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테러리스트 (7)
<균열>을 스스로 찢고 나온다는 것.
그건 강우로서도 꽤 진귀한 경험이었다.
껍데기를 깨고 막 태어난 파충류처럼, 그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신세계라고 해야 할까.
그간 자신이 보아 오던 세상이 알 ‘속’ 세상이라면, 석탈해의 진짜 정체를 알고 <균열>을 스스로 빠져나온 순간부터 이 세상은 그에게 알 ‘밖’의 세상이 된 듯했다.
‘여긴…….’
그렇게 <미궁>을 빠져나온 강우는 주변을 의아한 눈빛으로 둘러보았다.
어떻게 된 까닭인지, <미궁>을 찢고 나오자 자신은 서울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적지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 멀리 하늘에 보이는 희미한 <역(力)>의 흔적.
그것을 따라가니 자연스럽게 이승우와 5대 길드장들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
<역(力)>의 힘으로 이승우를 일단 제압한 강우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한바탕 전투를 치렀는지 몰골사나운 모습을 한 청익과 누더기를 걸친 아홉의 고위 각성자, 그리고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
실제로 만나 본 적은 없지만, 현재 한국에서 저만한 실력자들을 거느릴 중년 여자는 강우의 기억에 단 한 명뿐이었다.
‘저자가 소문의 심수련인가.’
심수련은 아까부터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는데, 강우는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서유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이 작게 떨리고,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이어서 강우의 시선이 쓰러진 5대 길드장과 류헤이, 이제는 주검이 된 수많은 각성자들을 지나 마침내 이승우에게 닿았다.
줄곧 강우를 노려보던 놈이 물었다.
“네놈이 어떻게 이 힘을… 너, 뭐 하는 놈이냐?”
조금 적응이 됐는지, 이승우는 <역(力)>의 힘을 거스르며 콘트리트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강우의 <역(力)>은 석철도 감당하지 못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놈은 그것에 온몸으로 맞서며 버티고 있었다.
이승우가 석철보다 강할 리는 없고… 석탈해 놈이 무슨 짓을 한 건가?
[조심해라. 5대 길드장 모두가 덤벼도 당해 내지 못한 놈이야.]
청익이 <전음>으로 경고했지만, 강우는 여전히 묵묵히 이승우를 마주한 채 살필 뿐이었다.
놈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건 역시나 익숙한 기운.
그것은 흡사 석철의 것과도 비슷했다.
‘이승우도 사도가 된 것인가.’
사도가 이렇게 한없이 생겨난다면, 강우로서는 꽤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사도가 된 지 얼마 안 된 탓인지, 이승우의 <역(力)>은 석철의 것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
설사 앞으로도 사도가 계속 생겨난다 해도 이 정도 수준이라면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스륵.
강우가 허공에서 <진(眞) 피바라기>를 꺼내 들며 물었다.
“석탈해를 만났나?”
“…….”
이승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강우는 <미궁>으로 자신을 찾아온 석탈해를 떠올렸다.
― 우린 곧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당신을 위한 선물을 준비 중이거든요. 부디 그때까지 안녕하시길.
‘곧 만날 수 있다.’
놈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것은 머지않아 현실로 다가올 터.
그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줄 생각은 없었다.
‘네놈이 이룬 모든 것, 이곳에서 네놈이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하겠다.’
그것이 이 시간선에 떨어진 순간부터 강우가 품은 다짐이니까.
그리고 그 ‘모든 것’ 중 하나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죽여야겠군.’
어차피 이제 이승우는 재기가 불가능한데다 만석이라는 대체 길드가 등장했으니 더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강우는 점차 이승우에게 다가가며 주변의 모두에게 <전음>을 전했다.
[모두 물러서라.]
“……?!”
이토록 선명한 <전음>이라니.
강우의 <전음>을 들은 모두가 흠칫 놀란 채 주변 사람들을 살폈다.
그들도 자신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을까 싶어서였다.
곧 모두가 같은 <전음>을 받았다는 걸 깨닫자, 그들의 얼굴에 경이로움이 피어났다.
엄청난 정신력을 소모하는 <전음>을 동시다발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실력자라는 뜻이었으니까.
[더 말하지 않겠다. 물러서라.]
강우가 재차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머뭇대자, 보다 못한 청익이 나섰다.
“모두 물러서! 저놈도 괴물이야! 말려들기 싫으면 물러나라!”
그제야 사람들이 서둘러 쓰러진 동료들을 안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류헤이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유지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괜찮아.’
유지태를 챙겨 뒤로 물러선 서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우라면, 그가 강동구 <균열>에서 보여 준 실력이라면, 이승우를 상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5대 길드장 모두보다, 오동의 2인자라는 류헤이와 그 직속대보다도 자신의 앞에 선 한강우 한 사람의 등이 더 커 보이는 날이 올 줄이야.
서유리는 강우의 뒷모습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야 두 눈으로 확인하겠군.’
청익도 서유리와 비슷한 감상이었다.
그간 이야기로만 전해 듣던 무위를 실제로 확인할 시간이었다.
과연 뉴스로만 보아 온 인천 섬에서의 대결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의왕 <균열>에서 이한을 상대하던 때보다 또 얼마나 성장해 있을까?
청익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청익과 서유리를 포함한 모두는 자신들을 등지고 선 강우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화르륵!
이윽고 주변이 정리되자, 이승우의 불과 몇 걸음 앞에 선 강우가 자신의 무기에 검은 불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때까지 강우의 위압감에 눌려 꼼짝 못 하던 이승우도 움찔하며 반응을 보였다.
‘강하다.’
이승우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선 존재는 이때까지 만난 그 어떤 상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치 강한 존재라는 걸.
단 한 명.
그날 집무실로 자신을 직접 찾아온 석탈해를 제외하면 말이다.
‘어쩌면 이것은 영웅을 위한 테스트일지도 모른다.’
이승우는 강우의 <역(力)>에 당해 소멸한 권갑을 다시 생성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에게 힘을 준 석탈해의 테스트.
그렇다면 지금 이 싸움은 진정한 <역(力)>의 주인을 뽑는 자리였다.
‘절대 물러서선 안 돼.’
다시금 자신감을 얻은 이승우가 말했다.
“영웅에겐 수많은 시련이 따르기 마련. 네놈도 내 시련 중 하나인 모양이로군.”
“……?”
강우가 잠시 의아하게 바라봤지만, 굳이 대꾸할 필요도 못 느낄 대사였다.
콰광!
먼저 공격을 시도한 건 이승우 쪽이었다.
심수련의 정예들을 단번에 떨쳐 낸 놈의 일권이 강우의 전방을 강타하며 강한 파동을 일으켰다.
이미 200미터 이상 물러난 각성자들까지 느낄 정도로 엄청난 마력의 파동.
쿠구구구구!
견디지 못한 몇몇 건물의 일부가 무너지고, 사방으로 퍼져 나간 마력이 공기를 태우며 작은 불길이 일었다.
하지만…….
“석철을 대신하기엔 아직 한참 멀었군.”
“……?!”
강우는 이승우의 주먹에 같은 주먹으로 응수했다.
쾅!
“커헉!”
어느새 다가간 그의 왼 주먹이 놈의 가슴을 강타하자, 살이 기이하게 뒤틀리며 놈이 저 멀리 빌딩 벽에 처박혔다.
9층짜리 빌딩이 흔들릴 만치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괴력이냐.’
떨어지는 콘크리트 잔해 속에서 이승우는 정신이 아찔했다.
그간 단 한 번도 힘에선 밀려 본 적이 없는 그이기에, 작금의 상황은 더 충격이 컸다.
덜덜.
이승우는 걷잡을 수 없이 떨려 오는 자신의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내가… 떨고 있다. 이 이승우가.’
그건 그것대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이승우가 다시 걸어 나오자, 건물 외벽에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구경꾼들도 충격은 마찬가지였다.
‘놈의 주먹을 버틴 걸로도 모자라 날려 버려?!’
특히나 강우를 처음 본 심수련은 경악하다 못해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자신이 정성껏 기른 제자들도 단 일격(一擊)을 견뎌 내지 못했다.
그런데 강우는 그야말로 손쉽게 놈의 공격을 막고, 손쉽게 놈을 벽에 처박아 버렸다.
처음 이승우가 주먹을 뻗을 때만 해도 긴장하던 그녀이지만, 그 결과를 확인하니 지금까지의 세월이 허탈할 지경이었다.
대체 저런 놈이 어디에 숨어 있던 거지?
심수련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환희에 찬 눈빛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저런 놈이 내 암살자 양성 수련을 받는다면…….’
실로 어마어마한 암살자가 태어날 듯했다.
아시아, 아니, 전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 암살자.
하지만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우는 여전히 이승우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그는 도통 먼저 움직일 줄 몰랐다.
그저 이승우의 반응을 살피고, 놈이 먼저 공격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것이 놈의 자존심을 건드리기 위함임을 아는 자는 이곳에 몇 없었다.
“네놈이 감히……!”
곧 이승우가 자신의 마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강우의 검은 마력이 복장을 완성시킨 것처럼, 놈의 주홍빛 마력도 서서히 하나의 갑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황금빛 갑주였다.
눈부시게 빛나는 두 개의 권갑과 한눈에도 퍽 단단해 보이는 황금빛 갑옷.
어느새 턱 아래까지 황금으로 뒤덮인 이승우의 눈이 번뜩였다.
“난 이승우다! 절대 무너지지 않아!”
자꾸만 자기 자신을 상기하는 게, 꼭 어린아이의 투정을 보는 듯했다.
“이야아아아!”
곧 이승우가 바닥을 박차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놈이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이 크게 부서지고, 땅이 울렸다.
또한 악을 쓰듯 지르는 고함 속에도 마력이 담겨 사방을 진동케 했다.
“네 이놈!”
흡사 황소와 같은 돌진이었다.
양손을 어깨너비로 벌린 이승우의 두 권갑에서 쉴 새 없이 주황빛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콰르르르르!
놈이 양손을 휘두르자, 주황 불꽃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강우의 눈을 혼란하게 했다.
사면을 가득 메운 주황 불꽃의 벽들.
주황빛 벽이 정신없이 타오르는 가운데, 이승우의 마력이 그 주변을 점차 잠식해 나갔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눈속임.
진짜는 곧 튀어나올 놈의 주먹일 터였다.
국내 각성자들 사이에선 일명 <폭렬강타>라고 불리는 이승우의 필살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찰나의 진공 현상과 함께 강우는 사방에서 옥좨 오는 마력을 느꼈다.
“크하하하! 죽어라!”
승리를 확신한 이승우의 웃음소리가 온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곧 놈의 권갑이 강우의 눈에 보였다.
거대한 주홍빛 화마를 뚫고 들어온 황금빛 권갑들.
그곳에서 또한 주홍 불길이 쉴 새 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콰과과과광!
두 개의 권갑이 부딪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갈기갈기 찢겨 나갈 것 같던 강우의 신체는 여전히 건재했다.
“…아니?!”
결과를 확인한 이승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사이, 주홍 불길 속에서 강우가 중얼거렸다.
“하도 이승우, 이승우하길래 궁금했는데… 고작 이 정도였군.”
“뭐?!”
“더 볼 것도 없겠어.”
“……!”
콰직!
곧 강우의 주먹이 이승우의 얼굴에 처박혔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