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구애 (2)
한선화와 헤어진 강우는 계속 길을 걸었다.
‘여전히 별난 여자로군.’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한선화는 만날 때마다 한결 같은 태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나저나 어디까지 따라올 생각인지.’
한선화는 떨어졌으나, 아직 자신을 따라오는 추격자가 한 명 더 남아 있었다.
강우는 상대가 손쉽게 따라올 수 있도록 천천히 걸으면서 일부러 대로변을 지나쳐 골목으로 향했다.
상대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골목에 멈춰서 뒤를 돌아보자, 비로소 자신을 쫓던 상대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허공에서 스르륵 나타난 여인.
올해로 64세가 된 그녀는 다름 아닌 심수련이었다.
“역시 알고 있었군.”
그녀의 말에 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심수련은 자신이 왕린의 아파트를 떠난 순간부터 <은신>으로 줄곧 그 뒤를 쫓아왔다.
그녀가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 나이 먹고 젊은이 뒤꽁무니나 몰래 따라다니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네.”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이었으나, 강우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흘흘, 젊은이답게 성질이 급하군. 그 자존심 강한 선화, 고 계집애가 졸졸 따라다니는 걸 보니, 역시 비슷한 성격끼리 끌리는 건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강우가 재차 묻자, 대화로 천천히 분위기를 풀어보려던 심수련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자네, 치악산에 한 번 다녀가게.”
“…치악산을?”
“그래.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네. 자네에게도 분명 도움이 될 걸세.”
치악산이라면 단연 그녀가 운영하는 암살자 양성소를 뜻했다.
그곳에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게 있던가?
“암살자 수업이라도 받으라는 겁니까?”
그러자 심수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비슷하네. 난 자네와 이승우가 싸우는 것을 한시도 눈 떼지 않고 지켜보았어. 대단하더군. 이미 전 세계에서 자네를 상대할 만 한 자가 존재할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말일세. 그러나…….”
그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자네는 굉장한 마력과 실력을 갖췄지만, 정교한 무예는 없더군. 굳이 형식에 갇힐 필요는 없지만, 기본적인 무예만 익혀도 실력이 배가될 걸세.”
그러고 보니 이승우와 싸울 땐 <피바라기>를 사용할 일이 별로 없었다.
아직 <진(眞) 피바라기>가 덜 익숙한 탓에 놈을 맨주먹으로 때려잡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심수련은 그 점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단검술은 지금도 충분합니다.”
“흘흘, 그래?”
강우의 말이 그저 자만으로 들린 걸까.
잠시간 웃던 심수련이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그럼 이건 어떤가? 자네와 내가 오직 단검으로만 승부를 보는 걸세. 내가 이기면 자네가 날 따라가는 거지.”
“…당신이 지면?”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답했다.
“내가 지면 자네 부탁을 하나 들어주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말일세. 나이가 좀 들긴 했어도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네. 어떤가?”
말하는 기세를 보니 자신만만한 모양이었다.
하긴, 아시아 최강이라 불리던 그녀이니 그 자신감도 전혀 근거 없는 셈은 아니었다.
‘심수련이라…….’
그녀의 제안을 굳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아시아 최고 암살자의 단검술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건 검을 쥔 자라면 누구나 들 법한 기대와 본능이었다.
분명 그녀의 단검술은 수준급일 터.
어쩌면 그 검을 마주해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 될지 몰랐다.
결국 강우는 심수련의 뜬금없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그 대답에 심수련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물었다.
“검을 가지고 있는가?”
본래의 <피바라기>가 부서진 뒤로 강우는 아직 새로운 일반 무기를 찾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골목을 살피며 단검을 대신할 것을 찾자, 그 모습을 본 심수련이 허리춤에서 단검 하나를 끌어냈다.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단검이었다.
물론, 그것 또한 엄청난 보검이었지만.
“이거면 되겠나?”
“…예.”
강우는 그것을 건네받았다.
날이 잘 벼려진 게, 평상시에도 잘 관리된 단검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치는 수준이었다.
‘어디, 눈으로 확인해 볼까.’
심수련은 강우가 골목의 쓰레기로 자신을 상대하려 했다는 점에 기가 찼지만, 굳이 심기를 드러내진 않았다.
어차피 붙어보면 그 자신감이 오만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곧 각자의 단검을 쥔 두 사람이 골목에서 마주 섰다.
갑작스럽게 열린 대련이지만, 둘의 표정은 모두 진지했다.
강우 역시도 이런 싸움에선 밀리기 싫어하는 타입.
그는 서둘러 이번 싸움을 마무리하고 제 할 일을 하러 갈 생각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심수련에게 부탁하기 딱 좋은 일이 있기도 하고.
“시간은 5분. 상대를 제압하거나 쓰러뜨리면 승리일세. 단, 마력을 사용하면 그 즉시 패배지.”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할까?”
심수련이 자신의 손목시계로 초를 재는 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의 탐색전이 시작됐다.
강우와 심수련이 서로의 자세를 살피는 사이, 팽팽한 긴장감이 골목을 가득 채웠다.
‘…좋군.’
역시나 수준급 암살자답게 심수련의 자세에선 빈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강우가 두 눈을 좁히던 찰나, 그녀가 먼저 움직였다.
타앗!
재빠르게 거리를 좁힌 심수련의 단검이 강우의 얼굴 쪽을 쑥― 찌르더니, 몸을 피하기 무섭게 연달아 목과 가슴을 노리고 쇄도했다.
하지만 강우는 침착하게 공격들을 내친 뒤, 검을 휘둘러 반격을 시도했다.
마력 없이 싸우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강우는 묘한 흥분을 느끼며 단검을 사선으로 그었다.
슥!
하지만 허공을 가르는 공기 소리만 요란할 뿐, 단검은 그녀의 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날렵하군.”
심수련이 작게 중얼거렸지만, 아직 강우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어느새 궤적을 바꾼 그의 단검이 심수련의 어깨를 노리고 찔러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깨를 살짝 내리는 것으로 그것을 피해 내며, 빠르게 몸을 회전시켜 뒤축으로 강우의 머리를 걷어찼다.
턱!
강우가 서둘러 팔을 굽혀 그것을 막는 사이, 연달아 두 번의 발차기가 머리와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왔다.
60대의 나이가 무색할 만치 재빠르고 자신감 넘치는 공격들이었다.
강우는 그녀의 단단한 발차기를 연거푸 막아 내며 생각했다.
‘격투에도 능하다.’
이번 대결 제안이 괜한 만용이 아닌 듯, 그녀는 실로 뛰어난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 뒤로도 몇 차례 더 부딪쳐 본 강우는 심수련의 동작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유아라와 묘하게 비슷해.’
심수련이 가르친 게 청익이고, 다시 청익이 가르친 게 유아라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제자들에게 전수하는 건 자신의 검술.
결국 그들의 검술은 어느 정도 ‘정형성’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확실히 대를 이을 만한 검술이다.’
강우는 자신의 공격을 속속들이 피하며, 그때마다 반격해 오는 심수련의 실력에 감탄했다.
그녀의 공격은 ‘반격’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대개 일격필살을 노리는 암살자들과 달리 그녀의 단검술은 안정적이었다.
팟!
둘의 대결은 주거니 받거니 점점 격렬해졌다.
격돌이 점차 격해짐에 따라 규칙적이던 호흡 소리도 덩달아 주기가 짧고 불규칙해졌다.
강우와 심수련은 마치 합을 맞추듯 공수를 계속해서 주고받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심수련의 단검이 다시금 강우의 목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시험이나 장난이 아닌, 진짜 살의가 담긴 검.
그녀는 이번 싸움에 진심이었다.
그것을 어김없이 내친 강우는 침착하게 움직였다.
곧 그의 발이 앞으로 쭉 미끄러졌다.
“……!”
대뜸 거리를 좁혀 오는 강우의 동작에 미간을 찌푸린 심수련은 거리를 벌리기 위해 서둘러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것은 강우의 몸에 닿지 않았고, 강우는 집요하게 거리를 내주지 않으며 계속해서 그녀를 몰아붙였다.
챙! 챙! 챙!
사나운 쇳소리가 연신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잠깐의 틈을 얻은 심수련이 다시금 거리를 벌리기 위해 뒤로 크게 물러섰다.
‘됐다!’
간신히 강우를 떨쳐 낸 심수련이 새로운 공격을 펼치려던 찰나.
그녀는 곧 그것이 함정이었음을 깨달았다.
어느새 단검을 양손으로 쥔 강우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던 것이다.
강우의 입이 달싹였다.
‘살(殺).’
물론 진짜 마력을 이용해 <살(殺)>을 펼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살기와 예리함은 진짜였다.
단 한 번의 일격.
바닥을 박찬 강우의 단검이 심수련의 가슴팍으로 쏘아졌다.
“윽!”
심수련이 황급히 단검을 옆으로 세워 그것을 막아 냈지만, 양손으로 찌른 단검을 한 손으로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몇 걸음 휘청거렸다.
‘이런……!’
손목이 시큰거리는 게, 하마터면 쥐고 있던 단검마저 떨어뜨릴 뻔했다.
‘부족했나.’
강우는 그녀의 방어에 아쉬워하면서도 손에 쥔 승기를 놓치지 않았다.
멈춘 호흡 속에서 강우는 연달아 단검을 찔렀다.
‘살(殺).’
‘살(殺).’
‘살(殺).’
콱! 콱! 콱!
심수련이 다급히 그것들을 막아 냈으나, 세 번이 한계였다.
이미 자세가 무너진 그녀가 빈틈을 보이자, 강우의 두 눈이 번뜩였다.
‘살(殺).’
“……!”
정적.
싸움이 끝난 골목에는 서늘한 침묵만이 남아 있었다.
심수련은 어느새 자신의 턱을 겨누고 있는 강우의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턱을 고작 손톱 길이만큼의 간격만 남겨 둔 채 멈춰 있었다.
“…….”
전력을 다해 찌르던 검을 이토록 정교하게 멈춰 세울 수 있다는 것부터가 이미 강우의 실력이 범인의 수준을 까마득히 넘어섰다는 증거였다.
심수련은 인정했다.
강우는 자신이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승우를 상대하며 단검을 사용하지 않은 건, 그가 단검을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검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서였다는 걸 그녀는 깨달았다.
똑딱똑딱.
어느새 손목시계는 4분 56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단하군. 인정하지. 내가 졌네.”
심수련이 패배를 인정한 뒤에야 강우는 겨누고 있던 단검을 거뒀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단검을 거꾸로 쥔 채 공손하게 그것을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잘 썼습니다.”
“…….”
심수련은 천천히 그것을 받아 들였다.
그녀는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겨드랑이와 등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토록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두른 게 얼마 만이던가.
이승우 때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강우로 인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그녀이기에 이 시간이 더더욱 소중했다.
비록 패배는 했으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녀는 한결 편안해진 기분으로 물었다.
“자네가 이겼으니 내 약속대로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네. 아무거나 좋으니 한번 말해 보게.”
과연 이 청년은 자신에게 무슨 부탁을 할까.
진정한 강자가 건네는 부탁.
그렇게 생각하자 기대를 넘어 설레기까지 했다.
잠시 고민하던 강우가 답했다.
“본래 치악산 균열은 한 번 떠나면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그런데 그건 왜…….”
“주변에 그런 자가 있습니다. 그자를 다시 받아 주십시오.”
“혹, 수련 도중 이탈한 자인가?”
“그렇습니다.”
“음…….”
예상치 못한 부탁에 심수련은 고심에 잠겼다.
애초에 <치악산 균열>은 수련을 모두 끝마칠 것을 맹세한 뒤에야 출입할 수 있는 곳.
그곳을 스스로 달아난 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게 불문율이었다.
강우의 부탁은 이제껏 단 한 번도 깨진 적 없는 그 불문율을 어기는 일이었다.
“또, 어르신의 가르침이 필요한 자가 한 명 더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을 받아주십시오.”
“하나…….”
심수련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강우가 연달아 말을 뱉었다.
“그 외에 다른 부탁은 없습니다. 들어주시든 약속을 어기시든 하셔야 할 겁니다.”
“…허.”
심수련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외통수였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