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외딴 섬 (4)
‘…마법인가.’
강우가 달라진 제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사이, 찰스를 비롯한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난 황한수야.”
“나는 유리. 서유리.”
“나는…….”
아이들의 이름은 하나같이 강우의 주변 인물이었는데, 언뜻 그 얼굴들이 다 닮아 보였다.
‘…어린 시절?’
정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색다른 기분이랄까.
강우는 익숙한 아이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어린 나이부터 갈라진 근육이 보이는, 저 까무잡잡한 아이는…….
“로드리게다. 아르헨티나 전사의 후예이지.”
설마했는데, 정말로 로드리게였다.
열 살의 로드리게는 짧은 까까머리에 스크레치를 넣은 강한 인상이었는데, 찰스와 더불어 이 무리의 대장 격으로 보였다.
아이는 모두 여섯이었다.
찰스, 유아라, 황한수, 서유리, 한선화, 로드리게.
그때, 유일하게 처음 듣는 이름인 찰스가 말했다.
“한강우. 우린 지금 숲 귀신을 잡으러 가는 중이야. 너도 같이 갈래?”
이 아이들이 숲 귀신을?
강우는 잠시 고민했다.
오수는 숲 귀신이 둔갑술과 분신술에 능하다면서, 그 눈속임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이 놈과 관련 있을 확률도 있었다.
숲에 다다른 순간부터 숲 귀신의 수작질이 시작됐다면?
이 아이들마저 탑이 아닌 놈이 꾸며 낸 허상일지도 모르는 일.
이윽고 결정을 마친 강우가 대답했다.
“좋다.”
사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차피 이곳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탑을 더 등반할 수 없을 테니까.
예상과 다른 탑의 구성이 다소 당황스럽긴 해도 피할 수 없다면 마주할 뿐.
강우는 늘 하던 대로 부딪쳐 보기로 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대는 용기 있는 아이다. 아르헨티나 전사의 후예인 내가 인정한다.”
강우의 승낙에 황한수와 로드리게는 크게 기뻐하며 반겼고, 서유리는 손뼉을 쳤으며, 유아라는 수줍은 듯 슬쩍 강우를 보고, 한선화는 아까부터 팔짱을 낀 채 강우를 의심스럽게 노려보고 있었다.
“…….”
강우는 그 제각각인 시선들에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윽고 강우를 포함한 일곱 명의 아이가 대나무 숲에 들어섰다.
사아아아아―
한 차례 바람에 대나무들이 흔들리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마치 수백, 수천의 매미들이 날개를 동시에 떠는 듯한 소리였다.
대나무로 가득한 이곳은 사뭇 어두웠는데, 거기에 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겹쳐지자 불길한 분위기가 한층 더해졌다.
그러자 황한수가 살짝 겁먹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꼭 바람이 우릴 기다렸던 것 같네.”
“아니. 바람은 사람을 기다릴 수 없어. 그런 생각을 여덟 살이나 먹고 하다니… 한수, 넌 여전히 어리구나?”
“뭐야? 말 다했냐, 왕선화?”
“뒈질래? 내가 또 왕선화라고 하면 땅에 묻어 버릴 거라고 분명 말했지?”
“오냐, 한 번 해보자! 나 황한수야!”
황한수가 기세 좋게 멱살을 잡자, 한선화도 지지 않고 그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아악! 이거 놔!”
“진정해, 선화야!”
난장판이었다.
황한수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서유리가 다급히 달려가 둘을 말리고, 뒤에 선 유아라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싸우지 마……’라고 속삭였다.
“…….”
강우는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며 한숨을 흘렸는데, 그러고 보니 자신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아이가 둘이나 더 있었다.
“…유치하긴.”
바로 찰스와 로드리게였다.
멀찍이 선 두 동갑내기는 싸움을 벌이는 친구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우야, 저 멍청이들은 내버려 두고, 우린 무기나 찾아보자. 내가 새총을 가져오긴 했지만, 이걸로는 부족해. 제대로 된 사냥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장비가 중요하다고. 우리 아빠가 그랬어, 싸움은 장비빨이라고.”
“동감이다.”
찰스의 말에 로드리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우는 한 가지 의문을 느끼고 물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위험한 숲에 들어오면 가족들이 걱정할 텐데. 집에는 제대로 말하고 나왔나?”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강우가 질문을 던지자마자 주변이 쥐 죽은 듯 고요해진 것이다.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채 코피를 흘리는 황한수도, 여전히 씩씩대며 한수의 머리를 쥐어뜯던 한선화도, 그들을 말리던 서유리와 유아라도.
모두가 일제히 행동을 멈추고 강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강우가 그런 아이들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이, 옆에 서 있던 찰스가 말했다.
“우린 가족이 없어.”
가족이 없다고?
그제야 강우는 이 아이들이 왜 위험한 숲에 들어왔는지 깨달았다.
아이들이 숲 귀신을 잡으러 온 데에는 다 그만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이건 단순히 치기 어린 아이들의 소꿉장난이 아니었다.
그때, 로드리게가 대뜸 허리에 차고 있던 보자기를 풀어내더니, 활짝 열어젖혔다.
보자기 안에 든 건 깨진 유리 조각이었다.
로드리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것을 맨손으로 쥐었다.
“여기 있는 모두는 숲 귀신에게 가족을 잃었다.”
열 살짜리 아이의 눈에서 도무지 그 나이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울화(鬱火)가 이글거렸다.
“찰스는 자신을 잘 따르던 사촌을 잃었고, 한선화는 아버지를 잃었으며, 유아라는 언니를 잃었다. 그래서 남은 가족들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지.”
“…….”
강우는 묵묵히 각자의 사연을 들었고, 로드리게의 말은 계속됐다.
“황한수는 사랑하는 할아버지와 삼촌을, 서유리는 아끼는 친구들을 잃었다. 나 역시도 놈에게 오래된 형제들을 잃었고. 이곳에서 상실의 아픔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너는 그러하지 않은가?”
결국 이 모임은 숲 귀신에게 가족을 잃은 아이들의 복수를 위해 만들어진 모임이었다.
강우의 대답이 늦어지자 로드리게가 더욱 인상을 쓰며 재차 물었다.
“너는 아니냐고 물었다.”
어느새 유리 조각을 쥔 로드리게의 손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나 또한 그러하다.”
상실의 아픔.
강우 역시도 수많은 상실을 겪은 사람이었다.
그게 저 아이들의 상처보다 깊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뼈저리게 아프고 가슴에 사무친 건 사실이었다.
아픔의 무게는 경쟁할 필요가 없는 것.
강우의 상실과 아픔은 고스란히 그 자신의 것이었다.
상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우리는 하나’라는 동질감을 부여하는 매개체였고, 강우의 인정은 그 역시도 이 무리에 속할 자격이 있다는 뜻이었다.
로드리게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로군.”
“…….”
강우의 대답으로 상황은 일단락됐다.
아이들은 언제 싸웠냐는 듯 다시 숲을 걷기 시작했고, 걸어가는 도중 찰스와 로드리게의 말에 따라 각자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챙겼다.
심수련이 준 단검은 어느샌가부터 보이지 않았기에, 강우도 무기를 찾아 나섰다.
그가 든 것은 30∼40센티미터쯤 되는, 작은 몽둥이였다.
아이들 몰래 슬쩍 마력을 흘려보내자, 그것이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다행히도 아직 마력은 사용할 수 있었다.
“잠깐 쉬자.”
약 30분 정도 더 걸었을 때, 선두에 있던 찰스가 아이들을 멈춰 세웠다.
어린 탓인지 얼굴이 붉게 상기된 아이들은 기진맥진했다.
이대로는 숲 귀신을 만나기도 전에 탈진할 것 같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한선화가 원피스 아래로 드러난 자신의 무릎을 힘겹게 두드렸다.
깔끔하던 하늘색 원피스는 어느새 땀과 먼지로 인해 엉망이었다.
“다리 아파.”
“나도.”
“배고파…….”
한선화가 푸념을 쏟아 내자 기다렸다는 듯 황한수와 유아라도 앓는 소리를 내었다.
모두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때, 유일하게 서 있던 로드리게가 규칙적으로 호흡을 고르며 말했다.
“저번에 죽은 형제가 이 시간대에 숲을 찾았다고 했다. 놈은 분명 이 주변에 있다.”
그러자 아이들의 표정이 다시 결연해졌다.
그들은 이 끝을 알 수 없는 숲속에서 가족의 원수를 기어이 찾아낼 생각인 듯했다.
‘…곤란하군.’
하지만 강우의 생각은 달랐다.
결연한 표정과 달리 아이들은 싸울 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
일단 복장부터 싸움과는 어울리지 않고, 무기랍시고 든 나뭇가지와 새총은 토끼 하나 잡기도 어려워 보였다.
또한 가장 중요한 물도 챙겨 오지 않았으며, 허기진 배를 달랠 만한 먹을 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나마 서유리가 챙겨 온 비스킷이 먹을 것의 전부였다.
잠시 고민하던 강우가 말했다.
“일단은 물을 찾는 게 좋겠다.”
“…물?”
“그래. 이래서는 숲 귀신을 찾기도 전에 모두 아사(餓死)할 것이다.”
그러자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황한수가 물었다.
“아사? 아사가 뭔데?”
“아사도 모르냐, 멍청아? 굶어 죽는다는 거잖아.”
“…우씨, 선화 얜 입만 열면 잘난 척이네. 재수 없어.”
“넌 입만 열면 헛소리잖아. 무식하면 입을 다물고 있든지.”
강우는 또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서둘러 말을 이었다.
감각은 흐려졌으나, 다행히 계곡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오면서 오른편에서 물소리를 들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계곡이 있는 것 같다. 그쪽으로 가지. 저쪽이다.”
강우가 손가락질하자 모두는 그 의견에 찬성했다.
내색은 안 했지만, 다들 목이 말랐던 것이다.
계곡을 찾아가는 길.
이번에도 선두는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로드리게와 찰스였다.
혀를 내민 황한수가 여름 날 개처럼 헥헥대는 사이, 다가온 한선화가 도도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강우, 너… 보기보다 똑똑하구나?”
그녀가 팔짱을 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난 아직 너 안 믿어. 네가 숲 귀신을 잡으러 왔다는 증거가 없잖아? 우리에게 인정받기 위해선 확실히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럼 지켜보겠어.”
한선화는 그대로 몸을 돌려 앞서 걷기 시작했고, 강우는 성인이 돼서나 어릴 때나 한결 같은 그 모습에 작은 한숨을 흘렸다.
“서두르자. 밤이 되기 전에 놈을 찾아야 해.”
아이들은 찰스를 따라 계속해서 강우가 알려 준 방향으로 걸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강우는 문득 하나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유아라였다.
대열의 맨 후미에 있던 그녀는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어느새 강우의 지척에 서 있었다.
겁먹은 듯 한껏 주눅 든 표정.
그녀는 강우가 고개를 돌리자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
두 손을 맞잡은 채 꼼지락대는 모습이 꼭 비 맞은 고양이 같았다.
유아라는 낯가림이 심해서 그렇지, 가까워지면 한없이 맑아지는 타입인데…….
― 좋아해요.
해안가에서 속삭이던 유아라의 말이 여전히 귓가에 생생했다.
그녀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강우가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으, 응? 나 말이야?”
그러자 유아라는 말을 더듬으며 몹시 허둥거렸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게, 괜히 말을 건 모양이었다.
강우는 그녀를 위해 시선을 떼기로 했다.
괜히 말을 걸어 봐야 불편함만 더 할 테니까.
그런데 강우가 몸을 돌리자 유아라가 황급히 손을 뻗었다.
“저, 저기……!”
그녀가 손을 뻗는 것과 강우가 돌아본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 탓에 유아라의 손가락이 살짝 강우의 옷자락에 닿았다.
“아아……!”
그러자 유아라는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다.
“미, 미안해.”
어릴 적엔 이렇게나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나?
“괜찮다.”
그러자 머뭇대던 유아라가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난… 유아라야.”
“…….”
그러고 보니 아까 스스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은 유아라가 유일했다.
그녀를 소개해 준 건 서유리였다.
그 작은 손을 바라보던 강우도 곧 손을 뻗어 그녀의 악수를 받았다.
“한강우다.”
유아라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본 한선화가 코웃음을 쳤다.
“별꼴이야. 너, 저 애 좋아하니?”
“아, 아니, 난 그저……!”
한선화의 놀림에 유아라가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유아라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던 그때.
앞서 있던 로드리게가 서둘러 자세를 낮추며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돌아본 그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놀란 모두가 숨죽이며 몸을 숨기는 사이, 강우도 서둘러 로드리게와 찰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예상대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계곡이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예상치 못한 존재도 그곳에 함께 있다는 점이었다.
찰스가 긴장한 얼굴로 자신의 새총을 고쳐 쥐었다.
“저거…….”
그건 사람이었다.
회색 머리를 발등까지 늘어뜨린 정체불명의 괴한이 이쪽을 향해 등진 채 계곡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우드득―
놈은 붉은 저고리를 입고 있었는데, 무언가를 먹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슴이었다.
여전히 살아 있는 사슴이 괴한의 앞에서 쓰러져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놈은 사슴의 내장을 꺼내 먹고 있던 것이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로드리게가 천으로 감싼 유리 조각을 쥐며 말했다.
“숲 귀신이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