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발광지옥 (1)
한편, 히데타를 처참하게 박살 낸 강우는 다시 ‘균열 찢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히데타가 깨어나던 날.
강우는 여전히 <텔레포트>의 규칙성은 찾지 못했으나, 대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스르륵.
<균열>에 들어선 강우가 정신을 집중하자, 서서히 몸속에서 마력이 반딧불처럼 끌려 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마력이 아닌, 붉은빛 마력이었다.
이윽고 붉은 마력의 점들이 모여 하나의 외양을 갖춰 가기 시작했다.
마력이 한 땀, 한 땀 빚어낸 것은 다름 아닌 붉은 연꽃.
강우는 여전히 봉오리를 피우지 못한 연꽃을 바라보며 한 여인을 떠올렸다.
‘홍련.’
홍련과 연인 관계였던 <데스 나이트>는 현 시간선의 존재가 아닌, 이미 멸망한 시간선의 존재였다.
그렇다면 홍련도 그와 같은 시간선에서 왔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홍련이 있던 곳은 사이트 스톤의 세상이 아니었지.’
<사이트 스톤>의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데스 나이트>와 달리 홍련은 <미궁> 속에 있었다.
그녀는 대체 무슨 수로 그곳에 남아 있었을까.
강우는 그녀가 준 이 연꽃에서 그 정답을 구했다.
― 살아라. 살아서 그것을 꽃피워 보거라.
당시에는 영문 모를 말이었으나, 그건 그녀의 유언(遺言)이었다.
죽기 전 남긴 마지막 말.
그녀는 자신에게 이 연꽃을 건네준 것을 끝으로 세상에서 영영 소멸한 것이다.
즉, 이 붉은 연꽃이 그녀를 이곳에 남게 만든 물건일 확률이 높았다.
죽은 존재마저 시간선을 넘게 만들어 주는 물건.
그러고 보면 <데스 나이트>는 그녀가 이 연꽃을 전서구로 종종 사용했다고 했다.
‘이 연꽃을 이용하면 시간선을 넘을 수 있는 건가?’
만약 자신의 추측이 맞는다면, 홍련이 말한 ‘꽃피워 보라’던 그 말도 이해가 갔다.
그녀는 이 힘을 이용해 석탈해에 맞서 달라 이야기한 것이다.
석탈해에게 죽임을 당한 그녀이니, 그 복수에 동참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이것을 피울 수 없다.’
꽃봉오리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과 그것을 꽃피우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4차 각성자가 된 지금에도 강우는 연꽃을 피워 내지 못했다.
아니, 도무지 어떡해야 그것을 피울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방법을 알아야 시도라도 해 볼 것 아닌가.
그러나 아무리 마력을 쏟아붓고 물리적인 힘을 가해도 단단히 여문 꽃봉오리는 도통 벌어지지 않았다.
대체 이 안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는 걸까.
무엇을 숨겨 두었기에 이리도 꽁꽁 잠겨 있는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결국 5차 각성만이 답인가.’
현재로선 자신이 약해 그것을 열지 못한다고밖에는 생각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간의 각성과 5차 각성은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어찌어찌 빠르게 4차 각성을 달성했지만, 여기까지는 이미 과거에 경험해 본 경지였다.
그러나 5차 각성은 달랐다.
5차 각성은 과거에도 경험하지 못한, 생소한 경지.
과연 석탈해가 말한, ‘새로운 우주’를 품는 경지라는 게 무엇인지 강우는 알지 못했다.
다만, 시간선을 넘나드는 힘을 뜻한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할 뿐이었다.
시간의 경계를 허무는 능력.
만약 그 능력을 지닌 존재를 신이라 부를 수 있다면, 5차 각성은 인간과 신의 경지를 나누는 경계선이었다.
‘하지만 마냥 5차 각성 달성만 바라보기엔 시간이 없다.’
첫 다짐과 달리 지금은 느긋하게 수련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세계가 과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탈해가 더 걷잡을 수 없는 일을 벌이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우선은 지금 이 시각에도 <데스 나이트>가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탑부터 등정하는 게 가장 먼저였다.
‘5차 각성을 이루지 못해도, 연꽃을 이용하는 방법이란…….’
집중이 흐트러진 탓인지, 붉은 연꽃이 점차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중이었다.
강우는 흩어지는 붉은 가루들을 보며 다시 고민에 잠겼다.
모름지기 전서구란, 어디서나 보내고, 어디서나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홍련은 나를 만나기 전까진 이것을 보내지 못했다. 그곳이 균열 내부였기 때문인가.’
곧 전서구는 <균열>에서 <균열> 밖으로 보낼 수 없다는 가설이 세워졌다.
그렇다면 같은 <균열>끼리는?
같은 <균열>끼리라면 전서구를 보낼 수 있을까?
그 순간, 강우는 문득 <데스 나이트>가 들려준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 균열은 멸망한 다른 시간선의 산물이다. 그 중에서도 균열에 이용된 건 마계라 불리던 마물들의 땅이지.
그는 놈들도 얼떨결에 고향을 잃고 이 머나먼 행성에 떨어지게 된 것이는 말도 덧붙였다.
놈들은 모두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이다.
‘균열은 본래 마계라 불리는 하나의 세계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머릿속이 아직 조합되지 않은 정보들로 범람했다.
강우는 눈을 감은 채 계속 생각했다.
‘균열이 마계이고, 하나의 땅이었다면, 균열끼리는 전서구를 보내는 것도 가능했을 거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는 <사이트 스톤> 속에 있으니, 홍련의 전서구를 받을 수 없었겠지.
그래서 그녀는 자신에게 그것을 대신 전달한 것이다.
아마도 다른 <균열>을 클리어할 때 연꽃을 전할 수도 있었겠지만, <균열>을 통제하는 석탈해와 사도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그것을 쉽게 보낼 순 없었을 터.
‘이제 알겠군.’
강우는 그제야 홍련이 굳이 <미궁>을 통해 연꽃을 전한 이유를 깨달았다.
또한 <균열> 이동의 비밀도 깨달았다.
‘나는 균열을 찢고 나가는 것에 몰두했지만, 그건 애당초 방법이 잘못됐다.’
<균열>을 찢고 나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중요한 건 같은 <균열>과 <균열> 사이를 이동하는 것.
전서구의 비밀은 거기에 있었다.
‘홍련의 연꽃을 이용하면 균열 사이를 오갈 수 있다.’
그것이 강우의 결론이었다.
강우는 이미 사라진 연꽃을 다시금 불러들였다.
‘전서구를 타고 이동한다.’
강우는 생성된 연꽃에 손을 얹었다.
이제 남은 건 전서구를 보내는 방법이지만, 그건 간단했다.
<전음>을 상대에게 보내는 방법은 그저 그를 바라보고 떠올리는 것뿐이었다.
강우는 며칠째 행방이 묘연한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녀의 일만 해결되면 당분간 한국에 머물 일은 없었다.
눈을 감은 강우는 곧 머릿속에 그녀의 얼굴을 그렸다.
* * *
얼마 전, 북한에서 발견된 새로운 <균열>.
그곳엔 일명 ‘발광석’이라 불리는 광석이 가득했다.
이름 그대로 스스로 빛을 발하는 광물인데, 그 빛을 본 사람들은 온몸이 기운이 쭉― 빠지고 헛것을 본다고 했다.
그래서 북한 지도부는 그 광물을 캐 무기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만약 마물에게도 그 효과가 적용된다면, 앞으로의 <균열> 레이드에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발광 균열>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으로 수천 명의 인부가 투입되었다.
하지만 말이 인부이지, 그들은 노예나 다름없었다.
24시간 중 무려 15시간을 곡괭이질만 하는 곳.
그들은 한 번 작업복을 입으면 식사 시간까지는 화장실도 갈 수 없고, 물조차 마실 수 없었다.
인부들은 모두 기저귀를 차고 일했으며, 불과 하루 이틀 만에 탈진하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그렇다고 작업복을 벗을 수도 없었다.
대개 비각성자들인 그들은 마력을 막아 주는 작업복을 벗는 순간, 저세상행이기 때문이었다.
관리자들도 그들의 상태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인부와 달리 각성자인 관리자들은 <균열> 이곳저곳을 다니며 인부들을 다그치기 바빴다.
본래 인부들은 정치범이라는 명목하에 수용소에 갇혀야 할 사람들.
그들 역시 비인간적인 행위가 만연한 수용소에서 지내느니, 쥐꼬리만 한 보수와 식사라도 꼬박꼬박 제대로 받고 이곳에서 일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기에 군말 없이 지시를 따랐다.
김민정의 남동생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탈북 과정에서 총을 맞고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를 모셔야 했고, 인부 사이에선 ‘발광지옥’이라 불리는 이 <균열>에 자원했다.
그 소식을 접수한 김민정과 유아라, 두 검계 단원은 소문을 쫓고 쫓아 나흘 만에 그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골치 아프게 됐군.”
눈앞의 펼쳐진 광경을 보며 드렉슬러, 도봉팔이 혀를 차자, 곁에 있던 아리아, 도봉순이 대꾸했다.
“그러게. 시작부터 재수가 쫑이네.”
본래 채광이 진행 중인 <균열>은 경계가 삼엄하기 마련이다.
인부가 달아날 수도 있고, 누군가가 그곳에서 채광한 광물을 훔쳐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광 균열> 앞은 깨끗했다.
고작 두 명의 ‘균열지기(균열 앞을 지키는 사람)’가 전부였다.
김민정이 굳은 얼굴로 그곳을 보는 사이, 슬쩍 그녀의 눈치를 살핀 유아라가 말했다.
“소문이 사실이었나 봐요.”
“…….”
몇 시간 전.
그들은 며칠 전에 <발광 균열>이 <닫힌 균열>로 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마 그런 우연이 있을까 했는데… 정말이었다.
보통 <닫힌 균열>이 발생하면 대대적인 토벌이 진행돼야 하겠지만, 불행하게도 <발광 균열>은 이미 채광이 이루어지던 <균열>.
아마도 그곳의 마물은 대부분 토벌됐을 테고, 간신히 숨만 붙은 보스만이 살아남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그곳이 <닫힌 균열>이 돼 버렸으니, 북한으로서는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그곳을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토벌할 이유가 없었다.
현재 북한은 단 하나의 각성자도 아쉬운 상황이니까.
보스가 회복해서 다시 나오거나, 일찍이 <균열>에 들어간 누군가가 다시 돌아오거나, 중국에서 토벌대를 지원해 주지 않는 이상 내버려 둘 가능성이 컸다.
도봉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들어갈 거야?”
“으음.”
이번 원정대의 대장은 역시나 도봉순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김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번 의뢰는 포기하는 게 좋겠어. 위험부담이 너무 커.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임무 수행 중에 북한이나 중국 쪽 각성자가 들어올 수도 있고. 또 닫힌 균열이 됐지만, 재수 없으면 이미 보스가 죽었을 수도 있어.”
보스가 죽었어도 <닫힌 균열>이 된 사례가 여럿 있었다.
대개 보스가 죽기 직전 <닫힌 균열>이 된 경우인데, 그러면 들어가자마자 <균열>이 소멸할 수도 있었다.
이미 중국과 스위스가 그런 식으로 소중한 원정대와 길드를 잃은 아픔이 있었다.
“그리고 균열이 닫힌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면…….”
도봉순은 차마 그녀의 동생이 죽었을 거라는 말까진 하지 못했다.
인부들의 마력 노출을 막아 주는 방호복은 철저한 감수를 통해 만들어지고 사용된다.
보통 방호복은 세 번 사용하면 폐기가 원칙.
하지만 상황이 열악한 북한은 달랐다.
그들은 사용한 작업복을 계속 돌려 썼고, 심지어 백 번 가까이 반복해서 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 방호복이 방마(防魔) 기능을 잃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서서히 마력에 노출된 북한의 인부들은 작업이 끝난 뒤 며칠이 지나 사망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식량이나 물도 없는 <균열>에서 비각성자가 며칠을 보낸다?
가뜩이나 <발광 균열>은 발광석으로 인해 신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곳.
김민정의 동생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전 들어갈 거예요. 돌아가시려거든 돌아가셔도 좋아요.”
김민정은 혼자서라도 그곳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간 가족들을 두고 혼자 탈출했다는 죄책감에 계속 시달린 자신이었다.
이번에도 그걸 반복할 순 없다.
그녀는 일행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슬금슬금 <발광 균열>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도봉순이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큰일이네, 정말.”
김민정을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자신은 이번 의뢰의 대장이었다.
의뢰만큼 단원들의 안위도 중요했다.
결국 결심을 굳힌 그녀가 말했다.
“하는 수 없지. 나 혼자 다녀올게. 쟤 동생 사진 줘 봐.”
다 같이 갈 수 없다면 그나마 암살자 타입인 자신이 이 일에 제격일 듯싶었다.
김민정은 아무리 봐도 암살자 타입은 아니었다.
그녀는 황한수가 준 저격총을 등에 메고 있는데,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총을 메고 있는 것부터가 위태위태해 보였다.
하지만 도봉팔은 사진을 건네주지 않았고, 유아라도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각자의 무기를 점검할 뿐이었다.
“뭐 해?”
도봉순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유아라와 도봉팔이 답했다.
“저는 어차피 들어갈 생각이었거든요.”
“나도 물론이다.”
“…저거, 닫힌 균열인 거 안 보여? 다 같이 죽고 싶냐? 적어도 한 명은 남아서 검계에 소식을 알려야 할 것 아니야.”
그러자 유아라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여기 죽고 싶어서 온 사람이 어딨어요? 다 살리려고 온 거지.”
그러고는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도봉팔도 마찬가지였다.
“유아라라고 했나? 쟤도 퍽 마음에 드는군. 나도 간다. 보고하려면 네가 해라, 봉순아.”
대장인 자신의 말을 태연하게 무시하고 ‘발광지옥’으로 걸어가는 그들을 보며 도봉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들 죽고 싶어 환장했나 봐. 안 그래? 아, 나 혼자 있구나.”
후.
곧 크게 한숨을 내쉰 도봉순도 그 뒤를 따랐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