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히데타 (4)
다행히 히데타를 쓰러뜨린 강우가 류헤이의 사형을 강제한다든가 하는 불상사는 없었다.
그는 기절한 히데타를 내버려 둔 채 미련 없이 <균열>을 나섰다.
불과 며칠 새 아시아의 패자 후보로 거론되던 삼인 중 둘을 쓰러뜨린 그이지만, 정작 본인은 그러한 사실에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는 듯했다.
오만석과 로드리게가 다급히 뒤를 따르는 가운데, <균열>을 나서기 직전 멈칫한 강우가 서유리에게 <전음>을 보냈다.
[연합은 히데타와 류헤이에게 맡겨라. 히데타는 은혜를 모르는 인간은 아닌 듯하니 알아서 물러나 줄 것이다. 또한 이번 일이 민망해서라도 알아서 수습에 나서겠지.]
“…….”
서유리는 강우가 <균열>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언제 또 히데타의 성향까지 파악했단 말인가.
정말 그의 말대로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서유리는 그의 말대로 될 것 같은 강한 예감을 느꼈다.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도 전부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야.’
서유리에게 강우는 도통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세상일에 무심한 듯 보이다가도 돌연 나타나 이승우를 제압하고, 한국의 정세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다가도 알아서 뒤처리 방안까지 마련해 두고 떠나니… 이거야 원.
‘다시 볼 수 있을까?’
한편으로 그녀는 어쩐지 강우를 다시 만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나섰다는 건, 일을 서둘러 마무리 지으려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다른 바쁜 일이 있는 걸까?’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이미 강우는 떠나 버렸으므로.
* * *
히데타가 깨어난 건 대결이 있고 나서 정확히 52시간 22분 뒤였다.
이틀을 내리 기절해 있던 그는 정신을 차린 뒤에 크게 탄식했다고 한다.
히데타는 만석을 통해 강우와의 만남을 원했으나, 그들도 강우의 연락처나 주소를 알지 못했고, 결국 히데테는 그를 만나길 포기했다.
물론, 사람을 풀어 그를 찾아보는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모습을 감춘 그를 찾아 나선다는 게 실례처럼 느껴졌다.
“…돌아간다.”
이틀이나 기절해 있던 탓에 밀린 일이 많았다.
이승우가 사라진 아시아.
그로서는 한국 말고도 처리할 일이 산더미였다.
하지만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면서도 한국의 일을 잊지 않았다.
강우의 말대로 히데타는 연합의 일을 알아서 중재했다.
류헤이의 잘못을 몸소 사과하는 것은 물론, 한국 법정이 그에게 내리는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입장문을 발표한 것이다.
다만, 한국을 돕기 위해 나선 만큼 부디 작은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직속상관인 히데타가 스스로 물러난 이상, 연합도 더는 류헤이를 두둔하기가 어려워졌다.
덕분에 영문 모를 연합 또한 자연스럽게 한국의 일에서 한 걸음 물러나게 되었다.
‘대단해.’
여느 때처럼 양복점에서 시간을 보내던 황한수도 오늘 아침 히데타가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뉴스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그는 아까부터 신문 기사만 살피고 있는 할아버지를 슬쩍 쳐다봤다.
연합과 오동 길드를 상대로 수십 가지 예상 시나리오를 짜 놓은 검계이나, 강우의 활약으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버렸다.
심수련과 검계의 전력으로 이승우를 잡으려던 계획도.
연합과 히데타로부터 한국을 지켜내려던 계획도.
단 한 사람의 힘으로 더할 나위 깔끔하게 해결됐다.
다행히 오만석도 멍청한 인물이 아니어서, 검계가 떠 먹여 주는 꿀을 꿀꺽꿀꺽 잘 받아먹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만석이 검계의 진짜 대리 길드가 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듯했다.
그때였다.
‘엇!’
시선을 마주친 황한수가 움찔하는 사이, 고개를 돌린 황 노인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갑작스러운 물음에 손자가 우물쭈물하자, 그가 인자하게 웃었다.
“속 시원하게 말해 보려무나.”
비록 황 노인이 무뚝뚝해 보여도 그가 손자인 황한수를 끔찍이 아낀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진실이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의 유일한 혈육.
황한수의 어미는 사랑스러운 손자를 낳다 죽었고, 황한수의 아버지이자 황 노인의 아들은 <균열>이 발생하기 전 교통사고로 죽었다.
한밤중 일어난 음주운전 사고였다.
그 이후로 황 노인은 술을 입에 잘 대지 않았다.
이윽고 머뭇대던 황한수가 답했다.
“그냥 대단해서요. 겨우 한 사람이잖아요. 불과 한 사람이 한 나를 이렇게 좌지우지할 수 있나 싶어요.”
“본래 세계란 그런 곳이지. 사람 하나가 세상을 살리고 죽이는 법이다. 그간 역사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이지.”
“그래도요. 보통은 명성을 날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보조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승우도 한명회와 한세라가 있었고요. 비록 기록되는 건 영웅 한 사람이지만… 강우 씨는 그렇지 않아요. 그 뒤에 우리가 있다고 말하기도 머쓱할 만큼요. 그래서…….”
황한수가 말끝을 흐리자, 그 뜻을 헤아린 황 노인이 작은 미소를 띠었다.
“두려운 것이로구나.”
잠시 뜸을 들이던 황한수는 이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강우가 준 <이무기의 비늘>을 통해 2차 각성을 이룬 그였다.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막상 그렇게 되고 나니 마냥 기쁘지만도 않았다.
아무리 기를 써도 오르지 못하던 산을 고작 강우가 건네준 물건 하나로 등정하게 되었다.
과연 그것이 정상적일까?
만약 그가 자신 외에도 수많은 각성자를 양산할 수 있다면?
남들이 수년 걸려서 이루는 각성을, 그는 단번에 이루게 만들 수 있다면?
지금 이 시간에도 각성을 위해 애쓰는 무수한 사람들의 노력이 다 무슨 소용일까.
황한수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모르겠어요. 아니, 인정할게요. 조금 두려워요. 한 사람의 힘이 그렇게 강해도 되는 건지 의아하기도 하고요. 대체 이 세계는…….”
“흘흘, 그런 기분은 당연한 것이다.”
황한수가 웃음을 흘리는 할아버지를 의아하게 바라보자, 황 노인이 손자를 귀엽게 보며 말했다.
“나 또한 그가 두렵다.”
“할아버지도요?”
황한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옥 불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은 할아버지가 두려움을 느끼다니.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 비록 지금은 같은 편에 서 있지만, 그는 언제고 돌아설 수 있지. 이 할아비가 생각하기에 그의 선택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말 큰 문제가 아닌가요?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강우 씨가 나쁜 마음을 품는다면, 그걸 막을 사람이 없잖아요. 이승우만 하더라도 엄청났는데, 한강우 씨라면…….”
아마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수준급 각성자가 전부 달려들어야 할 터였다.
아니, 어쩌면 그마저도 부족할지 모르지.
황한수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며 황 노인이 다시금 웃었다.
오늘따라 손자가 더 귀여워 보이는 그였다.
“전 세계가 큰 희생을 감수해야겠지. 하지만 한수야, 할아버지가 보기에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구나.”
“왜요?”
“그는 이 땅에 관심이 없다.”
“이 땅에요?”
아직 황한수는 강우가 미래에서 왔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검계에서 그 사실을 아는 건 황 노인과 청익뿐.
곧 왕린에게도 알리겠지만, 그는 아직이었다.
“그래. 그의 뜻은 다른 곳에 있어. 그는 누군가를 죽이고자 검계를 찾았지만, 동시에 그건 또 다른 무수한 인명을 구하고자 하는 일이지.”
황한수가 영문 모를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황 노인은 이번에도 그저 웃었다.
“곧 다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한수, 너는 다른 생각이랑 말고, 수련에 더 매진하거라. 본래 강해질수록 고민만 더 깊어지는 법. 네가 한강우의 뒷일을 고민하는 걸 보니, 요즈음 제법 성장한 모양이구나. 흘흘.”
“아니, 그게…….”
할아버지의 칭찬에 황한수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할아비는 잠시 산책을 다녀오마. 너무 오래 앉아 있었어.”
황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로 공원을 좀 걷다 올 생각이었다.
황한수에게 말은 그렇게 했어도, 머리가 복잡하기는 그도 마찬가지.
그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걷는 때가 많았다.
[따르겠습니다.]
몸을 숨긴 채 대기하던 청익이 대동할 것을 청했으나, 황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다. 나 혼자 있고 싶다.]
[…알겠습니다.]
비록 황 노인이 나이는 들었어도 3차 각성자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아무리 마법계 각성자라고 한들, 도시 한복판에서 제 몸을 스스로 보호할 수준은 됐다.
그렇게 황 노인은 홀로 양복점을 나서 공원으로 향했다.
현재 시각은 오전 11시.
평일 낮의 공원은 한적했다.
“…….”
날이 6월로 접어들면서 해가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생각에 잠겨 공원을 설렁설렁 걷던 황 노인은 결국 한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이카루스와 오동 길드 쪽 일이 정리된 이상, 검계의 수장인 그는 다음 항로를 정해야만 했다.
‘곧 연합도 히데타의 진실을 알게 되겠지. 그렇다면 다음은 연합이 되겠구나.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지는군.’
아직 사라진 석탈해의 행방은 찾지 못했다.
놈이 무슨 꿍꿍인지는 몰라도, 이번엔 전처럼 쉽사리 당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왕린을 통해 정신계 마법에 내성을 지닌 각성자를 잔뜩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왕린 개인의 성장도 상당수 진행된 상태였다.
또한 지금의 검계는 그때와 차원이 다른 수준.
불과 몇 년 만에 검계는 엄청난 초고속 성장을 이루었다.
‘미래에서 온 마물과의 싸움이라…….’
여전히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황 노인은 석탈해와의 싸움을 담담히 준비했다.
강우가 보여 준 실력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석탈해의 능력 또한 어느 정도 가늠이 갔기 때문이다.
그 강한 강우가 놈을 즉시 처리하지 않고 뜸을 들인 것만 봐도 그랬다.
석탈해 또한 강우에 필적하는,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괴물일 확률이 높았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
자신과 검계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강우를 돕는 것뿐이었다.
‘내가 죽기 전엔 끝났으면 좋겠구나.’
다만, 황 노인은 자신의 대에서 그 싸움이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자신의 다음 세대까지 그 짐을 건네주고 싶지 않았다.
‘흘흘.’
이윽고 앞으로의 계획을 모두 머릿속에 그린 황 노인이 벤치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점심 시간이었다.
오늘은 손자가 좋아하는 짜장면을 같이 먹어 볼까 고민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할아버지, 말씀 좀 묻겠습니다.”
검은 벙거지를 깊게 눌러쓴 남자였다.
어딘가 행색이 낡아 보이는 그는 덥지도 않은지 검은 면바지 위로 꾀죄죄한 카키색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다.
드러난 턱 위로 수북하게 자라난 수염이 보였다.
누군가가 그를 보았다면, 영락없는 노숙자로 생각할 모습이었다.
“무슨 일인가?”
남자에게선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낮고 침울한 음성으로 물었다.
“종로 골목에 오래된 양복점이 있다고 하는데… 거기가 어딘지 찾고 있습니다.”
“…오래된 양복점?”
공원에서 만난 남자가 대뜸 양복점을 찾다니.
여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짐짓 수상함을 느낀 황 노인이 다시 물었다.
“나이도 젊어 보이는데, 오래된 양복점은 왜 찾는가?”
“…찾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어쩐지 그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황 노인이 그 얼굴을 정확히 보기 위해 고개를 틀자, 사내가 다급히 얼굴을 숙였다.
나이는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
얼핏 본 얼굴은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자신에게 오래된 양복점을 물었다는 건 아마도 제 정체를 알고 접근했을 확률이 높았다.
현 상황을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기에 노인은 의심이 많았다.
잠시 고민하던 황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곳이 있군. 따라오게.”
“…감사합니다.”
황 노인은 천천히 양복점을 향해 걸었고, 청년도 아무 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석탈해는 아닌 듯한데…….’
상대가 미심쩍어 <심안>을 사용해 봤지만, 황 노인은 그에게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만약 정말로 이자가 석탈해가 아니라면, 놈과 강우에 이어 <심안>으로 읽을 수 없는 세 번째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접근했다는 건, 당장 자신들을 해칠 생각은 없다는 뜻.
황 노인은 일단 이 청년을 사로잡은 후에 그 까닭을 물어볼 생각이었다.
낡은 골목에 들어선 노인은 청익에게 <전음>을 보냈다.
[청익, 이자를 잡아라.]
[알겠습니다.]
역시나 청익은 자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양복점을 나선 순간부터 골목 앞에서 전전긍긍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겠지.
팟!
그런데 청익이 막 모습을 드러낸 그때였다.
“…응?”
당황한 청익이 어쩔 줄 몰라 하며 황 노인을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 노인의 뒤를 쫓던 남자가 어느새 사라진 것이다.
<은신>을 사용했다면 그 과정이라도 보여야 맞는 일이건만, 사내는 세상에서 삭제된 듯 눈 깜짝할 새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기감을 넓혀도 청익은 사내를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놓쳤습니다.”
“허허…….”
결국 황 노인도 텅 빈 자신의 뒤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기이한 사내와 노인의 첫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