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구애 (3)
이승우의 죽음 이후, 대한민국은 온통 시끄러웠다.
TV에선 이승우의 이야기가 쉴 틈 없이 흘러나오고, 그의 유년 시절부터 이카루스의 길드장이 되기까지의 이야기, 그리고 그의 추락과 죽음까지, 그 일대기를 모두 다뤘다.
그만큼 이승우가 한국 사회에 미치던 영향력이 엄청났던 탓이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몰락한 영웅의 이야기는 며칠 못 가 그치고 말았다.
바로 새로운 영웅의 등장 때문이었다.
『이승우를 제압한 최강자! 베일에 싸인 그는 누구인가.』
『한국의 세 번째 4차 각성자?』
『불과 몇 달 전까지 위태롭던 만석 길드! 그들이 신(新)연합의 중심이 된 까닭은?』
『절대강자를 품은 만석? 그들이 숨겨 놓은 세력?』
김인표도 대적하지 못한 이승우를 쓰러뜨린 남자.
류헤이의 공격에도 살아남은 기자들이 강우와 이승우의 싸움을 목격하고 그에 관한 기사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강우의 이름도, 얼굴도 남지 않은 탓에 그들이 쓸 수 있는 사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승우와 강우의 싸움이 담긴 테이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강우를 보호하기 위한 검계와 5대 길드의 조치였다.
한국은 연일 새로운 영웅의 탄생에 대해 논했지만, 철저히 베일에 싸인 강우에 관해 알아낼 순 없었다.
덕분에 그에 대한 소문만 날로 무성해져 갔다.
5대 길드가 이승우에게 대적하기 위해 몰래 키워 낸 각성자라든가, 외국에서 숨어 지내다 돌아온 범죄자라든가, 연합에서 이승우를 잡기 위해 파견한 처형자라든가…….
그리고 서울의 한 칵테일 바(Bar)에서도 강우에 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오직 그녀들만을 위한 바.
주기적으로 만남을 갖는 이 모임은 늘 주제가 달랐는데, 오늘의 주제는 ‘근래 만난 이성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였다.
대낮부터 취한 세 명의 여자가 한 테이블에 둘러앉은 가운데, 칵테일을 홀짝인 한선화가 말했다.
“뭐가 그렇게 잘났냐고?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잘나져. 따라가기 힘들게 말이야. 근데 이상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싫어지긴커녕 더 갖고 싶어져.”
그러자 그 앞에 앉은 서유리가 물었다.
“선화가 그렇게 빠진 건 처음 아니야?”
“맞아. 그 남잔 사람을 조금 안달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어. 언니도 보면 분명 나랑 같게 느낄 거야. 특유의 무심함이 있거든. ‘나는 너한테 전혀,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 눈. 화가 나면서도 묘한 끌림이 있다니까.”
한선화의 푸념에 앞에 듣고 있던 서유리와 임보라가 쿡, 웃었다.
그녀의 이런 약한 모습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몇 달 만에 대전에서 올라온 막내 임보라가 말했다.
“연구소가 차려진 이후로 이런 선화 언니는 처음이에요. 뭐든 척척 해내는 줄 알았는데.”
그랬다.
이 모임의 이름은 바로 ‘각성자 연구소’였다.
세상을 좀 더 나아지게 만들자는 목적 아래 한선화와 서유리, 임보라와 그녀의 사촌 언니인 임가은이 모여 만든 단체.
한참 웃던 서유리가 말했다.
“사실은 나도 요즘 비슷한 사람이 있어.”
“엥? 언니도?”
늘 길드 일로 바쁘던 서유리에게 남자가?
한선화가 의외라는 듯 묻자, 서유리가 대답했다.
“좋아하고 그런 감정은 아닌데… 궁금증이랄까? 대뜸 갑자기 나타나서 도와주고는, 그 뒤로는 아는 척도 안 하더라? 그런 사람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건지……. 요즘은 코빼기도 안 보여. 모임에도 나오지 않고.”
“무슨 모임인데?”
“길드장들 모임. 하긴 그 사람이 길드장은 아니니까 나올 일은 없지만…….”
그 말에서 묘한 느낌을 받은 한선화가 물었다.
“어느 길드 사람인데?”
“있어, 만석이라고. 알지? 이번에 5대 길드에 새로 가입한 길드인데…….”
그러자 한선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만석? 오만석네 길드 말이야?”
“응. 왜 요즘 유명하잖아. 이건 비밀인데, 내가 말하는 그 남자가 요즘 뉴스를 도배하는 그 남자거든. 이승우를 쓰러뜨린.”
“헐… 설마 한강우 말하는 거야?”
비로소 그녀와 자신이 같은 사람을 논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한선화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반응에 서유리도 놀라 물었다.
“그 사람을 알아? 설마 선화, 네가 말한 사람도?”
“…맞아. 한강우야.”
두 사람 모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둘 다 여태껏 같은 사람을 말하고 있었다니.
한선화는 뒤늦게 스톰 길드를 강동구 <균열>에서 구해 준 사람이 한강우였다는 걸 깨달았다.
본래 계획에 없던 작전이라 그녀도 그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다.
‘유리 언니랑 한강우가 인연이 있었다니.’
한선화가 검계의 소속이란 걸 이 모임에서도 비밀이었다.
이곳은 세상을 더 나아지게 만들자는 모임.
검계와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검계 일을 굳이 이곳에 말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도 마음껏 웃고 떠들 자리 하나쯤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각성자 연구소를 검계로 영입하고자 하는 마음도 어렴풋이 있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임보라가 낄낄 웃었다.
“뭐야, 언니들! 완전 웃겨!”
그러면서 그녀가 말했다.
“내가 말하려는 남자도 각성자야. 저번에 전화로 말했지? 브레이크 때 라이칸 보스를 단번에 해치운 남자 말이야. 이름은 모르지만, 그가 함께 다니는 수하의 이름은 알아.”
“이름이 뭔데?”
임보라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박도진. 분명 그렇게 말했어.”
“…….”
이번에도 눈살을 찌푸린 한선화가 물었다.
“…박도진?”
“응.”
“혹시 그때, 여자 하나도 따라가지 않았니?”
“어? 그걸 언니가 어떻게 알아? 맞아. 단검을 쓰는 여자였는데…….”
그러자 한선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라이칸 보스를 일격에 해치웠다는 그 남자도 단검을 썼지?”
“…응.”
그제야 이상함을 깨달은 임보라의 얼굴이 굳었다.
“아마 그 남자 이름도 한강우일걸.”
“…….”
결국 세 사람 모두 같은 사람을 말하고 있었다.
얼떨떨할 정도로 신기한 우연.
그녀들 모두가 뒤늦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황당하네.”
“그렇지?”
“이럴 수가 있나?”
그때였다.
정리할 게 있다며 카운터 너머의 창고에 있던 마지막 멤버가 한 손에 칵테일을 든 채 걸어 나왔다.
이 칵테일 바의 주인인 임가은이었다.
가게가 그녀들만을 위해 비워진 것도 모두 그녀의 덕이었다.
“우리 연구소 여인들을 셋이나 건드린 남자라니… 굉장한데?”
붉은 원피스를 입은 임가은의 자태에선 묘한 요염함이 내비쳤다.
피부를 검게 태운 그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테이블에 앉았다.
“한강우라고?”
임가은은 각성자 연구소에서 가장 맏언니였다.
올해로 서른세 살이 된 그녀가 바로 이 연구소를 창설한 주인공이었는데, 공학도인 그녀는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뛰어난 기계공학 인재였다.
그야말로 천재.
각성자 연구소에서 만드는 물건 대부분도 나머지 멤버들이 아이디어를 내면 그녀가 만드는 식이었다.
각성자 연구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일원들의 역할은 분명했다.
한선화는 연구소의 자금줄을, 서유리는 마력과 마법의 제공을, 임가은은 제작을, 임보라는 임상 실험과 상용화를 맡고 있었다.
단, 임가은은 한 가지를 더 맡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바로 ‘섹시’였다.
스스로 연구소에서 ‘농염한 섹시’를 맡고 있다는 임가은이 한 손으로는 턱을 괸 채 다른 손 손가락으로는 칵테일 잔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 남자… 내가 한 번 만나 볼까?”
“언니가?”
한선화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임가은은 한선화가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유일한 여자였다.
해박한 공학 지식도 지식이지만, 그녀가 만드는 모든 물건, 평소의 대범한 행실들, 그녀의 모든 게 예상하지 못하는 것들뿐이었으니까.
그러면서도 그녀는 연구소 동생들을 잘 헤아리고 챙겼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녀에겐 말 못 할 고민이 없을 정도.
다만,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그녀는 세상일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삶의 목적은 오직 연구개발만이 전부였다.
간혹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때도 있지만, 그건 단순한 순간의 쾌락일 뿐, 그녀 인생에서 그리 큰 의미를 차지하진 않았다.
그런 그녀가 한강우에게 관심을 보이고 직접 만나겠다니…….
한선화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응. 4차 각성자라니, 엄청나잖아? 어쩌면 꽤 유용한 정보가 나올지도 모르고 말이야. 말이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진즉부터 4차 각성자를 만나고 싶어 하던 임가은이지만, 한 길드의 수장인 이승우와 김인표를 그녀가 직접 만나는 건 어려웠다.
아무리 그녀가 각성자 연구소의 수장이라지만, 애초에 이 단체는 음지에서 활동하는 단체.
발명한 물건을 팔아 돈을 벌기보다는 그 뒤에 숨어 세상을 좀 더 나아지게 하는 걸 목표로 하는 단체였다.
한선화도, 임보라도 자신들의 소속을 세상에 비밀로 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고, 서유리 역시도 섣불리 5대 길드에 이 단체를 소개하지 않았다.
“그럼 내가 한 번 주선해 볼까?”
이 중에서 강우를 만나러 갈 수 있는 건 한선화가 유일했다.
아무리 강우가 퉁명스럽다고 한들, 아버지 왕린에게 부탁하면 만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여차하면 청익과 황한수도 있고.
그나마 그 둘은 강우와 친분이 있어 보였다.
“그래 줄래? 이번에 브레이크 사태 때 경험도 있고… 내가 마침 준비한 게 있거든. 저번에 보여 준 드론 있지?”
“균열 레이드용으로 쓴다던 그거 말이야?”
“응.”
현재 한선화의 보디가드인 비에이 또한 임가은의 실력이었다.
비에이는 빅 에이아이(Bic A.I.)의 약자.
그는 임가은이 발명한 사이보그였다.
만약 세계가 그 사실을 안다면 엄청난 화제가 될 테지만, 임가은 완벽을 추구했다.
그녀는 자신이 만족하기 전에는 세상에 무언가를 내놓길 꺼려했다.
“드론으로 균열을 클리어할 수 있다면 엄청날 거야. 예전에 히어로물로 유명하던 금속맨 기억하지?”
“알지.”
“그 남자처럼 드론을 마음대로 다루는 게 내 목표야. 드론을 길드원으로 거느린 길드장이 되는 거지.”
만약 드론만으로 <균열>을 클리어할 수 있다면, 레이드 과정에서 희생되는 각성자를 대폭 줄일 수 있을 터였다.
또한 드론 몇 기만으로도 <균열>을 전부 파악할 수 있을 테고.
레인저보다 더 뛰어난 정찰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상용화되기까지는 수많은 장애물을 거쳐야 하겠지만 말이다.
“얼마 전에 16기 드론이 완성됐거든. 그걸 보여 주려고. 그 남자가 상위 균열에 가지고 들어가 주면 좋겠는데……. 4차 각성자와의 콜라보라니, 엄청나지 않니?”
임가은의 두 눈이 반짝였다.
만약 강우가 그 부탁을 들어준다면, 그 과정에서 얻어오는 정보만 해도 엄청난 자료가 될 터였다.
한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행적이 다 녹화될 테니 쉽게 들어주진 않겠지만… 그래도 말은 해 볼게.”
“아니, 설득은 내가 할게. 넌 자리만 만들어 줘.”
임가은은 나름 자신만만했다.
자신의 발명품을 본다면 그 누구라도 혹할 테니까.
그게 신흥 강자를 꿈꾸는 만석 쪽 인물이라면?
더더욱 그것을 탐낼 터였다.
전투 드론의 사용화.
그것이 임가은이 설정한 올해의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선 4차 각성자인 한강우의 도움이 절실했다.
드론을 실제 전투에서 사용하는 데 있어 어떤 보강점이 필요한 지 알아야 하는데, 일반적인 각성자들로는 상위 <균열>에 들어갈 수도 없거니와, 전투에 집중 중인 각성자가 드론을 신경 쓴다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상위 <균열>에서도 압도적인 무위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존재.
그녀에겐 그런 존재가 필요했다.
임가은이 중얼거렸다.
“반드시 그 남자를 꼬셔야 돼.”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