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손님 (4)
연합의 부적격 판정.
황 노인이 우려하던 대로 대한민국은 흔들렸다.
우선 부적격 판정이 내려진 다음 날부터 주가가 꿈틀댄 것이다.
하루 만에 지수가 마이너스 10% 가까이 폭락하며 불길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누군가는 가지고 있던 돈을 부랴부랴 환전하고, 부동산엔 내놓은 매물이 급증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부적격 판정이 아직 100% 결정 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연합에게 <균열 관리> 판정을 받은 국가는 그 결과에 대해 1회에 한하여 항소할 기회를 가졌다.
당연히 한국은 연합의 판정에 항소했고, 일주일이라는 귀중한 유예기간을 얻었다.
이 기간 동안에 판정을 뒤집을 만한 개선 방안을 가져오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균열 관리>, 즉 안정 등급 ‘C-’등급으로 주변국의 관리를 받게 될 터였다.
같은 시각, 만석의 길드 사무실.
아침부터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대던 로드리게가 슬며시 물었다.
“…길드장님, 주식을 좀 사 볼까요? 사람들이 자꾸 팔라고 난리임니다. 이럴 때는 보통 사야 한다고 하던데…….”
“아서라. 어디까지 떨어질 줄 알고.”
하지만 오만석의 만류에도 로드리게는 아쉬운 듯 핸드폰 속 주가 창을 한참이나 힐끔거렸다.
그 모습에 오만석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려는지…….’
정신없이 흘러간 한 달이었다.
그는 처음 유아라에게서 연락을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 전국에 브레이크가 일어날 거예요.
그때만 해도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브레이크가 하나만 일어나도 큰일인데, 전국에서 일어난다고?
5대 길드가 그토록 <균열> 관리에 허술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만석에게 경상도와 전북 쪽 브레이크 토벌을 부탁했다.
그리고…….
브레이크는 정말로 일어났다.
오만석이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날로 정체불명의 파견인 넷이 나와 만석에 합류했다.
하나하나가 일류 용병인가 싶을 정도의 실력자들.
그들은 만석이 브레이크를 막는 것을 도왔고, 심지어 대뜸 울산으로 가자더니, 이카루스가 놓친 인어를 잡는 것에도 일조했다.
덕분에 만석의 위상은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분명 같은 집단이다.’
오만석은 그들이 <백귀 균열>에서 만난 두 남녀처럼 가면을 쓰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자신들은 그 남자를 돕기로 하지 않았던가.
강우는 생명의 은인이자, 만석이 계속 존재할 수 있게 해 준, 하늘 같은 구원자였다.
<백귀 균열>에서 주워다 판 <마석> 값만 해도 2차 각성자 영입은 물론, 길드를 몇 년이나 운영할 수 있는 돈이었으니까.
명성은 덤이었다.
덕분에 만석은 랭킹이 두 단계나 올라 현재 15위에 랭크돼 있었다.
하지만 누가 그냥 주는 떡은 없다고 했던가.
오만석은 정체불명의 집단에게서 두 가지 미션을 더 건네받게 되었다.
하나는 이카루스를 도발하는 것.
다른 하나는 만석의 이름을 빌려주는 것.
‘대체 뭘 어쩌려고…….’
이승우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
그것이 오만석을 망설이게 했지만, 그보다는 <백귀 균열>에서 본 두 남녀의 무용을 더 믿었다.
그 무시무시한 <백귀>를 일격에 박살 내던 사내.
설사 이승우가 직접 온다고 해도 그 거인 백귀를 그토록 쉽게 처리하진 못할 터였다.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
그때, 오만석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 번호가 가려진, 익숙한 전화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접니다.]
“…예.”
그는 얼마 전부터 유아라 대신 연락을 맡은 황한수였다.
대뜸 오만석에게 연락한 그가 말했다.
[저번에 길드 이름을 빌린다고 했죠?]
“예. 그런데 이름을 빌린다는 게 도통 무슨 뜻인지…….”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활약할 길드 이름이 필요한데, 만석의 이름을 좀 쓰려고요. 특별히 나쁜 일은 없을 겁니다.]
특별히 나쁜 일이 없다는 건, 특별히 좋은 일도 없다는 건가?
오만석이 그 뜻을 헤아리는 사이, 황한수가 말을 이었다.
[며칠 안으로 만석은 랭킹 10위권에 들어설 겁니다.]
“…예?”
뜬금없는 말에 오만석이 새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랭킹 17위에서 15위가 되는 것과 랭킹 11위가 10위가 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위로 올라갈수록 순위권 싸움이 점차 치열해지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10위권 안은 알게 모르게 길드 간의 알력 싸움도 일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5위권에 들어갈 수도 있고요. 그 정도면 합당한 거래가 될 것 같은데…….]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갑자기 만석이 5위권에 들어가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 이 말을 먼저 했어야 하는데.]
“……?”
어리둥절한 오만석이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우두커니 서 있는 사이, 황한수가 말을 계속했다.
[연합이 부적격 판정 내린 거 보셨죠? 곧 뒤집기가 시작될 겁니다. 그와 동시에 이카루스와의 전쟁도 시작될 거고요. 그… 필요할 땐 언제든 불러 달라고 했다면서요? 그럼 괜찮으시겠죠?]
‘뒤집기? 이카루스와의 전쟁?’
“무슨 일임니까? 길드장님도 누가 주식 사랍니까?”
벙찐 길드장의 표정은 오랜만이기에, 옆에 서 있던 로드리게가 그런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그사이, 황한수가 쐐기를 박았다.
[우린 이카루스를 없앨 겁니다. 만석은 이카루스와 대적하는 대표 길드가 될 거고요. 굳이 말하면, 만석은 뒤집개가 되겠네요. 아시죠? 프라이팬에서 음식을 뒤집을 때 쓰는…….]
“…뭐라고요?”
쿵!
오만석은 가슴속으로 무언가 철렁 떨어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기분이 들었다.
* * *
백호 길드의 접견실.
2주 만에 다시 모인 5대 길드장들은 모두가 근심 어린 표정이었다.
이카루스의 수장 이승우는 보이지 않았다.
말을 빌리자면, 현재 연합의 판정을 되돌리기 위해 무지막지하게 ‘바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실상은 뻔질나게 오동 부길드장을 만나고 다니는 것일 터였다.
손깍지를 낀 채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 있던 김인표가 분통을 터뜨렸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그의 얼굴이 흥분으로 급격히 붉어졌다.
“아무리 이카루스가 담당한 분야가 많다지만, 고작 이유가 이카루스의 활동이 축소되기 때문이라니… 이건 대놓고 이카루스를 밀어주려는 수작 아닙니까?”
연합이 통보한 ‘부적격’ 사유는 황당하게도 ‘이카루스의 부재’였다.
이승우가 국내 <균열>에서 손을 떼겠다는 친필 각서를 쓰기 무섭게 연합에서 그것에 딴지를 걸고 넘어간 것이다.
이미 이카루스의 사과문도 홈페이지에 올라간 상태.
이대로 기자회견까지 열린다면, 이카루스는 연합의 결정에 쐐기를 박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카루스를 비난하던 여론도 막상 부적격 판정이 나자 5대 길드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하나둘 내고 있었다.
거기에 이카루스의 입김이 있음은 분명한 일.
한명회가 사라진 이카루스도 이런 수작질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아까부터 말이 없는 유지태를 보며 김인표가 답답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길래 내가 뭐랬습니까! 분명 이승우 그놈이 연합을 부른 거라니까요! 담당자로 오동 부길드장이 온 걸 보면 모르겠습니까? 이거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말입니다! 그놈이 분명 또 뭔갈 넘겨준 게 분명하다니까!”
흥분한 김인표가 씩씩대자, 서유리와 송민호가 양옆에서 그를 말렸다.
간신히 진정한 김인표가 자리에 다시 앉는 사이, 서유리도 착잡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연합의 영향력을 간과했어. 이카루스가 설마 연합을 이용할 줄이야.’
의욕이 너무 앞선 탓일까.
이카루스만 쓰러뜨리면 충분히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들의 뿌리는 예상보다 깊었다.
오동 길드에, 국제 헌터 연합까지.
이카루스는 그간 타 길드의 해외 활동을 막은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새로운 방법이 필요해.’
서유리는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유지태는 여전히 생각 많은 얼굴로 침묵 중이고, 김인표는 씩씩댔으며, 송민호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남자라면…….’
서유리는 문득 한 남자를 떠올렸다.
강동구 <균열>에서 스톰을 구해 준 남자.
그는 소문의 ‘천공 바위’를 소환한 남자일 뿐만 아니라, 실로 어마어마한 무위를 지닌 존재였다.
스톰 전체가 감당하지 못한 적을 홀로 처리한 그가 아니던가.
어찌나 인상적이었는지, 검은 정장을 휘날리며 적들을 내려다보던 모습이 눈앞에 훤했다.
게다가 그가 부리던 사내도 보통은 아닌 듯했다.
자신이라면 그를 상대할 수 있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정도 실력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연합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을 듯했다.
아니, 오히려 한국의 안전 등급은 수직으로 상승할 것이다.
전 세계에 알려진 4차 각성자는 스물 남짓.
그중 한국에 셋이나 존재한다면, 위상이 달라질 테니까.
하지만 그들을 찾기란 어려워 보였다.
강동구에서도 그들을 샅샅이 찾아봤지만, 도통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은밀히 그 얼굴을 찾아봐도 마찬가지였다.
‘음지에서 활동하는 용병 길드일까?’
서유리는 어쩌면 그들이 과거 권기한을 죽인 자들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그 뒤로 접견실 안의 침묵은 계속됐고, 방도를 찾지 못한 채 하염없이 시간만 흘렀다.
그런데 그때였다.
유지태의 경호와 비서직을 겸한 사내가 접견실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오더니, 그에게 무언가를 속닥였다.
“…뭐?”
그러자 유지태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게 긍정인지, 부정의 의미인지 알 수 있는 자는 이곳에 없었다.
고민하던 그가 말했다.
“들어오라고 해.”
유지태의 허락을 받은 비서 사내가 밖으로 나가자, 김인표가 물었다.
“누가 또 옵니까?”
“…설명하기 어렵군요. 직접 보고 이야기하도록 하죠.”
비서 사내가 돌아오기까지는 2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곧 그를 따라 세 명의 남자 안으로 들어왔다.
오만석과 로드리게, 그리고…….
‘저 옷은……?’
상대를 확인한 서유리의 동공이 커졌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옷이었다.
여전히 검은 정장을 입은 강우가 그들의 눈앞에 서 있었다.
“…….”
졸지에 5대 길드장들을 만나게 된 오만석과 로드리게가 움츠러드는 사이, 강우는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긴 앞머리로 반쯤 가려진 삼백안이 찬찬히 주변의 길드장들을 살피고, 마지막으로 그 시선이 서유리에게 닿았다.
‘…아!’
하지만 서유리가 느낀 것과 달리, 그건 찰나에 불과했다.
그는 박도진에게서 받은 길드장들에 관한 설명과 얼굴을 비교해 보는 중이었다.
그때, 소파에서 그를 올려다보던 김인표가 가장 먼저 몸을 일으키며 유지태의 비서에게 물었다.
“누구야?”
“그게…….”
비서 사내는 선뜻 설명하지 못하고 머뭇댔다.
그러나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강우가 알아서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곧 그의 묵직한 음성이 접견실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한강우다. 만석의 이사직을 맡고 있지.”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