다?”

“그렇소. 결과적으로 그들은 불행해졌지만, 나는 그들의 불행을 바라고 소원을 이뤄 준 게 아니오. 되레 그들의 행복을 바랐지.”

왕족들을 언데드로 만든 게 행복을 바라서 한 일이라니…….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오수는 진지했다.

“생각의 차이라 이해하시구려.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내 방식은 선(善)에서 비롯된 것. 그러나 그 결과까지 선(善)하리라는 보장은 없소.”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고방식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굳이 그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아니니까.

동물의 사고방식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 행동 모두를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사는 세계가 다른 것이다.

자신의 대답에도 강우의 표정이 나아지지 않자, 그가 강우에게 넌지시 물었다.

“할 말이 남아 보이는구려.”

“나는 당신이 석탈해를 없애기 위해 날 불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이야기들은 그와는 거리가 멀군요.”

“그랬군.”

오수가 희미하게 웃었다.

“분명 석탈해 또한 큰 문제가 맞소. 그는 모든 시간 선을 처리하고 제 손에 넣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시간 선만 남기고자 하지. 분명 그 과정에선 무수한 생명이 다치고 죽을 것이며, 실제로도 그렇게 됐소.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 내게 놈을 막을 방도가 없다는 것이오.”

“…….”

“나는 무력하오. 숲을 당신에게 맡긴 것처럼. 석탈해가 그 숲 귀신이라면 좀 이해가 되겠소?”

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눈앞의 오수에게는 석탈해를 막을 힘이 없어 강우를 부른 것이었다.

그는 진짜 오수의 무수한 기억 파편 중 하나에 불과했으니까.

이 탑의 모든 오수가 석탈해에게 반감을 품은 건 아니었다.

그중에는 바깥세상에 별 관심이 없는 자도 있고, 되레 놈을 지지하는 놈도 있었다.

그래서 <데스 나이트>와 공조한 몇몇 오수들이 그들을 해치워 강우에게 힘을 주고자 한 것이다.

오수는 신에 가까운 존재.

그 힘을 흡수한다면, 분명 석탈해에게 맞서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단 한 가지만 명심하시오. 모든 축복에는 하나의 저주가 따르고, 모든 저주에는 하나의 축복이 따르오. 모든 축복은 저주이고, 모든 저주는 축복이지. 당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축복이자 저주.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잘 헤쳐 나가야 할 것이오.”

“…….”

축복이자 저주.

그건 강우가 이곳으로 오기전 들은 말과 비슷한 것이기도 했다.

― 불행해질 것이다.

― 설사 그렇다 해도?

아직 강우는 그들이 말한 불행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럼 부디 건투를 빌겠소.”

그걸로 대화는 끝이었다.

그날 밤은 그렇게 저물었지만, 방으로 돌아간 강우는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낮에 본 이들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 강우 씨?

특히나 하나의 목소리는 여전히 뇌리에 깊게 남아 있었다.

“후…….”

그렇게 강우가 밤새 고뇌하는 사이, 새벽이 밝았다.

머릿속이 어떻든, 지금은 이 섬의 두 번째 괴물을 처리해야 할 시간이었다.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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