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헌터-139화 (140/186)

[139화] 숲 귀신 (2)

“…….”

숲을 벗어나는 길.

아이들은 아까부터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강우의 눈치만 살폈다.

로드리게도 아까의 일이 민망했는지, 다가올 듯 말 듯 옆에서 서성거리고만 있었다.

하긴 숲 귀신에게 몽둥이로 맞선 것으로도 모자라, 죽이기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서워할 만도 했다.

강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굳이 먼저 말을 걸지는 않았다.

이곳은 하나의 시험장.

이 아이들과의 인연은 이 대나무 숲과 섬까지일 터였다.

굳이 정을 붙여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정(情).

과거에는 부족한 감정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삶을 살게 되면서 강우에겐 확실히 정(情)이라는 게 생겼다.

장혜진에게만 국한되어 있던 감정이 타인에게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언젠가 장혜진은 그것이 ‘공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공감이란 하루에도 수십 마리의 마물을 처리해야 하는 헌터들에겐 오히려 독(毒)이 되는 감정이었다.

아무리 적이라고 하지만, 마물도 하나의 생명.

살아 있는 존재의 숨통을 끊는다는 건, 어지간히 모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니까.

굳이 스스로 약점을 만들 필요는 없다.

“저기…….”

얼마나 걸었을까.

말을 걸어온 건 다름 아닌 찰스였다.

강우는 뒤늦게 그의 정체를 깨달았는데, 어릴 적부터 미국에서 살아온 이승우의 영어 이름이 찰스였다.

언젠가 TV 인터뷰 쇼에서 이승우가 인터뷰한 걸 떠올리지 않았다면, 영영 모를 뻔한 사실이었다.

실제 이승우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자신이 아는 이승우와 찰스는 사뭇 달랐다.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던 이카루스 길드장 이승우와 달리 지금의 찰스는 아이들에게 신뢰 높은 리더였으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찰스가 말했다.

“고마워.”

그 말에 걸음을 멈춰 선 아이들이 강우를 쳐다봤다.

다들 같은 마음이었다.

강우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지금쯤 죽은 사슴 옆에 누워 놈의 이빨에 씹어 먹히고 있었겠지.

“늦었지만 나도 감사를 표한다. 고맙다.”

“고, 고마워.”

찰스와 로드리게를 시작으로 뒤늦게 아이들이 하나둘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중에는 첫 만남 때부터 도도하던 한선화도 있었다.

“고, 고맙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널 받아준 건 아니야. 그, 그렇다고 또 고맙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무슨 말인지 알지?”

“…….”

사실은 잘 이해하지 못했으나, 강우는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선화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시 물었다.

“혹시 너, 여자 친구 있니?”

“앗?”

갑작스러운 돌발 질문에 옆에 있던 황한수가 화들짝 놀라며 한선화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아이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빚지고 사는 건 딱 질색이라서 말이야. 여자 친구 없으면 내가 한 달 정도 해 줄게. 뭐, 계속 보니 좀 귀여운 것도 같고… 그 거지 같은 옷만 갈아 치우면 봐줄 만할 것 같네.”

“…….”

어쩐지 여기서 더 지체하면 골치 아파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강우는 서둘러 대답했다.

“있다. 여자 친구.”

“…뭐?”

강우의 대답이 충격적이었는지, 한선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자 친구 있다고?”

“그래. 결혼도 했다.”

“…겨, 결혼?”

멍한 한선화의 반응에 옆에 있던 아이들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얼굴이 빨개진 한선화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저, 정략결혼을 했으면 진즉 말했어야지! 그, 그리고! 설마 다들 내가 차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나도 좋아서 그런 건 아니야! 유부남에겐 나도 관심 없다고!”

그제야 표정을 푼 황한수도 배꼽을 잡고 웃으며 낄낄댔다.

“푸하하! 한선화, 유부남한테 까였대요!”

“뭐야?! 안 닥쳐?”

“아악! 왜 또 나한테만 그래?!”

한선화가 자신을 놀리는 황한수의 머리를 다시 한번 쥐어뜯는 사이, 강우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

그런데 그 뒤에는 유아라가 있었다.

그녀는 마치 듣지 말아야 할 거라도 들은 얼굴이었는데, 강우를 바라보는 시선에 약간의 원망마저 묻어 나오는 듯했다.

곧 소녀의 눈망울에 눈물이 고이더니, 뒤에 숨기고 있던 무언가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저 멀리 달려갔다.

바닥에 버려진 건 이름 모를 노란 꽃이었다.

민들레만 한 꽃 세 송이를 엮어 만든 작은 꽃다발.

설마 저 꽃을 주려고 한 건가?

강우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다가온 로드리게가 말했다.

“그대는 죄가 많은 남자로군. 하긴, 강한 전사에겐 많은 여인이 따르는 법이지. 골치 좀 아프겠어.”

찰스도 한마디 보탰다.

“그냥 받아들여, 친구. 본래 영웅이란 필연적으로 사랑과 원망을 동시에 받는 존재니까.”

“…….”

이 세계의 장르가 혼란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로드리게가 물었다.

“안 가 볼 건가? 숲 귀신이 사라졌다고 해도 이 숲에는 그녀에게 위협이 될 짐승이 많다.”

유아라를 쫓아가 보라는 뜻이었다.

여전히 뒤는 싸움을 벌이는 한선화와 황한수를 서유리가 말리느라 바빴다.

둘이 진정되려면 시간이 꽤 걸릴 듯했다.

“…다녀오지.”

“좋은 생각이다.”

그냥 숲을 나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들을 무사히 숲으로 데리고 나가야 모든 미션이 끝이 날 것 같았다.

곧 강우는 유아라가 달려간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흑…….”

강우가 도착했을 때, 일곱 살의 유아라는 대나무 아래 웅크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그 모습이 퍽 애처로워 보였다.

강우는 잠시 그 앞에 서서 그녀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현실에서는 거리를 두기로 했지만…….

환상 속에서라면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윽고 강우가 입을 열었다.

“괜찮나?”

하지만 유아라는 강우의 부름에도 얼굴을 들지 않고 계속 울기만 했다.

만약 이 환상이 현실을 토대로 만들어진 거라면, 어릴 적 유아라는 엄청난 울보였던 게 분명하다.

보다 못한 강우는 앞에 쪼그려 앉자, 기척을 느낀 유아라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숲 귀신을 만난 순간부터 눈물을 흘린 탓인지, 그녀의 두 눈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강우는 그 눈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도무지 왜 우는지 모르겠군. 내가 부인이 있어서 그런가?”

…부인이 있어서 그런가라니.

강우는 자신이 뱉은 말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나이가 어려진 탓인가?

어쩐지 자신의 말투도 함께 어려진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유아라의 반응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응.”

“…….”

강우가 다소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이야기했다.

“울 엄마가 관심이 없으면 여지를 주면 안 된다고 했어.”

“…내가 대체 언제, 어디서, 무슨 여지를 주었지?”

“아까, 숲 입구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냐면서 다정하게 굴었잖아.”

“…….”

“손도 잡고.”

모르긴 해도, 유아라는 속된 말로 금사빠가 분명했다.

“그런 건 이성적인 관심이 없어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서로 호감이 없어도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손을 잡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엄밀하게 말하면 그건 손을 잡은 게 아니라 악수였다. 그런 것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했다가는 인간의 정신이…….”

강우가 장황하게 그 일이 ‘여지’가 아닌 이유를 설명하자 유아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듣기 싫어.”

“뭐?”

“듣기 싫다고.”

유아라의 표정이 뿌루퉁했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넌… 여자의 마음을 몰라.”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처…음이었단 말이야, 먼저 손잡은 거.”

“…….”

그 악수에는 그런 의미가 있었군.

강우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순 없는 노릇.

그는 서둘러 이곳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오수의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런 어린아이 사랑놀이에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면 더더욱.

강우가 일어나며 말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다들 널 기다리고 있어. 혼자 다니다가 다른 짐승을 만날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러자 잠시 강우를 올려다보던 유아라가 입술을 달싹였다.

알아듣지 못한 그가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자, 그녀가 다시 옹알거렸다.

“…손.”

“……?”

유아라가 수줍게 말했다.

“손… 잡아 주면.”

“…….”

…가지가지 하는군.

강우가 마지못해 손을 내밀자, 유아라가 그것을 꼬옥 붙잡았다.

쥐기조차 걱정될 정도로 희고 작은 손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붙잡은 채 대나무 숲을 걷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으나, 아직 그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다.

손을 잡은 뒤로 조용하던 유아라가 물었다.

“저기…….”

“뭐지?”

“정말 부인이 있어?”

“…있다.”

강우의 대답에 유아라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선화가 싫어서 거짓말한 건 줄 알았어.”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어떻게 벌써 결혼한 거야? 집안에서 시켰어?”

단둘이 남은 탓인지, 유아라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을 잘 걸어왔다.

강우가 대답했다.

“…글쎄, 어쩌다 보니.”

사실 강우도 어쩌다가 장혜진과 결혼하게 됐는지는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였고, 자연스럽게 서로를 알게 됐으며, 서로에게 이끌려 만나게 되었다.

그 어떤 썸도, 고백도 오가지 않았지만,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함을 잘 알았다.

강우의 대답에 유아라가 입술을 삐죽였다.

“치… 그게 뭐야. 어쩌다 결혼하는 사람이 어딨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우리가 예상치 못하는 일들이 무수하게…….”

“듣기 싫어. 넌 말을 너무 어렵게 해.”

“…….”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그냥 이렇게 대답해 주면 안 돼?”

강우는 유아라의 꾸짖음에 입을 다물었다.

본래의 자신은 단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새로운 시간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대하지 못했다.

강우의 얼굴을 슬쩍 본 유아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같이 잤어?”

“…….”

강우는 그것으로 현재의 상황이 환상임을 확실히 깨달았다.

일곱 살 여자아이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 둘은 아이들이 기다리는 공터에 도착했다.

다행히 한선화와 황한수의 싸움도 끝났는지, 그들은 한층 진정한 모습이었다.

유아라를 발견한 찰스가 앞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아라야, 그렇게 말도 없이 혼자 가면 어떡해? 숲이 얼마나 위험한데.”

“…미안.”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탓인지, 유아라는 다시 소심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이전과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건 강우의 손을 붙잡고 있다는 점이었다.

강우와 유아라가 계속 손을 잡고 있자, 그것을 못마땅하게 보던 한선화가 한마디 했다.

“저러고 있는 폼이 꼭 엄마 찾은 해달 같네.”

“…….”

유아라는 한선화의 비꼼이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지만, 여전히 손은 놓지 않았다.

오히려 붙잡은 강우의 손에서 힘을 얻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다… 다…….”

“뭐? 안 들려, 꼬맹아. 제대로 말해 봐.”

한선화의 도발에 유아라가 입안에 맴돌던 말을 힘겹게 뱉어 냈다.

“다, 닥쳐, 왕선화.”

“…….”

순간, 정적이 일었다.

모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유아라를 바라보는 가운데, 당황한 한선화가 말을 더듬으며 어버버 했다.

“뭐,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유아라도 자기가 뱉은 말에 스스로 놀란 표정이었지만, 한 번 뱉은 탓인지, 두 번째는 쉬웠다.

그녀가 또박또박한 말투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닥치라고. 나 놀리지 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헐.”

찰스도, 황한수도, 로드리게도 입을 쩍 벌린 채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이게……!”

결국 참지 못한 한선화가 유아라에게 달려들던 그때였다.

강우는 서둘러 손을 잡아당겨 한선화의 손에서 유아라를 지켜 냈다.

하지만 그것이 꼭 유아라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어?”

얼떨결에 강우의 품에 안긴 유아라가 두 눈을 크게 뜨는 사이, 강우는 어느새 하늘을 쳐다보며 외쳤다.

“모두 자세를 낮춰라!”

콰과과과과!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던 대나무들이 일제히 쓸려 나가며 굉음을 토했다.

사방이 이파리와 나무 파편, 먼지로 가득했다.

강우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공격한 존재를 바라봤다.

“…….”

이곳에서 불과 50미터쯤 떨어진 곳.

어느새 나타난 숲 귀신이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심지어 놈은 하나가 아니었다.

놈의 뒤로 우뚝 선 다른 세 마리의 숲 귀신이 보였다.

하나같이 붉은 도포를 입은 괴물들.

날름.

아이들을 공격한 숲 귀신이 긴 혀를 내밀어 귀까지 찢어진 입술을 핥았다.

마치 군침이 돈다는 듯.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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