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구애 (4)
“…며칠째 집에 안 들어왔다고요?”
한선화의 물음에 박도진이 곤란스러워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어디로 갔는데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행선지를 말하고 다니는 분이 아니라서요.”
선물까지 잔뜩 챙겨 왔는데…….
그녀는 강우가 하도 전화를 받지 않아 집으로 찾아온 터였다.
일부러 피한다고 생각했는데, 아예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니.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
“…그분에게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사정이 생기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한강우에게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일이 생긴다?
그건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뒤늦게 자신의 우려가 쓸데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한선화는 옆에 선 임가은을 쳐다봤다.
“어쩌지?”
“음.”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임가은이 말했다.
“이제부턴 내가 알아서 할게. 넌 이제 가도 돼, 선화야.”
“언니가 알아서?”
“응.”
한선화는 잠시 걱정스럽게 바라봤지만, 언니인 그녀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더 할 말은 없었다.
다만, 종종 기행을 보이곤 하는 그녀가 무슨 사고라도 치지 않을까, 조금 우려가 됐다.
한선화는 조심스럽게 귓속말을 전했다.
“언니, 혹시라도 이상한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그 남자, 답답하기가 보통이 아니거든. 조금만 귀찮게 굴어도 당장 경찰한테 연락할걸?”
“그거 잘됐네. 내가 답답한 건 잘 못 참잖아. 나 뭐든 잘 뚫어.”
“…….”
이미 임가은은 결심을 굳힌 얼굴이었다.
그 말인즉, 이미 한선화의 말이 먹힐 시기는 지났다는 뜻이었다.
“…그럼 가 볼게.”
“데려다줘서 고마워.”
한선화는 다소 찝찝한 얼굴로 자리를 벗어났고, 홀로 남겨진 임가은은 박도진에게 물었다.
“근데 집 안에서 기다리면 안 되나요?”
“죄송합니다. 모르는 분을 함부로 들일 순 없는 노릇이라서요.”
현재 임가은은 대문 밖에 서 있는 상태였다.
박도진이 말은 정중하게 해도 집은 철통같이 지켰다.
덕분에 임가은은 마당에 흔하게 깔린 잔디의 그림자조차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집념의 임가은.
그녀는 오늘부터 강우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을 지킬 생각이었다.
“그럼 문 앞에서 기다리는 건 가능할까요?”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박도진이 대답했다.
“문에서 100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라면……. 다만, 오전 7시 10분에서 7시 50분 사이, 그리고 오후 5시에서 5시 30분 사이, 그리고 밤 10시에서 11시 사이에는 쳐다도 보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정확하게 집어내는 시간대가 의문스러워진 임가은이 물었다.
“그게 무슨 시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 집에 사는 구성원들의 대략적인 출퇴근 시간입니다.”
“아아, 그렇군요.”
뭐야, 이 남자?
인제 보니 얼굴도 미남형이고, 몸매도 탄탄하고…….
표정도, 말투도 영 딱딱한 게,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꼭 로봇 같달까?
로봇.
그건 임가은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자,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 같은 존재였다.
잠시 박도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임가은이 물었다.
“혹시 여자 친구 있어요?”
갑작스러운 임가은의 질문에 박도진이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미세하게 눈썹을 꿈틀댄 그가 답했다.
“딸이 있습니다.”
“어머, 죄송해요. 결혼하셨구나.”
임가은은 서둘러 사과하며 내심 아쉬움을 느꼈다.
오랜만에 매력을 느낀 남자였는데.
과연 이런 남자와 결혼한 여자란 어떤 여자일까?
“그럼 한강우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음, 100미터 떨어진 곳에서.”
“…편하실 대로.”
대화를 마친 박도진은 그 즉시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문을 최소한으로만 열어 마당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철통같은 집이네.”
홀로 남은 임가은은 굳게 닫힌 대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실 담벼락이 그리 높지 않은 편이라 마음만 먹으면 그 안을 들여다볼 수도 있지만, 그녀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반칙은 재미없지.’
그녀는 정말로 집에서 약 100미터 떨어진 골목에 자리를 잡았다.
곧 그녀가 가지고 온 간이 텐트가 그곳에 펼쳐졌다.
전원주택 주변으로는 별다른 인가가 없기에 가능한 처사였다.
“…….”
임가은이 열심히 자신이 머물 텐트를 차리는 가운데, 대문 틈새로 그것을 슬쩍 본 박도진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저기서 기다릴 생각인 건가.
한선화도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임가은이라는 여자는 그보다 더한 듯했다.
‘검계에는 참으로 특별한 사람들뿐이야.’
박도진은 한선화가 데리고 온 임가은을 같은 검계인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기행을 보일 리 없으니까.
한동안 그녀의 텐트를 지켜보던 박도진은 남은 이불 빨래를 마저 끝내기 위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 * *
강우는 한국이 제 이야기로 시끄럽든 말든, 며칠째 <균열> 탐방에 한창이었다.
심수련과의 대련 이후로 새로운 발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천에 있던 미궁을 찢자 서울로 이동했다.’
강우는 이승우를 처리한 날, 인천에서 서울로 <텔레포트>한 것을 상기했다.
만약 그것에 대한 이유나 규칙을 찾을 수 있다면?
어쩌면 <균열>을 통해 세계를 마음껏 이동할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균열을 이용하면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어.’
그 뒤로 강우는 <균열>을 베는 것을 반복하고, 이동의 규칙성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은평구의 한 <균열>이었다.
북한산 아래서 발견한 을 가르고 나오자, 자신은 구의 시청 부근에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강우의 등장에 놀란 사람들이 기겁했지만, <검계의 가면>을 쓴 덕분에 신분이 노출되진 않았다.
다만, 뉴스 한 편을 작게 장식했을 뿐.
‘은평구에서 구의 쪽으로.’
‘하남에서 부산으로.’
‘강남에서 노원 쪽으로.’
‘평택에서 익산으로.’
강우는 온종일 ‘균열 찢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아무리 <균열>을 가르고 이동해도 규칙성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미궁을 찢고 난 후에 이승우 주변으로 떨어진 건 그저 우연이었을까?’
<데스 나이트>에게 물어보는 수도 있겠지만, 그는 다시 돌아오는 날, 탑을 클리어하기 전까진 <사이트 스톤>의 세상을 나갈 수 없을 거라 엄포를 놓았다.
‘최소한의 준비는 끝내 놓고 가야 한다.’
탑을 오르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몰랐다.
<사이트 스톤> 세상과 현실의 시간 배율이 다르다고 해도, 어쩌면 몇 주 혹은 몇 개월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
만약 그럴 때 석탈해가 활동을 시작한다면?
큰 낭패였다.
그건 이미 이승우의 사례로 충분히 증명된 바이기도 했다.
고작 4차 각성자 하나에 한국이라는 나라 하나가 위태로워지지 않았던가.
만일 자신이 없을 때 모든 사도가 세상에 튀어나와 설친다면?
몇 주가 아니라 며칠 만에도 이 세상은 망해 버릴 수 있다.
‘내가 없을 때도 석탈해와 사도를 상대로 최소한 시간이라도 벌 수 있는 인물과 세력이 필요해.’
검계만으로는 부족했다.
박도진, 유아라, 서유리를 비롯한 5대 길드장과 북한으로 가족들을 찾으러 간 김민정 등등.
강우는 얼마 전부터 석탈해와 사도들에 맞설 인물들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중이었다.
독불장군처럼 홀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때는 이미 지났다.
그런데 그때.
강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박도진이었다.
“무슨 일이지?”
[집에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한선화 씨가 처음 보는 여자를 집으로 데려왔더군요. 이름이… 임가은이라고 했습니다.]
임가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무슨 일로 왔지?”
[당신께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다고 했습니다. 당사자 외에는 아무한테도 보여 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조금 있다 지쳐 돌아갈 줄 알았는데… 벌써 이틀째인지라. 아, 각성자 연구소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이번에는 아는 이름이었다.
각성자 연구소.
한국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연구 개발 단체.
실제로 그들이 만든 물건 몇 개가 세상에 풀려 있었다.
왕린만 하더라도 이승우로부터 도시를 지키기 위해 그들의 물건을 사용하지 않았던가.
‘한선화가 집으로 데리고 왔다면 어느 정도 신원은 보장된 인물인가.’
그렇다는 건 한선화도 각성자 연구소와 연관이 있다는 뜻.
의외의 인연이었다.
[일단 연락이 안 된다고는 둘러댔는데… 어떡할까요? 이틀째 집 앞에서 텐트를 치고 있습니다.]
“…….”
집 앞에 텐트라니… 그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면서도 어딘가 만나기 께름칙한 구석이 있었다.
한선화 주변은 다 그런 자들뿐인가?
“지금 가겠다.”
[알겠습니다.]
박도진은 강우의 대답이 의외라고 느꼈지만,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강우는 집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각성자 연구소라…….’
어쩌면 자신이 고민하던 세력을 만드는 데 있어 그들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강우는 액셀을 밟았다.
* * *
인천공항.
일본의 오동 길드장, 히데타가 게이트를 나섰다.
국제 헌터 연합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한국에 사절로 간 류헤이가 실종됐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행선지는 이곳, 한국.
히데타가 사라진 부길드장을 찾으러 한국에 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셨습니까.”
연락을 받고 나온 서유리와 송민호가 히데타와 길드원들을 맞이했다.
김인표와 유지태는 여전히 입원 중이라 5대 길드장 중에서 멀쩡한 건 서유리와 송민호가 유일했다.
새롭게 5대 길드에 편입된 만석의 길드장 오만석은 달라진 권한과 업무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기에 그들이 대신 마중을 나온 것이다.
하지만 히데타는 서유리의 인사를 받고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한여름에도 백여우 꼬리털을 엮어 만든 목도리를 걸친 히데타가 싸늘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으며 물었다.
“새롭게 한국의 대표가 됐다던 자가 보이지 않는군. 만석…이라고 했던가.”
옆에 있던 통역사가 서둘러 히테타의 말을 전하자, 서유리가 능숙한 일본어로 대답했다.
“오만석 길드장은 현재 업무가 바빠 나오지 못했습니다.”
“…바쁘다?”
그러자 히데타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가 적대감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말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수장을 마중 나오면서 부하들을 보내다니, 실로 오만방자하군.”
그 말에 서유리의 표정이 굳었다.
곧 정중하던 그녀의 말투에 냉기가 서렸다.
“저희는 만석의 부하가 아닙니다. 한국의 5대 길드는 모두 동등한 권한을 가집니다. 또한 저와 송민호 길드장이 당신을 마중 나온 건 만석의 지시가 아니라 바쁜 만석을 대신해 자진해서 나온 것이고, 말도 없이 찾아온 오동 길드를 마중하는 건 그저 우리의 친절이자 배려입니다. 배려를 당연하게 여기는 그 말투가 영 듣기 불편하군요.”
“…….”
서유리의 냉담한 대답에 히데타가 그녀를 쏘아보았다.
감히 일국의 일개 길드장 따위가 대오동의 길드장을 저렇게 노려본단 말인가.
심지어 이카루스의 수장이던 이승우도 자신을 저렇게 바라보지는 못했다.
‘…이승우를 잡았다, 이건가.’
사실 이승우는 히데타 자신이라도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다만, 중국을 함께 견제해야 하는 동맹국으로서 그냥 내버려 뒀을 뿐.
그는 이승우를 잡았다고 기고만장해진 한국의 각성자들이 우스웠다.
‘고작 놈 하나에 나라가 망할 뻔한 주제에…….’
그때, 보다 못한 다른 부길드장 이토가 한 걸음 나서며 물었다.
“참(斬)할까요?”
검 손잡이에 손을 얹은 그는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들 기세였다.
“무슨 짓입니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스톰을 비롯한 송학 길드원들도 각자의 무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일촉즉발의 상황.
히데타는 손을 들어 이토를 만류했다.
“지금은 류헤이를 찾으러 온 것이다. 쓸데없는 싸움은 금지한다.”
“…알겠습니다.”
그제야 이토는 물러섰고, 스톰과 송학의 길드원들도 무기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긴장감은 여전했다.
헤데타가 여전히 싸늘한 눈으로 물었다.
“류헤이는 어디 있지?”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