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테러리스트 (2)
청익이 이승우와 마주하기 직전의 시간.
강우는 인천에 있었다.
<미궁>이 사라진 섬 쪽을 감시하던 황한수에게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섬이 있던 자리에 은은한 초록빛을 비치는 <균열>이 나타나 있었다.
강우는 그곳에 조사단이 붙기 전에 처리할 생각이었다.
만석을 통해 정식으로 입찰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저 <균열>이 언제까지 존재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드드드드―
검계를 통해 어선에 타게 된 강우는 <균열> 쪽으로 향했다.
석철과의 대결로 섬이 완전히 침몰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확인해 보니 수백 명이 넉넉하게 서 있을 만큼은 남아 있었다.
이윽고 섬에 도착한 강우는 선장을 뒤로한 채 <균열>로 향했다.
과연 이곳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달아난 임가륜도 있을까?
강우는 <균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녹색 미궁> 안은 이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배경으로 다시금 자라난 녹림의 벽이 시야를 온통 가리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한 어둠.
강우는 마력으로 시력을 강화하며 녹림의 벽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길잡이를 하던 ‘뢰’의 사도, 진중은 없지만, 길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벌써부터 하나의 마력이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강우는 그쪽으로 걸어 나갔다.
돌아간다 싶으면 마력으로 녹림의 벽을 태우고 스스로 길을 개척했다.
특별히 수상한 건 느끼지 못했다.
굳이 언급하자면 벽이 손상됐음에도 풀 병사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 정도?
그렇게 얼마나 더 걸었을까.
강우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생명체였던’ 것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변종 노움>의 시체였다.
수풀에 발목이 감긴 놈은 다리가 들린 채 누워 있었는데, 이미 숨통이 끊긴 지 오래인 듯 상당히 부패가 진행된 상태였다.
강우는 코끝을 찌르는 고약한 냄새를 맡으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면 입구 쪽에서만도 수십의 <노움>들이 죽었을 텐데, 누군가 청소라도 한 듯 깨끗했다.
그때 내리친 벼락에 모두 증발해 버렸든가, 녹림의 벽이 시체를 전부 집어삼켰든가, 둘 중 하나였다.
“…….”
하지만 그런 사실도 강우의 관심을 크게 끌지는 못했다.
<변종 노움>의 시체를 지나친 그는 <미궁> 안으로 더욱더 깊숙이 들어갔다.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부터 풍겨 온 마력이 점차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석철 용병단과 들어온 그날, 이곳의 보스는 죽었다.
리라를 켜던 소녀가 죽고, 그녀가 다루던 골렘이 죽었으며, 홍련이 죽고, 만드라고라를 씹어 먹던 <정예 변종 노움>도 죽었다.
본래라면 이곳은 소멸했어야 할 <균열>.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새로운 보스가 탄생했고, 다시금 <균열>이 생성됐다.
강우는 그 새로운 보스가 지금 생생히 느껴지는 마력의 주인, 임가륜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약 20분쯤 더 걸었을 무렵, 드디어 강우는 이곳의 새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
잿빛 갈기를 길게 늘어뜨린 <늑대인간>.
예상대로 놈은 임가륜이었다.
놈이 수풀이 우거진 넓은 공터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우를 발견한 놈의 입이 그르렁 소리를 냈다.
“강우 공, 오랜만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공손한 말투.
하지만 강우는 대답 대신 <피바라기>에 검은 불길을 일으켰다.
이곳에 온 목표는 단 하나.
바로 눈앞의 저놈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 당분간은 날 볼 수 없을 것이다. 너에게 많은 걸 들려준 이상, 더 배려할 필요는 없겠지. 난 널 탑으로 들일 준비를 할 테니, 넌 탑에 오를 준비를 해라.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너는 이 탑의 끝을 봐야만 할 것이다.
<데스 나이트>는 다시 만나는 날 탑의 끝을 볼 수 있을 거라 말했다.
그 말은 탑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다신 세상을 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탑의 끝을 보지 못하고선 그가 내보내 주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그전까지 최대한 이곳에서의 일을 마쳐야 했다.
최대한 많은 사도를 죽이고, 그 권능을 빼앗아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최초의 석탈해든 최후의 석탈해든 모조리 도륙 낼 수 있을 테니.
신라는 겉핥기에 불과했다.
신라를 망하게 하는 건, 석탈해를 망하게 하는 게 아니었다.
신라 또한 이카루스처럼 이용당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사도와 놈의 심장에 칼을 꽂는 것.
그것만이 진정한 복수의 완성이었다.
츠츠츠츠츳!
강우의 안광이 번뜩이나 싶던 찰나, 단번에 생성된 <검은 고리> 두 개가 거친 스파크를 튕겼다.
‘속전속결.’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할 이유는 없다.
강우는 한달음에 놈에게 달려들었다.
강우의 <피바라기>에 맞서 임가륜이 마력으로 강화한 발톱을 휘둘렀지만, 석철의 힘을 다루는 강우를 놈이 감당한 순 없었다.
콰과과과과!
대번에 10미터 가까이 밀려난 놈의 앞으로 돌바닥이 부서지며 길이 생겨났다.
‘…무슨 힘이?!’
일전과는 또 달라진 강우의 힘에 임가륜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공격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임가륜이 눈 깜짝하는 사이, 어느새 10미터의 간격을 좁혀 온 강우의 <피바라기>가 번뜩였다.
스각!
차가운 감촉과 함께 살점이 떨어져 나간 임가륜의 어깨에서 피가 튀고 털이 흩날렸다.
이어서 역수로 쥔 단검이 사선으로 솟구쳤다.
놈은 간신히 허리를 틀어 피해 냈지만, 강우는 집요했다.
한동안 일방적으로 피를 보는 공방이 계속되었다.
벌써 네 번이나 찔리고 베인 임가륜이 말했다.
“석철이 죽었더군요.”
하지만 대화 속에서도 공격은 계속되었다.
사방을 장악한 검은 마력이 임가륜의 몸을 옥죄고, 궤적을 예상할 수 없는 단검이 연신 그의 살점을 잘라 냈다.
그 성난 기류 속에서 임가륜이 물었다.
“당신의 짓입니까?”
서걱!
<피바라기>가 그 대답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대각선으로 임가륜의 가슴을 베었다.
그도 이미 <죽음의 고리>의 최대치인 두 개를 꺼내 들었지만, 강우의 움직임을 도무지 따라갈 순 없었다.
<야수병>, 그것도 한때 ‘쾌(快)’의 사도였던 자신을 속도로 몰아붙이는 인간이라니.
뒤로 크게 물러난 임가륜은 빠르게 가슴의 상처를 회복하며 눈앞의 강우를 경이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더 물을 것도 없겠습니다. 분명한 석철의 힘이로군요. 정말이지, 강우 공이 사도가 됐으면 진심으로 즐거웠을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제라도…….”
하지만 이번에도 그에게 돌아온 건 대답 없는 공격이었다.
강우가 팔을 휘젓자, 그의 등 뒤로 검은 마력이 일렁이더니, 이내 수백 개의 검은 쐐기가 튀어나왔다.
‘검은 칼날의 비’라고 부르면 딱 알맞을 것 같은 광경이었다.
눈앞을 새카맣게 메운 쐐기들이 삽시간에 쇄도하며 작은 미사일처럼 떨어져 내렸다.
콰과과과광!
임가륜이 서 있던 바닥과 주변이 일제히 터져 나가며 그 파편이 사정없이 비산했다.
수풀이 풍압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꺾여 나가고, 녹림의 벽이 불타며 연신 검은 연기를 뿜었다.
간신히 죽음을 면한 임가륜이 다시금 상처를 회복하며 물었다.
“못 본 새 벙어리라도 돼 버린 겁니까?”
“…귀찮군.”
강우는 이리저리 달아나기만 하는 임가륜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놈은 도무지 제대로 싸울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일례로, 놈은 여전히 쾌(快)의 권능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과가 달라질 건 없었다.
강우의 두 눈이 번뜩였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죽어라.”
팟!
강우의 신형이 앞으로 튀어나가자, 그가 서 있던 바닥이 깊게 파였다.
대번에 거칠어진 기세에 흠칫한 임가륜이 황급히 양손을 X자로 그으며 마력을 칼날처럼 사용했지만, 강우는 놈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피하지 않는다.’
강우는 놈에게 더 이상 달아날 틈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검은 마력을 몸 앞으로 방출해 보호막처럼 사용한 뒤, 놈의 공격을 그대로 정면 돌파했다.
강우의 마력 앞에서 임가륜의 마력은 힘은 잃고 그 즉시 갈려 나갔다.
“……!”
자신의 공격을 무시하고 들어온 강우의 안광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임가륜의 등골이 순간 서늘해졌다.
하지만 이미 달아나기는 늦었다.
서걱―!
곧 목에서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아이러니한 감각이 느껴졌다.
목 아래에서 느껴지는 허전함.
단칼에 잘린 임가륜의 목이 바닥을 구르고,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
상대를 제압한 강우는 천천히 놈의 머리를 향해 걸어갔다.
생명력 강한 <야수병> 출신답게, 임가륜은 머리가 잘렸음에도 살아 있었다.
놈이 미소 띤 얼굴로 강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목이 없음에도 놈의 입에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정하겠습니다. 도무지 강우 공을 감당할 수가 없군요.”
강우는 잠자코 놈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차피 목이 잘린 놈이 이곳에서 살아 나갈 방도는 없었으니까.
인간은 종종 죽음을 앞두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전하곤 한다.
강우는 행여나 놈도 그러지 않을까 싶어 기다리는 중이었다.
“크크, 궁금하지 않습니까? 제가 왜 여기서 당신을 기다리고, 죽임을 당하는지?”
임가륜은 이번 싸움에서 쾌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점을 고려하면 ‘죽임을 당하다’라는 표현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권능을 사용했다 한들 죽음을 피할 순 없었겠지만.
권능을 사용하지 않기는 강우도 마찬가지였다.
놈이 말을 계속했다.
“저는 고민했습니다. 이곳에서 줄곧 기다렸지만, 제 주인에게서 연락이 오질 않았거든요. 제 주인에게 있어 균열은 바깥세상보다도 더 자유로운 곳입니다. 하지만 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아무래도 주인은 제 대체재를 찾은 듯하군요.”
임가륜은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존재’라고 칭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다거나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
“뭐, 한낱 늑대였던 제가 여기까지 즐겼으니 여한은 없습니다만…….”
임가륜이 강우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이왕 죽는 거, 한 번쯤 발악해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절 거둬 준 주인에게 보답도 좀 하고 말이죠.”
“…….”
강우는 주변에서 낯익은 기척을 읽었다.
‘놈의 권능은 사라진 게 아니었군.’
사방을 메웠던 녹림의 벽이 점차 허물어지는 게 보였다.
놈이 희미하게 웃었다.
“부디 즐거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아, 조릭 공에게도 안부 전해 주십시오. 멕시코에선 참 즐거웠다고 말입니다.”
임가륜의 생명의 불씨가 점차 꺼져 가고 있었다.
강우는 죽어 가는 놈을 뒤로한 채 점차 주변을 장악해 나가는 풀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녹림의 벽 전체가 허물어지고, 병사들이 태어나고 있었다.
스슥.
게다가 놈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임가륜은 자신의 권능을 이 <미궁>에 바친 듯했다.
그리하여 이 <미궁>은 쾌(快), 그 자체가 되었다.
‘권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함인가.’
풀 병사에겐 피가 없으니, 강우가 <피바라기>로 그 힘을 흡수할 수도 없을 터.
아마 임가륜은 거기까지도 생각해 둔 듯했다.
어느새 빼곡히 주변을 메운 수백만의 풀 병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강우에게 겨누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가시군.’
<뢰(雷)>와 <역(力)>의 힘을 이용해 풀 병사들을 따돌리고 <미궁>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강우는 자신이 밖으로 나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강동구에서 만난 <사이트 스톤> 때와는 다른 경우였다.
‘이건…….’
포털을 넘지 못한 강우는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탁한 마기를 감지했다.
분명한 마물의 기운이었다.
‘내가… 임가륜 대신이 된 건가?’
그랬다.
강우 자신이 이번 <미궁>의 보스가 된 것이다.
임가륜은 마물이라서 이곳의 보스가 된 게 아니었다.
이곳에 남은 가장 강한 존재이기에 보스가 된 것이지.
<녹색 미궁>의 숨겨진 비밀.
이곳은 보스를 스스로 택하는 <균열>이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