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발광지옥 (3)
며칠째 고기를 먹지 못한 도봉팔이 핼쑥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여기가 바로 지옥도야…….”
그간 쉬지 않고 이곳을 수색한 결과, 그들은 이 <발광 균열>이 거대한 하나의 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카아아아악!
상공을 배회하는 <스컬 드래곤>의 포효가 온 해변에 울려 퍼지고, 그 아래에선 각자의 무기를 쥔 <스켈레톤>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일행을 찾고 있었다.
꿀꺽.
누구의 것인지 모를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현재 일행은 모래사장과 연결된 해안절벽 아래 숨어 있었다.
바닥에선 <스켈레톤>이 끊임없이 솟아져 나오고, 하늘에선 <스컬 드래곤>이 날아다니는 언데드들의 섬.
이곳이 지옥이 아니면 무엇이랴.
그나마 해변의 진흙을 바르면 놈들의 추적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다는 것.
낮이 되면 마물들이 사라진다는 것.
그 두 가지 사실만이 일행이 이 섬에서 얻을 수 있는 희망이었다.
“얼마나 됐어?”
도봉순의 물음에 일행 중 유일하게 시계를 가진 유아라가 말했다.
“4시 50분이요. 동트려면 아직 한 시간도 더 남았어요.”
웬만한 전자기기는 진즉에 다 작동을 멈췄고, 유아라의 아날로그시계만이 간신히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언제 망가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한 시간이라… 제발 오늘 밤도 무사했으면 좋겠는데.”
도봉순이 입술을 깨물며 여전히 일행을 찾고 있는 <스컬 드래곤> 쪽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그동안은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오늘 점심 식사를 끝으로 가지고 온 전투식량도 모두 동이 났다.
애초에 이곳에 이렇게 오래 머물 생각이 아니었기에 물자를 충분히 챙겨 오지 않은 것이다.
이제부터는 정말 생존의 영역이었으나, 여전히 앞은 캄캄했다.
이 섬에 ‘살아 있는’ 생명체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낮의 섬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마물이 사라지고 고요함만이 살아 숨 쉬었다.
회색 바다, 푸석한 풀, 말라비틀어진 나무, 검고 딱딱한 바위.
해가 뜨면 섬은 돌연 시커멓게 변해 그 무엇도 살아 움직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밤과 낮에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건 섬 곳곳에 박힌 발광석과 그들이 발광화(花)라 이름 붙인 꽃뿐.
이곳은 그야말로 죽음의 섬이었다.
‘낮과 밤이 다른 균열이라니…….’
도봉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껏 여러 의뢰를 맡아 왔지만, 지금만큼 막막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의왕 IC로 청익을 구하러 갔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녀는 여전히 고민에 잠긴 채 <스컬 드래곤>을 살피는 유아라와 어제부터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김민정을 번갈아 쳐다봤다.
유아라는 그렇다고 쳐도 2차 각성자인 김민정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앞으로 이틀? 삼 일?
의뢰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의뢰인이 사망한다면, 그것보다 수치스러운 일이 없었다.
‘최악의 사태만은 막아야 해.’
다행히 도봉팔과 유아라가 김민정을 잘 돌보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돕지는 않아도 묵묵히 그 곁을 잘 지키고, 눈치 못 채게 주변을 대신 지켜 주고 있던 것이다.
‘반드시 살아서 나간다.’
그렇게 도봉순이 결의를 다지는 사이, 유아라도 신중하게 살아남기 위한 계획을 짜는 중이었다.
‘남은 비늘은 둘.’
강우는 <백귀 균열> 이후로도 자신의 마력이 담긴 <이무기의 비늘>을 예비용으로 들고 있게 했다.
브레이크 때를 포함해 이미 사용한 비늘은 모두 넷.
그녀는 품속으로 손을 넣어 숨겨 둔 마지막 비늘들을 만지작거렸다.
‘이걸로 어떻게든 해결 지어야 해.’
유아라는 아까부터 옆에서 거친 숨을 토해 내는 김민정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마력 농도가 짙은 탓에 그녀는 숨만 쉬어도 체력이 점차 고갈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이틀을 채 넘기지 못할 듯했다.
‘마력의 농도가 점차 짙어지고 있어.’
날이 갈수록 이곳의 난이도는 점차 상승했다.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때였다.
[이 쥐새끼들! 어디로 숨어 버린 것이냐!]
익숙한 사내의 목소리가 온 섬에 울려 퍼졌다.
<네크로맨서>이자 이 <닫힌 균열>의 보스라 추정되는 사내의 목소리였다.
[네놈들의 악행을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느냐! 반드시 네놈들을 찾아내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상어 밥으로 주겠다!]
그의 이름은 ‘레비아탄’이었다.
이름을 알게 된 계기는 간단했다.
[이 대전사 레비아탄이 네놈들을 결코 용서치 않겠다!]
[나는 아말샨 족의 자랑, 레비아탄! 한 번도 상대를 놓친 적이 없다!]
[아먈산은 포기를 모른다! 네놈들이 어디로 숨든 심해 끝까지 쫓아가 주마! 나는 아먈샨의 대전사 레비아탄이다!]
레비아탄이 시도 때도 없이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자기 이름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한 듯했다.
“자기애 과다 사이코패스 새끼…….”
도봉팔이 이를 갈며 욕지거리를 내뱉었으나, 밖으로 나설 수는 없었다.
절벽을 나서자마자 수백 <스켈레톤>의 표적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저 멀리 수평선으로 해가 떠오르는 게 보이자, 도봉팔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살았다.”
오늘 밤도 무사히 넘긴 것이다.
해가 떠오르자 <스컬 드래곤>과 침입자를 쫓던 <스켈레톤>들이 허공으로 산화해 소멸했다.
벌써 며칠째 본 반복적인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레비아탄의 대사가 대미를 장식했다.
[네놈들! 오늘 밤이 정말 마지막일 것이다! 기다리고 있어라! 레비아탄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뻐큐다, 개자식아.”
그제야 절벽 밖으로 나선 도봉팔이 <스컬 드래곤>이 있던 쪽으로 손가락 욕을 날렸다.
“후아.”
“하, 오늘은 정말 붙잡히는 줄 알았어요.”
다시 섬이 죽음의 섬으로 변해 가는 가운데, 모두는 잿빛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난밤, 절벽에 숨기까지 <스켈레톤>에게 세 시간 넘게 쫓긴 그들이기에 피로는 더 극심했다.
다들 억누르고 있던 숨을 터뜨리는 사이, 유아라가 입을 열었다.
“이대로는 안 돼요.”
아침이 되자 바닷물은 회색빛으로 변했다.
저 멀리서 불어온 해풍을 타고 썩은 바다에서 날 법한 악취가 전해져 왔다.
역겨운 듯 숨을 뱉어 낸 도봉순이 얼굴에 말라붙은 진흙을 떼어내며 물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지원이 오길 기다리는 것도 한계가 있어. 무슨 좋은 수가 있어?”
그러자 유아라가 답했다.
“레비아탄을 제압해야죠.”
그 말에 도봉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레비아탄을 잡으려는 노력을 안 한 게 아니었다.
놈이 밤에만 활동한다면, 낮에는 분명 이 섬 어딘가에 숨어 휴식을 취할 터.
일행은 낮 동안 쉬지 않고 수색을 거듭했다.
하지만 아무리 섬을 뒤지고 또 뒤져도 <네크로맨서> 사내, 레비아탄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고작 네 사람이 샅샅이 수색하기에는 이 섬은 너무나도 광활했다.
만약 놈이 저 바다에서 쉰다면?
배 한 척 없는 그들이 무슨 수로 그것을 찾겠는가.
“하지만 놈이 당최 모습을 드러내질 않잖아. 결국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해야 하는데, 유인할 방도가 도무지 떠오르질 않아. 네크로맨서인 놈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이유도 없고.”
“그래서 제가 좀 고민을 해 봤는데요…….”
유아라가 대뜸 도봉팔을 쳐다봤다.
“…응? 왜?”
“레비아탄의 말투가 어딘가 도봉팔 씨와 비슷하지 않아요?”
“…아닌데? 전혀?”
부정하는 도봉팔과 달리 도봉순은 손으로 턱을 괸 채 눈을 좁혔다.
“음, 그런 것도 같고?”
김민정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동감하는 눈치였다.
유아라가 말을 이었다.
“레비아탄은 계속해서 자기 부족과 이름을 말하고 있어요. 자부심이 어마어마한 셈인데… 대개 그런 사람들은 도발에 약한 경우가 많았어요.”
“음, 봉팔이가 조금 그런 면이 있긴 하지.”
“아니라고! 내 말투가 그 사이코패스와 닮았다고?!”
“그러니 도발을 해 보는 건 어떨까요?”
“도발을 해서 놈을 이끌어 내자? 그때 다 같이 덮쳐서 처리하고?”
“맞아요.”
“음… 될 것도 같고.”
“아니라니까! 지금 내 말 듣고 있냐, 니들?”
옆에서 아무리 도봉팔이 열변을 토해도 도봉순과 유아라는 계속해서 자신들의 생각을 나눴다.
결국 도봉팔과 레비아탄의 말투나 성격은 비슷하고, 도발에 약하며, 그것을 이용해 그를 처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일행은 오늘 낮만큼은 수색을 벌이지 않았다.
대신 긴 휴식을 취했다.
그 시간만큼 김민정의 호흡이 더 가빠졌으나, 지금은 달리 해 줄 게 없었다.
곁에서 그녀를 걱정스럽게 보던 유아라가 뒤늦게 품속에서 <이무기의 비늘> 하나를 꺼냈다.
“이거…….”
김민정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유아라가 조심스럽게 그것을 건네며 말했다.
“혹시라도 위기가 오면 찢어 보세요.”
“찢어 보라고요?”
비늘을 받아 든 김민정은 경계 가득한 표정으로 비늘을 살폈다.
며칠간 함께하긴 했으나, 김민정은 아직 검계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상태였다.
게다가 아직 가족도 구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녀의 마음의 문이 열리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나와 닮은 사람이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김민정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만 가득했으나, 지금 유아라는 그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녀의 사정을 알고 며칠간 함께한 결과, 과거의 자신과 그녀가 비슷한 구석이 많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김민정은 아직 ‘믿음’과 ‘약속’의 열매를 맺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만약 그것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단 한 번만 경험할 수 있다면, 잔뜩 날이 선 김민정의 마음도 조금은 변화할 거라고 유아라는 믿었다.
그건 자신이 직접 경험한 바이기도 했다.
‘역시 따듯한 사람이었어.’
유아라는 강우를 떠올렸다.
비록 말은 틱틱대고, 사람에 관심 없는 듯 보이지만, 그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게 본성이든, 과거로 돌아와 얻은 새로운 심성이든.
어느 쪽이든 그게 한강우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고슴도치 같은 사람.’
강우를 떠올린 유아라는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웃었다.
‘……뭐지? 갑자기 왜 웃는 거지?’
그 모습을 김민정이 이상하게 바라봤지만, 여전히 강우에 대한 생각에 잠긴 유아라는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 웃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밤이 찾아왔다.
[나는 아말샨 족의 절대 강자 레비아탄이다!]
어김없이 레비아탄의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가 섬 전체를 진동하는 가운데, 해안가 한복판에 우뚝 선 도봉팔이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대한민국의 특급 전사이자 신 스틸러 드랙슬러다! 내 검을 받을 자, 누구냐!”
마력으로 증폭된 그의 목소리가 섬을 흔들고, 레비아탄의 목소리를 뒤덮었다.
[…….]
쏴아아아―
그 뒤로는 정적이었다.
해변을 오르는 바닷물 소리와 바람 소리만 가득한 가운데, 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도봉팔이 중얼거렸다.
“이딴 게 될 리 없지…….”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그의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한족의 전사라… 네놈들에게도 전사의 긍지를 가진 놈이 있었구나.”
꼭 전설 속 야만 전사와 같은 외양을 한 사내.
어느새 나타난 사내가 도봉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는 도끼를, 다른 한 손에는 작은 원형 방패를 들고 있었는데, 탄탄한 가슴근육을 훤히 드러낸 채 곰의 것으로 보이는 가죽을 걸치고 있었다.
그가 머리를 젖혀 헝클어진 백발을 넘긴 뒤 쏘아보았다.
이제껏 들은 호쾌한 목청과 다르게 그의 눈은 착 가라앉은 삼백안이었다.
꼭 죽음을 보는 듯한 기분.
스스스스슷!
이내 레비아탄의 몸에서 보랏빛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눈까지 보랏빛으로 물든 그가 말했다.
“어디, 너희 부족의 전사는 얼마나 빛나는 긍지를 가졌는지 확인해 볼까?”
팟!
레비아탄이 삽시간에 거리를 좁히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사나운 사내를 바라보며 도봉팔이 중얼거렸다.
“…이게 된다고?”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