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발광지옥 (2)
<발광 균열> 안은 그 무성한 소문과 달리 조용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 아래, 달빛에 군청색으로 빛나는 바위들이 땅을 이루고 있었다.
이미 채광이 끝난 입구는 ‘발광석’이 하나도 없지만, 달빛이 아주 밝아 주변을 보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가장 먼저 들어온 김민정이 주변을 살피는 가운데, 입구 앞에 선 도봉팔이 말했다.
“느껴지는 마력은 없다.”
유아라와 도봉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주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나 마력은 없었다.
하지만 유아라는 그 둘이 느끼지 못한 무언가를 느끼는 중이었다.
‘익숙한 기분…….’
어딘가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이곳을 은은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것이 이 고요한 분위기 탓인지, 영롱한 달빛 탓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 기운이 존재하는 것인지는 그녀도 알지 못했다.
다만, 도봉팔과 도봉순이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그저 기분 탓으로 치부했다.
자신보다 3차 각성을 먼저 이룬 그들이다.
더 예민하면 예민했지, 자신보다는 못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이, 너무 멀리 가지 마라! 우리 뒤에 있어!”
벌써 저만치 앞서간 김민정을 보며 도봉팔이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일행 중에서 유일한 2차 각성자였다.
행여라도 상급 마물이 등장한다면, 그녀는 몇 합조차 견디지 못할 터.
도봉팔이 노심초사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들리지 않는 듯 허둥지둥 자신의 동생을 찾는 중이었다.
“민석아!”
김민정이 애타게 제 동생의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건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그녀가 다시금 달려 나가려던 그때.
어느새 다가온 유아라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 손길에 돌아본 김민정의 얼굴이 눈물과 흥분으로 얼룩져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약한 모습.
이게 진짜 이 굳센 여자의 얼굴이구나.
유아라는 잠시 멈칫했으나, 곧 침착하게 그녀를 달랬다.
“민정 씨, 동생분은 우리가 반드시 찾아줄게요. 그러니 우리 뒤에 있어요.”
“…….”
그제야 김민정은 조금 진정이 된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한 건 변함없는 사실.
만약 기적적으로 그녀의 동생이 살아 있다고 한들, 이곳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비로소 김민정을 진정시킨 세 사람은 황급히 수색에 들어갔다.
“봉팔아, 넌 서쪽을 맡아! 나는 북쪽으로 갈게! 당신은 동쪽을 맡아요.”
봉팔이라는 말에 그의 얼굴이 씰룩였지만, 분위기상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유아라는 김민정을 데리고 언덕 쪽으로 뛰었다.
저 멀리 관리자들의 쉼터였을 것이라 추정되는 천막이 보였기 때문이다.
“민석아!”
“민석 씨!”
유아라와 김민정이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그곳으로 달려갔다.
여전히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 가운데, 도착한 천막은 그야말로 텅 비어 있었다.
천막은 모두 네 개.
조금 전까지 누군가 이용한 듯 몇몇 생필품이 보였으나, 사람의 온기는 없었다.
유아라는 이곳의 사람들이 꼭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이 사라졌어.’
이상한 일이었다.
만약 사람들이 마물의 공격이나 마력 감염으로 사망했다면, 그 시체나 흔적이 남아야 했다.
그러나 이곳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모두가 제 발로 이곳을 벗어난 게 분명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이윽고 수색을 마치고 돌아온 도봉순과 도봉팔도 난색을 보였다.
“아무도 없어. 시체도 없고, 전투의 흔적도 없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있던 인부가 못 해도 수천이었을 텐데… 모두 어디로 간 거지?
불길한 상황에 김민정의 얼굴에도 다시 초조함이 피어났다.
잠시 고민하던 유아라가 말했다.
“혹시 대피소 같은 게 있는 게 아닐까요?”
“대피소?”
“네. 이곳은 닫힌 균열이고,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안에도 아무도 없고요. 그렇다면 모두 어딘가에 모여 있을지도 몰라요.”
“모여 있다라…….”
지금으로선 그 결론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마침내 도봉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번 찾아보자. 대피소가 있다 한들 마력을 완벽히 차단하진 못할 거야. 정화 장치도 무한하진 않을 거고. 서둘러야 해.”
그들은 채굴장 뒤편에 있는 돌산에 주목했다.
이곳에 대피소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자리할 곳은 저 군청색 돌산밖에 없었다.
“가자.”
그들은 서둘러 돌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김민정을 제외한 모두는 한 가지 사실을 계속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균열>을 채굴장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보스를 살려 두어야 한다.
죽지 않을 만큼만 제압해서 그 숨통을 붙여 놔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 어디에도 보스의 흔적은 없었다.
즉, 어쩌면 이들은 보스를 그냥 내버려 둔 채 채굴장을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만약 보스를 토벌할 힘이 없는 북한 정부가 인부들의 목숨을 담보한 채 일을 진행했다면?
모두는 그런 불상사만은 없길 바랐다.
* * *
“이곳인 것 같군.”
도봉팔이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마침내 그들은 돌산에서 비밀스러운 동굴 입구 하나를 발견했다.
커다란 바위로 막힌 입구.
그 안에서 마력이 희미하게나마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그러나 도봉순은 신중했다.
“아직 몰라. 마물일지도 모르잖아.”
“마물이라면 우리가 여기까지 왔을 때 벌써 튀어나왔을 거야. 보스면 더더욱 그렇고.”
“신중한 놈인지도.”
도봉순은 조심스럽게 동굴을 막은 바위에 손을 얹었다.
마법은 걸려 있지 않은 게, 이걸로 마력을 막는 건 아닌 듯했다.
“비켜 봐.”
주위를 물린 도봉순은 서서히 그것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최대한 조용히 바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그녀의 마력을 견디지 못한 바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그그극―
도봉순의 마력은 조심스럽게 바위를 계속해서 갉아먹었고, 이내 깨진 바위가 앞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생각보다 소리가 커졌으나, 검으로 부쉈다면 폭발하는 소리가 났을 것이다.
도봉순은 이 정도 수준에서 만족하며 손을 거뒀다.
“들어가자. 봉팔이 네가 선두에 서고, 그다음이 유아라, 김민정, 내가 최후방에 선다.”
“자꾸 봉팔, 봉팔거리면 죽는다. 봉순아.”
“…그래. 선두에 좀 서 주겠니, 드랙슬러야?”
“알겠다, 아리아.”
“…….”
유아라는 둘의 쓸데없는 말다툼을 흘려들으며 자신의 단검을 고쳐 쥐었다.
동굴은 안은 온통 어둠뿐인데, 유아라는 아까부터 느끼던 기운이 점차 선명해져 가는 걸 느끼는 중이었다.
‘이걸 어디서 느꼈지?’
분명 익숙한 기분인데…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미노타우스>였던가?
아니면… <백귀 균열>이었던가?
언데드를 마주한 때와 흡사하면서도 미세하게 다른 기분이 들었다.
결국 참지 못한 유아라가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혹시 언데드 기운 같은 거 안 느껴져요?”
“언데드?”
“나는 못 느꼈다.”
하지만 도봉순과 도봉팔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기분 탓인가?’
하지만 그들의 대답에도 불길하고 기분 나쁜 기운은 점차 짙어져만 갔다.
도봉팔이 <라이트> 마법이 걸린 막대기를 든 가운데, 그들은 전방에서 희미한 빛을 발견했다.
“봉팔아, 불 꺼 봐.”
“…씨.”
도봉팔은 이를 갈았으나, 도봉순의 말대로 막대기를 품에 숨겼다.
빛이 보이는 건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그들은 곧 그것이 이곳의 특산물, ‘발광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발광석이구나.”
도봉순이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소문이 사실이었는지, 그것을 보는 순간부터 기분이 처지고 몸이 다소 나른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녀가 물었다.
“다들 괜찮아? 헛것 같은 거 안 보여?”
다행히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각성자라 그런지 헛것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발광석을 지나 다시 동굴을 걷기 시작했다.
밖에서 느낀 마력이 점차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모두 준비해.”
모두가 각자의 무기를 든 채 동굴을 걸었다.
그러자 곧 공터가 나왔다.
천장이 뻥 뚫려 밤하늘이 보이는 공터.
밤하늘의 별을 확인한 도봉팔이 허탈하게 웃었다.
“천장이 없잖아?”
“…….”
천장이 없다면, 이곳은 유아라가 말한 ‘대피소’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마력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이 느끼고 들어온 마력이 이 공터에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도봉팔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 전체에 걸쳐 마력이 남아 있다.”
일행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공터를 1/3쯤 둥글게 가린 동굴 천장과 듬성듬성 벽에 박혀 있는 발광석들.
그게 이곳의 전부였다.
마력이 느껴질 만한 건 발광석이 유일한데, 그게 이 기운의 원인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드디어 왔구나!]
쿠구구구구!
“뭐, 뭐야?!”
갑작스러운 남자의 음성과 함께 동굴이 전율했다.
무기를 빼 든 도봉팔과 도봉순이 등을 맞댄 가운데, 유아라와 김민정도 각자 검을 든 채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음성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도봉순이 외쳤다.
“어디냐!”
[네놈들은 스스로 지옥에 들어왔다! 너흰 모든 만행의 죗값을 지르게 될 것이다!]
“이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냐?”
“난들 알아?!”
여전히 적을 찾지 못한 두 도씨 남녀가 마력을 끌어 올리는 사이, 유아라는 눈앞의 땅이 꿈틀대는 것을 포착했다.
“저길 봐요!”
“……?!”
드드득!
그녀가 가리킨 곳에서 해골이 땅을 뚫고 올라오고 있었다.
뼈로 만들어진 검을 든 <스켈레톤>.
언데드 마물 중에서도 유독 더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는 바로 그 마물이었다.
어느새 곳곳에서 일어선 수십의 <스켈레톤>이 각자의 무기를 겨눈 채 텅 빈 눈으로 일행을 보고 있었다.
“재수 옴 붙었네.”
마력으로 전신을 뒤덮은 도봉순이 주변을 훑으며 검을 치켜들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천장으로 뛸 수 있겠어?”
그녀가 물은 건 김민정이었다.
4미터쯤 돼 보이는 천장을 보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높지만, 할 순 있을 것 같아요.”
“확실히 해. 한 번에 못 뛰면 넌 죽으니까.”
할 말을 마친 도봉순은 대뜸 앞으로 튀어나가 <스켈레톤> 하나를 베었다.
김민정이 탈출할 때까지 시간을 벌 요량이었다.
“나가!”
콰과과과!
도봉순의 신호에 전방으로 마력을 퍼부은 도봉팔이 김민정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날 밟고 뛰어라!”
김민정은 서둘러 그의 어깨를 밟고 섰다.
[크크크! 네놈들이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 성싶으냐?]
남자의 목소리는 어쩐지 광기가 서려 있었다.
검은 쐐기로 <스켈레톤>들을 쓰러뜨린 유아라가 주위를 불길하게 바라보는 사이, 어느새 구멍이 난 천장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것을 본 도봉팔이 황급히 김민정을 내려놓으며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시팔, 저건 또 뭐야?!”
유아라가 황급히 고개를 들자, 그건 공룡의 두개골이었다.
천장 위로 머리를 들이민 <스컬 드래곤>이 누런 뼈를 자랑하며 포효했다.
카아아아악!
그 포효에 동굴 전체가 몸을 떨고, 몇몇 <스켈레톤>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츠츠츠츳!
갑자기 유아라의 몸에서 검은 스파크가 일더니, 그녀의 단검에서 수십 개의 검은 쐐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아니……?!]
당황한 남자의 목소리가 공동을 울리고, 유아라가 쏜 수십 개의 쐐기가 <스컬 드래곤>의 머리를 때렸다.
크아아아악!
콰과과과광!
“지금이에요!”
검은 기운에 당한 <스컬 드래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천장에서 떨어져 나간 사이, 김민정이 서둘러 도봉팔의 허벅지와 어깨를 밟고 하늘로 뛰었다.
그리고 유아라와 도봉순, 도봉팔이 그 뒤를 이었다.
그들은 가까운 거리에서 몸부림치는 <스컬 드래곤>을 피해 돌산 아래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딜!]
그 뒤를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계속 쫓아왔다.
[이 섬에 들어온 이상 너흰 독 안에 든 쥐다!]
여전히 상대는 보이는 않는 채였다.
“설마 여기 사람들 모두가 다 해골이 돼 버린 거냐?! 아니면 이게 빌어먹을 돌멩이의 환상이야?!”
[야! 생각 좀 하고 떠들어! 넌 동생이 해골이 됐다면 좋겠냐?!]
도봉팔이 소리를 지르자, 도봉순이 <전음>으로 욕을 날리며 그를 노려봤다.
어느새 김민정이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이건 환상이 아니야!’
그 곁에서 달리며 유아라는 생각했다.
‘이건 저 남자의 힘이야!’
비로소 이 익숙한 기운의 정체가 떠오른 유아라였다.
<소생의 단검>.
한때 자신이 <미노타우르스>를 살리기 위해 사용한 물건.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건 그 기운 자체였다.
언데드를 만드는 존재.
그는 소문으로만 듣던 <네크로맨서>였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