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테러리스트 (5)
<뢰(雷)>.
검은 벼락이 내리칠 때마다 수십의 풀 병사들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하지만 문제는 모든 녹림의 벽이 풀 병사가 된 탓에, 그 수가 거의 무한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설상가상 <역(力)>의 힘은 임가륜의 능력을 이어받은 풀 병사들에겐 먹히지 않았다.
콰과과과과!
<피바라기>를 휘둘러 전방으로 검은 마력을 퍼부은 강우는 풀 병사들이 다가오는 사이를 틈타 생각에 잠겼다.
‘균열에 갇혔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파훼법이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였다.
<데스 나이트>를 부를 수 있는 <사이트 스톤>의 세상도 아니거니와, 누군가에게 <사이트 스톤>을 맡기고 <데스 나이트>에게 해답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또한 <균열> 보스를 처치하고 나갈 수도 없었다.
자신이 곧 이곳의 보스였으니까.
콰득!
강우는 어느새 다가온 풀 병사들을 피해 뒤로 훌쩍 물러섰지만, 놈들은 집요하게 그를 쫓아왔다.
<쾌(快)>의 권능을 이어받은 놈들의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했다.
삽시간에 들이닥친 놈들의 할버드가 허공에서 번뜩이고, 놈들이 쏜 화살이 쉴 틈 없이 강우의 뒤를 노렸다.
‘이대로라면 끝이 없다.’
이건 소모전이었다.
풀 병사가 모두 소멸하거나, 자신의 마력이 전부 소멸하거나.
그러나 무한에 가까운 풀 병사들을 보아하니 그 승패가 어느 정도 가늠이 갔다.
이미 놈들의 수는 억 단위가 넘어갔으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균열을 갈라야 한다.’
바로 강제로 <균열>을 찢고 밖으로 나가는 것.
물론, 그 방법에 대해선 강우도 아는 바가 없었다.
실제로 <균열>을 스스로 찢고 나간 사례는 그도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험을 미루어 보았을 때, <균열>을 스스로 열고 나가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듯싶었다.
그만큼 ‘강하다면’ 말이다.
‘어차피 균열도 하나의 공간이다. 입구가 존재한다면, 출구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겠지.’
강우는 그 출구를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
‘그러려면…….’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만 했다.
이미 지금도 국내에선 강우를 따라올 자가 없지만, 그의 적은 일반적인 상대가 아니었다.
4차 각성자를 능가하는 마물들을 수하로 두고, 기억을 조작해 세상을 농락하고, 미지의 <균열>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존재였다.
그토록 강한 <데스 나이트>를 물리친 장본인이며, 시간 밖에 존재한다는 신들의 후손이었다.
인간들의 수준에서의 ‘강함’으로는 결코 상대할 수 없는 존재이며, 4차 각성, 5차 각성의 경지를 넘어 그 위의 단계에 닿아야만 상대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균열>을 가르는 것?
놈을 상대하려면 그런 건 제 손으로 코를 푸는 것만치 쉽게 만들어야 했다.
강우는 정신을 집중했다.
실로 오랜만에 겪는 수련이었다.
‘요즘 게을렀지.’
하루하루가 충격의 연속이었다.
알지 못하던 진실을 듣게 되고, 자신의 알던 세계가 얼마나 좁았는지 알게 됐으며, 자신이 적대하는 자가 얼마나 아득한 자리에 선 존재인지 느끼게 됐다.
그 충격 속에서 강우는 수련을 게을리했음을 인정했다.
‘어쩌면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는지도.’
석철을 죽였다.
사도 중 하나인 진중을 죽였으며, 호공의 분신과 변이자 부대를 손쉽게 제압했다.
임가륜 또한 몇 합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에게 패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이 석탈해를 상대할 수 있다는 근거는 되지 못했다.
자신은 오만했다.
<데스 나이트>의 시험을 통과했다고 해서 그보다 강함을 입증한 건 아니었다.
그런 존재조차 패한 적을 상대하려면서 수련을 게을리하다니.
그것이 오만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은 유아라가 3차 각성에 이르는 동안 성장이 멈춰 있었다.
<뢰(雷)>의 힘도, <역(力)>의 힘도.
모두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게 아니었다.
그저 상대의 노력을 빼앗아 온 것일 뿐.
그 또한 석탈해의 능력 중 일부일 뿐인데, 그것으로 석탈해를 상대하려 했다는 게 우스웠다.
‘안일했다.’
강우는 반성했다.
스스로를 자책하고 힐난했다.
미친 사람처럼 <피바라기>를 휘두르고, 정신없이 검은 마력을 퍼부었으며, 호흡조차 고르지 않고 풀 병사들을 쉴 새 없이 도륙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는 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석탈해 놈이 있는 곳까지 쉴 새 없이.’
콰득!
강우의 손길이 풀 병사 둘의 목을 가르고,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검은 마력이 사방의 적들을 불태웠다.
어느 순간부터 목 안에서 피비린내가 나기 시작했다.
벌써 그의 손길에 죽은 적은 수십만이 넘어갔지만, 아직도 남은 적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건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강우는 점차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의 걸음걸음마다, 동작 하나하나마다 미세한 규칙이 스며들었다.
마치 외워 둔 춤을 추듯 강우의 동작은 리듬감을 띠었다.
어느새 그의 몸에서 검은 마력이 꽃잎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과!
어느 순간부턴 <뢰(雷)>의 힘도 소멸했다.
<피바라기>가 빨아들인 피는 무한하지 않으므로, 끝이 존재하는 게 당연했다.
언젠가 삼킨 <미노타우르스>의 피가 이미 <피바라기>에 남아 있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강우는 개의치 않았다.
애초부터 <뢰(雷)>의 힘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슥! 슥! 슥!
<피바라기>가 쉴 새 없이 춤을 췄다.
강우의 이마엔 오랜만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호흡은 가빠졌다.
그러나 오히려 그럴수록 검무(劍舞)는 더 활력을 얻었다.
그의 몸에서 흩날리던 검은 꽃잎들이 점차 하나의 형상을 갖춰가고 있었다.
그것은 검은 도포였다.
상복(喪服)이었다.
망자들의 옷이었으며, 또 하나의 죽음이었다.
저승사자였다.
사신(死神), 그 자체였다.
‘더, 더, 더!’
강우의 <피바라기>가 연신 번뜩이고, 검은 불길에 닿은 풀 병사들의 몸이 산화했다.
하지만 그의 검무는 현란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요했다.
들리는 소리는 강우의 작은 호흡과 검의 소리뿐.
그의 검은 마력은 산화하는 풀 병사들의 소리조차 집어삼켰다.
그들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사신의 옷이 완성되었다.
“…….”
강우는 검은 도포를 펄럭이며 여전히 끝없이 펼쳐진 적들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자신은 지쳤으나, 적들에겐 숨이 없으며, 당연히 지칠 체력도 없었다.
그러나 강우의 기세는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매서워졌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달라진 자신의 복장을 내려다보았다.
정교하게 엮이고 엮여 형상을 갖춘 자신의 검은 마력.
분명한 4차 각성이었다.
‘부족해.’
하지만 아직이다.
4차 각성을 완벽히 이루었다고 보기에는 부족했다.
그는 자신이 들고 있는 <피바라기>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검.
과거, 4차 각성을 이루었을 때도 <피바라기>는 그 형태를 잃지 않았다.
<피바라기>는 강우의 오랜 파트너였다.
하지만 그때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것이 자신의 ‘벽’이었음을.
‘석철에겐 철혈의 추가, 데스 나이트에겐 정체불명의 대검이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검은 무엇인가.
강우의 아까부터 몸속을 가득 채운 검은 마력을 서서히 <피바라기>에 불어넣었다.
형(形)이라는 틀에 갇혀서는 평생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석탈해는 5차 각성을 ‘새로운 우주를 품는 경지’라 말했다.
놈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순 없지만, 놈이 <균열>과 각성에 대해 자신보다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이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균열>은 이미 놈이 겪어 온 세상이니까.
놈이 만들어 온 세상에 그보다 더한 지식으로 따라갈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건, 바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약함을 넘어 강해지는 것이다.
츠츠츠츠츳!
<피바라기>로 흘러 들어간 검은 마력의 양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과연 <피바라기>는 자신의 마력을 어디까지 견뎌 낼 수 있을까.
그그그극―!
검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며, 검신에 점차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강우의 눈빛이 번뜩였다.
“……!”
그 매서운 기세에 감정이 없어 보이는 풀 병사들도 몸을 떨었다.
그의 앞에서 놈들은 그야말로 추풍낙엽(秋風落葉)이었다.
콰드드드득!
칼질 한 번에 수천의 풀 병사가 갈라지고, 방출한 검은 마력에 수만의 풀 병사가 그대로 증발했다.
몸에 남은 마력이 점차 동나고 있었다.
그러나 강우는 계속해서 마력을 방출하고, 남은 마력을 <피바라기>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마침내.
콰직!
강우의 마력을 견디지 못한 <피바라기>가 산산이 깨져 나갔다.
그 파편이 유리조각처럼 반짝이고, <피바라기>가 머금은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
강우는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피바라기>는 깨져 나갔지만, 여전히 자신의 손에는 <피바라기>가 들려 있었다.
검붉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진(眞) 피바라기>.
강우는 그것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수년 만에 확인한 파트너의 진짜 모습이었다.
‘이게… 네 본모습이었구나.’
비로소 강우에게도 자신만의 <마력 무구>가 생겨난 것이다.
진정한 4차 각성의 경지였다.
정적.
강우의 <피바라기>가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자, 풀 병사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비록 강우로 인해 소멸했지만, 천 년의 세월을 살아온 <피바라기>의 존재는 마물들 사이에서도 극상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한낱 미물들이 함부로 대할 존재가 아니었다.
터벅, 터벅.
그리고 깊은 정적 속에서 하나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 드넓은 장소에서도 선명하게 들리는 발소리였다.
“…….”
언제부터 있었을까.
강우는 고개를 들어 이쪽으로 다가오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입꼬리에 묘한 미소가 걸린 사내.
붉은 도포를 휘날리며 다가오는 그는 다름 아닌 석탈해였다.
다른 시간선에서 온 <데스 나이트>와 달리 이곳을 살아가는 진짜 석탈해였다.
이윽고 불과 스무 걸음을 앞두고 멈춰 선 놈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당신이었군요.]
공간을 나직이 울리는 음성.
육성이 아닌 걸 보니, 놈은 분신이나 환영이라는 뜻이었다.
놈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보낸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놀라게 할 생각이었다면, 성공했습니다. 정말 놀랐거든요. 석철의 눈물이라니… 진귀한 구경이었습니다.]
석철의 죽음에도 석탈해는 담담한 기색이었다.
강우는 묵묵히 놈의 이야기를 들으며 알 수 없는 감정이 속에서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놈이 물었다.
[당신, 시간선을 넘어왔지요?]
“…….”
[흥미롭네요. 지금의 저는 아직 시간선을 넘을 힘이 없거든요. 대체 어떻게 넘어왔는지 무척이나 궁금하지만… 묻진 않겠습니다. 알아 가는 재미가 있을 테니까요. 그보다, 당신이 살던 곳의 저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재미.
놈은 또 다시 이곳에서 재미를 논하고 있었다.
강우가 대답이 없자, 놈이 아차 싶은 눈치로 자문자답했다.
[아아, 하긴. 좋은 관계였으면 여기까지 왔을 리 없겠네요.]
더 이상 놈의 이야기를 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강우는 새롭게 태어난 자신의 검을 들었다.
“기다려라. 곧 알게 해 줄 테니.”
그러자 놈이 웃었다.
[아무렴요. 비록 지금은 바빠서 당신을 직접 만나지 못하지만, 우린 곧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당신을 위한 선물을 준비 중이거든요. 부디 그때까지 안녕하시길.]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진(眞) 피바라기>가 허공을 긋자, 석탈해의 환영을 가르고, 어둠을 갈랐다.
콰드드드드득!
곧 차원이 갈라졌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