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헌터-122화 (123/186)

[122화] 히데타 (2)

로드리게가 찾은 <균열>은 스톰의 본 건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접견실에 있던 모두가 각자 자신의 길드 차량을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

다만, 강우는 자신의 차가 아닌, 스톰 쪽 차를 타고 있었다.

차에 오르기 직전, 서유리가 함께 가 줄 것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운전수는 스톰의 부길드장 장민철이었다.

그는 아까부터 백미러를 통해 강우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는데, 차마 말을 걸진 못하겠는지 연신 금붕어처럼 입술만 달싹이는 중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강우가 생각에 잠긴 채 창밖을 바라보는 사이, 줄곧 망설이던 서유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겠어요?”

“뭐가 말이지?”

잠시 고민하는 빛을 보이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당신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에요. 이미 저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으니까……. 하지만 히데타는 오동 길드의 상징이자, 일본의 자부심이에요. 그런 그를 쓰러뜨리면 일본에서 반한 감정이 엄청날 거예요.”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반한 감정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져 주기라도 하란 뜻인가?”

그러자 서유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히데타가 아무리 아니꼬워도 중국을 견제하려면 일본의 힘이 꼭 필요하다는 걸 말하는 거예요. 류헤이는 당연히 처벌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저들과 완전히 갈라서선 안 된다는 거죠.”

그제야 그 뜻을 깨달은 강우가 말했다.

“적당히 맞춰 줘라, 이거군.”

“맞아요. 이기더라도 어느 정도 팽팽한 대결을 유지하다가 쓰러뜨리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요.”

일본 최강자를 상대로 팽팽한 척 연기를 하라니.

서유리는 말을 뱉으면서도 스스로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우는 실제로 그럴 수 있는 실력자였다.

일본 최강자인 히데타를 적당히 상대하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존재.

다행히 강우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지.”

“고마워요.”

확답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도 서유리는 한시름 덜었다.

아직 만석이 5대 길드에 자리 잡는 중이기에, 유지태가 없는 현 체제에서의 실질적인 리더는 그녀였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묵묵히 한국을 위한 일을 해내고 있었다.

끼익.

이윽고 달리던 차가 예정된 <균열> 앞에 멈춰 섰다.

강우가 언뜻 살펴보니, <균열> 일대는 스톰 길드원들로 인해 접근이 통제된 듯했다.

눈에 보이는 스톰 길드원도 열 명을 채 넘기지 않았다.

강우가 차에서 내리자, 한 수하에게서 보고를 받은 장민철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전했다.

“평범한 2레벨 균열입니다. 안은 이미 정리된 상태이고, 보스는 숨만 붙여 놨습니다.”

그러는 사이, 서유리의 차를 따라온 히데타의 세단도 곧 <균열>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한국으로 데리고 온 길드원 모두를 대동한 채였는데, 아무래도 ‘만약의 상황’에 대비한 듯했다.

차에서 내린 히데타가 무심한 눈으로 <균열>을 보며 물었다.

“여기인가?”

강우는 <균열>을 향해 걸어가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그 뜻을 깨달은 히데타가 자신의 회색 머리를 쓸어 넘기며 빙그레 웃었다.

“시원해서 좋군.”

곧 강우와 히데타를 선두로 각성자들이 <균열>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삭막한 황야가 펼쳐진 평범한 <균열>이었다.

주변에 별다른 장애물이 없는 게, 대결을 펼치기에 딱 안성맞춤인 장소.

서둘러 부하들을 이끌고 온 오동의 부길드장 이토가 말했다.

“지금부터의 상황은 모두 촬영된다. 그러니 허튼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아. 균열 안과 밖 모두 우리 쪽 사람을 두겠다.”

서유리와 다른 각성자들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만약 강우가 히데타에게 패배한다면, 오동 길드는 은근슬쩍 그것을 언론에 노출할 속셈일 터였다.

누군가는 비겁하다 여기겠지만, 원래 세상은 그런 법이다.

이승우를 제압한 강우를 히데타가 꺾는 모습이 세상에 보인다면, 그 위상을 높이는 건 물론,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전력 차이를 좀 더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다.

앞으로 한국과의 외교에도 큰 도움이 될 일.

그런 좋은 기회를 그들이 놓칠 리 없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일본 측에게 좋은 일인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이곳에 들어선 모든 한국 각성자들은 그 비디오가 누구에게 유리한 자료가 될 것인지 잘 알았으니까.

그걸 모르는 건 오직 오동 길드원들뿐.

“자자.”

심판으로는 같은 4차 각성자인 김인표가 나섰다.

강우와 히데타 사이를 막아선 그가 말했다.

“이쪽에서도 촬영하고 있으니 괜한 염려는 안 해도 돼. 그럼 대결 전에 서로가 이 대결에 건 게 무엇인지 확실히 말하도록 하지.”

그러자 서유리에게서 그 말을 전해 들은 히데타가 허리춤에서 자신의 장검을 풀며 이야기했다.

“내 조건은 류헤이의 즉각 해방이다. 또한 그가 한국에 잡혀 있으면서 당한 부당한 대우와 정신적 스트레스, 그리고 갇혀 있음으로써 낭비한 시간에 대한 보상을 원한다. 거기에는 한국 정부와 5대 길드 모두의 정중한 사죄 역시 있어야겠지. 죽은 류헤이 부하들의 장례비와 보상금은 당연한 일이고.”

할 말을 마친 히데타가 강우에게도 말해 보라는 듯 슬며시 턱짓했다.

“…….”

잠시 그런 히데타를 담담하게 바라보던 강우가 입을 열었다.

“네가 패배할 시…….”

“……?”

“류헤이는 죽는다.”

“뭐?”

전혀 예상치 못한 조건에 지금껏 동요 없던 히데타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가 분노가 담긴 어조로 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그래.”

강우는 허리 쪽에서 새로 얻은 단검을 빼 들었다.

심수련이 대련 때 준 바로 그 단검이었다.

― 됐네. 자네 가지게.

그녀는 패배에 사용한 단검을 갖고 싶지 않았는지, 돌려받지 않고 강우에게 선물했다.

단검의 날을 살핀 강우가 이내 고개를 들어 히데타를 똑바로 바라봤다.

“류헤이는 사형이다. 기자들 수명이 죽거나 다쳤으니, 그 정도는 당연하겠지.”

“…하.”

히데타는 실로 오만방자한 강우의 눈과 말투를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류헤이는 연합 소속이다. 그의 사형을 연합에서 가만두고 볼 것 같은가?”

류헤이를 처벌하는 것과 사형시키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건 연합은 신경조차 쓰지 않겠다는 태도.

[이, 이야기가 다르잖아요!]

[…….]

모두가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는 사이, 서유리도 강우에게 다급히 <전음>을 보냈지만, 그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똑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말이 길군. 어차피 네가 이기면 될 일 아닌가.”

“…….”

그런가.

그제야 히데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제 보니 이 사내는 오만방자하다 못해 세상 물정을 몰라도 전혀 모르는 철부지였다.

외교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우물 안 개구리.

‘제정신이 아니로군.’

이 철부지는 한국에서 최강자라 칭송받던 이승우를 잡았다는 영광에 취해 마치 자신이 천하라도 얻은 양 행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승우는 이미 국내 일로 심리가 불안했으며, 그간의 도주 행각과 5대 길드장들과의 전투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고작 그런 상대를 이겨 놓고 저런 시건방진 태도라니.

‘네놈이 보는 하늘이 사실은 티끌도 안 된다는 걸 알려 주마.’

더 이상의 대화는 무용했다.

검을 완전히 빼 든 히데타가 웃었다.

“그렇게 원한다면…… 죽여 주지.”

츠츠츠츳!

곧 히데타의 검, 백야검(白夜劍)에서 서릿발 같은 하얀 마력이 불타올랐다.

지켜보던 모든 이가 움찔할 정도로 차갑고도 강렬한 기운이었다.

어느새 히데타가 뿜어내는 냉기에 주변 곳곳에서 서리가 내리고, 입김이 흘러나왔다.

‘저게 히데타의 마력!’

서유리도, 김인표도, 평소처럼 얼떨결에 따라온 오만석도.

그들 모두가 히데타의 현재 감정 상태와 그 힘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히데타는 정말로 강우를 해칠 생각이었다.

사고를 빙자해도 좋았다.

어차피 놈의 신분은 길드장도 아니고, 살려 둔다고 해서 자신들과 힘을 합쳐 중국에 대항할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이런 주제 모르고 설치는 망나니 같은 놈은 살려 둬 봐야 후환만 될 뿐이다.’

일본을 오동이라는 하나의 길드로 통합하는 데에는 냉혈한 같은 히데타의 결정력이 뒷받침했다.

그는 후환이 될 것 같은 자는 철저히 제거해 왔다.

그것이 어제까지 함께하던 동료든, 자신을 후원하는 정치인이든, 지지하는 민간인이든.

히데타의 검 앞에선 모두가 평등했다.

심지어 제 명성을 쪽쪽 빨아먹던 먼 친척들까지도.

그는 제 앞에 걸림돌이 될 것 같은 모든 것들을 베어 넘기며 이 자리까지 왔고, 마침내 일본을 하나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오동 아래 일본.

그는 비로소 일본을 자신의 발아래 두게 된 것이다.

그런 히데타의 눈에, 강우는 잿더미에 숨겨진 작은 불씨였다.

지금은 비록 멋모르는 하룻강아지에 불과하지만, 더 내버려 뒀다가는 분명 오동과 대일본에 화재를 낳을 놈이었다.

그러기 전에 확실히 그 불씨를 꺼 둘 필요가 있었다.

‘팔 하나쯤… 아니, 두 다리를…….’

히데타는 여전히 단검을 쥔 채 미동조차 없는 강우를 보며 검의 궤적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단 5초.

단 두 호흡이면 충분히 팔 하나쯤은 잘라 낼 듯싶었다.

곧 그가 얇은 미소를 띠었다.

“어디 주둥이와 실력이 얼마나 비례하나 볼까?

팟!

히데타의 신형이 흔들린다 싶더니, 단번에 강우의 눈앞에서 등장했다.

그의 특기인 <순보>였다.

누군가는 <공간 전이> 혹은 <블링크> 등이라 부르지만, <순보>는 <텔레포트>가 아니었다.

그것은 실질적인 ‘발걸음’.

다리에 응축시킨 마력을 순간적으로 폭발시켜 얻는 움직임이었다.

“히데타!”

그에게서 흘러나온 살기를 읽은 김인표가 다급히 불렀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검을 사선으로 올려 그으며, 히데타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크크크! 그대로 있으면 머리가 잘릴 거다!”

검을 든 그는 마치 딴사람이 된 듯처럼 보였다.

어느새 부릅뜬 두 눈에선 광기마저 엿보였으니까.

그 섬뜩한 안광에 모두가 흠칫하는 사이, 히데타의 백야검이 당장에라도 강우의 목을 가를 듯 쇄도했다.

‘아, 안 돼!’

그것을 본 누군가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송민호와 로드리게는 후자였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

강우는 뒤로 물러나 실로 아슬아슬하게 히데타의 검을 피했다.

‘…뭐?!’

자신의 검이 예상과 다르게 허공을 가르자, 히데타가 눈살을 찌푸렸다.

강우가 보인 건 단순한 회피 동작이었지만, 조금 전까지 그의 살이 베일 거라 확신하던 히데타로서는 다소 충격적인 결과였다.

‘어째서?’

자신의 백야검은 길이가 약 2미터에 이를 만큼 엄청난 장검.

하지만 강우와의 거리는 분명 그 안쪽이었다.

아무리 놈이 몸을 젖혔어도 분명 닿았어야 하는 거리인데…….

대체 어떻게 피해 낸 거지?

그러나 베지 못했다면, 다시 베면 될 일.

히데타는 빠르게 정신을 수습하며 다시금 검을 그었다.

“운이 좋구나!”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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