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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헌터-120화 (121/186)

[120화] 구애 (6)

― 좋아요.

한참을 고민하던 임가은은 강우의 제안을 승낙했다.

정말로 강우가 자신을 3차 각성자로 만들어 준다면, 그녀는 강우를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한 것이다.

단, 몇 가지 조건이 붙었다.

― 3년, 딱 3년이에요. 3년만 당신을 돕고, 그 뒤로는 서로 헤어지는 거예요.

임가은은 강우에게 자신을 내주는 걸 3년으로 한정했다.

― 3년간은 당신을 군말 없이 따르겠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주종 관계가 되는 건 아니에요. 난 내가 절대 따를 수 없는 지시라고 여겨지면 따르지 않을 거고요. 물론, 말도 안 될 고집은 부리지 않을 테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나도 뚝심이 있고,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

3년.

길면 길고, 짧으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그녀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자신이 이곳에서 석탈해를 상대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본인은 언젠가 이곳을 떠날 사람.

이 시간선의 석탈해를 죽이고 나면, 강우는 자신이 살던 시간선으로 되돌아갈 생각이었다.

<데스 나이트>의 말에 의하면,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임가은과의 계약은 딱 그 이전까지가 될 터였다.

“돌아갔습니까?”

집으로 들어서자 안에서 기다리던 박도진이 강우를 맞이했다.

“그래.”

실로 오랜만에 찾는 집.

강우는 문득 박수영이 보고 싶어졌지만, 그녀는 지금 어린이집에 가고 없었다.

“다시 가십니까?”

“당분간은 계속 못 들어올 것 같군. 난 개의치 말고 지내도 된다.”

강우의 지시로 이승우와의 싸움에선 배제된 박도진이었다.

유아라가 북한으로 떠나고, 검계 단원 대부분이 인명 구조에 나선 탓에 수영이를 돌볼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우가 다시 집을 나서려고 하자, 박도진이 그를 만류했다.

“그럼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즐겨 드시는 걸로 준비해 놨습니다.”

강우는 그런 그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런 말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그의 음식은 맛있었다.

게다가 며칠간 집에 들어오지 않은 탓에 몰골이 엉망이었다.

강우는 덥수룩한 자신의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

수염이 꽤 자라 지저분한 게, 텐트에서 지낸 임가은과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아니,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았다.

“…그럼 부탁하지. 씻고 오겠다.”

“금방 차리겠습니다.”

강우의 말에 박도진은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박도진의 요리 실력이 남다른 것도 사실이지만, 그의 음식이 강우의 입맛에 맞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계란국.’

인덕션에 물을 올린 박도진은 빠르게 그릇에 계란을 풀어 국을 준비했다.

그간 이 집의 요리를 전담하면서 박도진은 집안 식구들의 입맛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기록해 나갔다.

그건 딸 수영이를 기르며 생긴 습관이기도 했다.

우선 유아라의 입맛은 소위 말하는 ‘초딩 입맛’.

그녀는 돈가스나 치킨 같은 튀김류를 좋아하고, 패스트푸드를 즐겨 먹었으며, 종종 부대찌개를 찾았다.

또한 식후에는 푸딩이나 청량음료, 수박, 아이스크림 등 차고 달콤한 후식을 반드시 챙겨 먹었다.

최애 음식은 수영이와 똑같은 떡볶이.

보글보글.

육수를 낸 계란국용 물이 끓는 사이, 박도진은 서둘러 두부를 썰었다.

유아라와 달리 강우의 입맛은 소박했다.

그는 자극적인 음식보단 싱겁고 담백한 음식을 좋아했는데, 소위 말하는 ‘어른 입맛’이었다.

두부 지짐이, 콩나물국, 명태탕 등등.

간혹 마른반찬에 손을 대는 때도 있으나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콩나물로 낸 시원한 국물을 특히 좋아했다.

다만, 강우도 유아라와 같은 점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식후에 입가심용 음료를 즐겨 먹는다는 점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음료는 식혜.

일전에 식혜를 내놓았을 때, 강우가 평소답지 않게 두 잔이나 마신 걸 박도진은 눈여겨보았다.

그 뒤로 냉장고에는 항상 식혜가 준비돼 있었다.

“앉으십시오.”

마침내 샤워를 마친 강우가 주방으로 들어서자, 박도진이 만든 정갈한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두부 지짐과 미리 재워 둔 불고기를 메인으로 한 밥상.

이미 다 준비되어 있다더니, 하나같이 방금 만든 따뜻한 음식뿐이었다.

“…….”

언제나 적응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잠시 식탁 위 음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우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수저를 들어 모락모락 김이 나는 계란국부터 떠먹었다.

후릅.

맛을 떠나 속이 따뜻해져 오는 게, 그간 쌓인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얼마 만에 먹는 제대로 된 식사인지.

강우는 뒤늦게 잊고 있던 인사를 건넸다.

“…고맙다. 맛있군.”

“다행이군요.”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인 박도진은 그러면서 들고 있던 컵을 강우 옆에 내려놓았다.

한 컵 가득 따라진 식혜였다.

“식혜는 냉장고에 더 있습니다. 그럼…….”

그런데 박도진은 곧장 떠나지 않고 잠시 그곳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고민을 읽은 강우가 물었다.

“할 말 있나?”

“저…….”

그답지 않게 말을 길게 끌던 박도진이, 이윽고 결심을 굳힌 듯 이야기했다.

“호칭을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계속 강우 씨, 당신, 이렇게 부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게 뭐라고.

허무하게 웃은 강우가 말했다.

“편안하게 부르면 된다.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굳이 호칭에 연연할 필요는 없어.”

전부터 강우는 호칭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박도진은 달랐던 모양이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마스터라고 부르겠습니다.”

“…마스터?”

“예. 보통 길드원들이 길드장을 마스터라고 부르더군요.”

“난 네 길드장이 아니다.”

“뭐, 저에게는 그리 크게 다르지도 않습니다.”

“…….”

마스터라니.

다소 부담되는 호칭이었다.

황 노인이 보기에도 그리 좋은 호칭은 아니었고.

그러나 편한 대로 부르라고 해 놓고, 그건 또 안 된다고 하기도 뭐했다.

강우의 대답이 늦자, 박도진이 작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마스터.”

그 길로 박도진은 주방을 벗어나 거실로 향했다.

강우의 식사가 부담스럽지 않기 위해서였다.

“…….”

그 뒷모습을 묵묵히 보던 강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곤,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들어오고 나서야 에어컨을 켠 박도진이었다.

각성자인 그 둘은 에어컨이 없어도 크게 더위를 느끼지 못했으나, 그 또한 그의 작은 배려일 터.

강우는 여전히 주방 한편을 자리한 빨간 밥통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 광경을 장혜진이 봤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평소처럼 짓궂은 표정으로 ‘역시 남이 해 준 밥이 제일 맛있지?’라고 말했을까?

아니면 ‘그렇게 꿀꺽꿀꺽 삼키다 체하면? 내가 너무 급하게 먹지 말라고 했잖아. 천천히. 천천히 씹고 먹어야지. 이러면 만날 내 밥만 반 이상 남아 있잖아?’라고 또 한바탕 잔소리를 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어떻게 저런 친구를 사귀었냐’며 신기해했을지도 몰랐다.

평소라면 홀로 살아남은 죄책감에 밥을 잘 먹지도 않았을 테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녀에게도 박도진의 요리 실력을 자랑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국이… 따뜻하군.’

강우는 식사를 시작했다.

* * *

오랜만에 집밥으로 힘을 얻은 강우는 다시 ‘균열 찢기’에 나설 생각이었다.

임가은에게서 드론을 받기까지도 아직 시간이 남았고, 유아라와 김민정이 돌아오지 않은 탓에 아직 심수련의 일도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을 나서기도 전에 박도진이 그를 불러 세웠다.

“마스터, 청익 씨입니다.”

그가 내민 건 핸드폰.

여전히 그 호칭에서 어색함을 느끼며 강우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청익?”

[그래, 나다.]

“왜 이쪽으로 연락했지?”

[어차피 전화해도 안 받을 테니까 박도진한테 한 거지, 인마! 이참에 전화벨 좀 키워!]

“…….”

강우는 청익의 성화에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균열>에선 핸드폰이 작동하지 않는 탓에 핸드폰을 마력 차단 비닐에 넣고 다니는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가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하… 역시나 듣지도 않는구만. 됐고, 오동 길드 마스터가 한국에 왔다.]

오동의 길드 마스터라면…….

“히데타 말인가?”

[맞아. 알고 있었네?]

4차 각성자 히데타.

일찍이 강자의 반열에 들어선 그는 미래에도 발군인 검술과 눈으로 쫓기 힘든 발놀림으로 유명한 자였다.

“…이승우가 죽은 뒤로 이카루스 일은 다 끝난 걸로 아는데.”

[뭐, 얼추 그건 맞는데, 지금 5대 길드랑 놈이 류헤이를 두고 신경전이 한창이야. 5대 길드는 살인을 저지른 류헤이를 법정에 세우겠다는 입장이고, 히데타는 자국으로 데려가 그 처벌 여부를 정하겠다는 거지.]

흔한 알력 싸움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동의 부길드장인 류헤이를 일본에서 재판한다면, 죄가 확정돼도 그리 큰 처벌은 없을 터였다.

간단한 징계 정도에서 그치겠지.

[문제는 류헤이가 연합 소속이라는 거야. 일이 어찌 되든 류헤이는 너에 대해 떠들 거고, 연합은 널 찾아 진상을 듣고자 하겠지. 그렇게 되면 넌 연합에 노출될 수밖에 없어.]

그러나 이미 신분 노출은 감수하기로 마음먹은 강우였다.

이승우를 잡은 것도 그래서이지 않은가.

이제 검계와 자신은 같은 길을 걷기로 했고, 공동의 적을 둔 한편이 되었다.

그 대가로 황 노인 또한 자신을 전폭적인 지원을 주기로 했고.

석탈해도 자신에 대해 알게 된 이상, 굳이 신분을 감출 필요는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이카루스 일의 연장선이야. 그러니 이왕 이렇게 된 거, 퍼포먼스 한 번 제대로 보여 주는 건 어때?]

퍼포먼스?

그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강우가 물었다.

“…히데타 앞에서 말인가?”

[그래. 아예 이참에 히데타를 꺾어 버리는 거지. 놈의 성격상 자존심 상해서 어디 가서 말도 못 할걸?]

“…….”

이승우가 사라진 한국에 히데타의 적수라고 말할 자는 김인표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히데타보다 무위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현재 부상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연합의 압력까지 개입한다면?

5대 길드는 허무하게 류헤이를 내주고 말 터였다.

그렇게 되면 여기까지 온 과정이 무색할 만큼 모든 게 연합이 방문하기 전으로 되돌아가는 셈.

만만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똥파리가 많이 꼬이는 법이다.

이참에 한국이 강인한 면모를 확실히 보여 줘야 일본도, 연합도 한국을 쉽게 보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이런 피곤한 일도 사라지겠지.

고민을 마친 강우가 말했다.

“난 당분간 먼 길을 다녀올 생각이다.”

[응? 먼 길? 언제 가는데?]

청익이 대뜸 자신의 미래 행보를 밝힌 강우에게 의아하다는 듯 묻는 사이,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 머지않은 날이다. 며칠이 될지, 몇 주가 될지, 혹은 몇 달이 될지도 모르지.”

청익은 그제야 강우의 의도를 어렴풋이 이해했다.

그가 괜히 이런 말을 꺼낼 리 없으니까.

강우는 지금 자신에게 경고하며 채근하고 있었다.

“언제고 내가 모든 걸 대신 해 줄 순 없어. 이번에 내가 나선다 해도 잠깐 시간 끌기에 불과하겠지. 난 본래 검계인이 아니었다. 검계의 원 계획에도 나는 없었겠지. 그러니 내가 없는 동안, 아니, 내가 없어진 뒤의 대책을 세워라. 그러고 그때, 시간과 장소를 정해라.”

강우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그러면 이번 히데타와 연합은 내가 맡아 주지.”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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