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손님 (3)
이카루스의 접견실.
브레이크 이후로 처음 열린 소집에 5대 길드장들이 모두 날카로운 얼굴로 접견실에 앉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번에는 이승우가 지각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
길드장이 된 이후, 처음으로 그가 다른 길드장들보다 먼저 접견실에 도착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마지막으로 백호 길드장 유지태가 도착할 때까지, 접견실의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침내 모두가 자리에 앉을 무렵, 김인표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술을 뗐다.
“통 소식이 없길래 해외로라도 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당당한 얼굴이군그래?”
그러자 이승우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제가 달아날 이유는 없습니다. 브레이크는 확실히 우리 실수였지만, 그야말로 실수일 뿐. 잘못을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우리 이카루스니까요.”
“하, ‘저는 양심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잘도 지껄이는군.”
“…….”
그러자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유지태가 이승우를 노려보며 말했다.
“단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으십시오.”
담담한 어조였으나, 그 안에 담긴 분노는 선명했다.
수긍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몸을 일으킬 기세였다.
“말씀하시죠.”
“하나, 오늘부로 이카루스는 균열 분배에서 제외될 겁니다. 만약 아직도 입찰에 등록되지 않은 균열이 있다면, 발견 즉시 이카루스에게 그 비용이 청구될 겁니다. 또한 브레이크 때 입은 국가적 피해도 전부 이카루스가 책임져야 합니다.”
“…….”
“둘, 이카루스는 이번 브레이크 사태에 대해 해명하고,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합니다.”
“…….”
“셋.”
유지태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모든 일이 끝나면, 이카루스는 해체합니다.”
“…….”
“이승우 길드장은 사죄와 봉사 차원에서 국경에 배치될 겁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명성을 쌓을 수도 있겠죠. 그 활약에 따른 수익과 급여는 브레이크 사태 때 입은 피해액을 충당하는 데 쓰일 거고요.”
이승우가 묵묵히 듣는 가운데, 유지태의 말은 계속됐다.
“이미 다른 길드장들과는 협의가 끝났습니다. 이카루스가 해체되면 국경은 각 길드가 돌아가면서 맡게 될 겁니다. 당연히 처음에는 이카루스보다 못 하겠지만, 우리는 이카루스와 달리 협력하고…….”
“…풉.”
웃음소리.
그것은 분명한 웃음소리였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이승우가 웃음을 터트린 것이다.
순간의 정적과 함께 모두가 이승우를 미친 사람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
입을 작게 벌린 유지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지금… 웃었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큰 개소리를 들어서요. 언제부터 백호가 개가 됐는지 정말 통탄을…….”
“이승우!”
쾅!
유지태의 주먹이 접견실 탁자를 부쉈다.
어느새 얼굴이 호랑이처럼 일그러진 그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지금 모두가 엄청나게 참고 있어! 네놈이 저지른 부정들을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고! 그런데도 예의를 차려서 스스로 물러서게 만들려는 건, 네놈이 대단해서가 아니야!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에 똥물을 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러자 이승우도 유지태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여러분이 우리 이카루스를 배려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군요.”
“정말…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거냐?”
유지태는 허탈한 얼굴이었다.
오늘 소집 연락이 왔을 때만 해도 일말의 기대를 품은 그였다.
이카루스의 진실한 해명과 사명, 그리고 자진 사퇴.
당연히 오늘의 요구도 담담히 받아들일 줄 알았다.
하지만 이승우는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미친놈이었다.
그간의 명성에서 온 아집 때문인가?
이승우가 웃으며 말했다.
“배려라는 건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것이지, 약자가 강자에게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삐이이이이이!
그가 슬며시 마력을 내비치자, 접견실에 설치된 마력 감지기가 큰 소리를 냈다.
요란한 사이렌이 이카루스의 온 건물을 울리고, 당황한 직원들의 비명과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다른 길드장들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김인표도 주먹을 쥔 채 나섰다.
“미친! 여기서 한바탕 해보자는 거냐?”
서유리도 양손을 이승우에게 겨누며 말했다.
“이승우 길드장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이곳 모두를 상대할 순 없습니다. 괜한 희생 말고 자리에 앉으시죠.”
팽팽해진 긴장감이 당겨지다 못해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했다.
이 긴장이 끊어지는 순간, 이카루스의 빌딩은 물론, 일대의 죄 없는 사람들도 큰 피해를 보게 될 터였다.
그걸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눈치를 살피던 송학의 송민호도 그들을 만류했다.
“다, 다들 너무 흥분했습니다! 일단 다들 진정하세요! 이, 이승우 길드장도 정말 여기서 싸울 생각은 아니실 겁니다!”
그의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이 중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자신은 당장 가루가 돼 사라질지도 모를 일.
그가 겁에 질리는 것도 당연했다.
벌써부터 주변을 메운 마력들에 숨이 막혀 오고 있었다.
유지태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이승우, 마력을 거둬.”
“…….”
다행히 이승우가 폭주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건물에 설치된 마력 정화 장치의 한계치에 다다르기 직전, 마력을 거두었고, 그제야 다른 길드장들도 안도하며 마력을 갈무리했다.
어느새 경보 장치의 소음도 멎어 있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카루스가 해체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모두가 노려보는 가운데, 이승우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책임을 지겠습니다.”
“어떤 책임을 지겠다는 거지?”
유지태의 물음에 이승우가 답했다.
“곧 평가단이 올 겁니다. 이번 브레이크 사태로 국제 헌터 연합에서 조사를 나온다고 했습니다. 당장 다음 주에요. 만약 연합으로부터 균열 관리 부적격 판정을 받게 되면, 우리는 같은 회원국인 중국이나 일본의 통제를 받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이었다.
국제 헌터 연합의 판단은 실로 절대적이라, 부적격 판정을 받으면 그 국가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연합을 탈퇴하거나, 연합의 도움을 받거나.
하지만 연합의 도움을 받게 되면 자주국가로서의 권한이 대폭 축소됐다.
아마도 중국이 북한을 이용하듯, 대한민국을 지원하게 될 국가는 철저히 한국을 <균열> 사냥터로 이용할 게 빤했다.
“우리도 북한과 별다를 바 없어지는 것이죠.”
“…….”
모두가 이승우의 말에 침묵을 지켰다.
그만큼 사태가 위중한 것이다.
연합이 벌써 움직였을 줄이야…….
이카루스가 사라져도 한국은 지킬 수 있겠지만, 연합의 판단에까지 거스르긴 어려웠다.
국제 헌터 연합.
말이 연합이지, 그곳은 전쟁터였다.
그곳엔 호시탐탐 타국을 노리는 늑대들이 많았다.
만약 연합에서 그나마 목소리를 내던 이카루스가 사라진다면?
그만큼 위상을 쌓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것마저도 감수하기로 한 5대 길드장들이지만, 막상 사태가 눈앞에 닥치자 섣불리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서유리가 목소리를 냈다.
“이카루스가 없으면 연합을 상대하기 어려운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미 감안하고 있던 일이에요. 지금이 독점적인 체제를 바꿀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다시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쉽지 않겠지만, 연합은 잠시 탈퇴했다가 국내가 안정화되면 다시 가입해도 될 테고요. 지금은 자국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때입니다.”
김인표도 거들었다.
“언제까지 이카루스의 꽁무니만 따라다닐 겁니까? 저놈들은 타 길드의 해외 활동도 규제한 놈들입니다. 유지태 길드장님, 이번에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저 세 치 혀에 또 놀아날 겁니까? 분명히 연합도 저 이승우 저놈이 먼저 불렀을 거라고요.”
개인 서열은 김인표가 2위지만, 대한민국에서 이카루스와 견줄 세력은 2위 백호 길드였다.
자연스럽게 모두가 유지태의 결정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신중했다.
“책임을 지겠다는 건, 적격 판정을 받게 하겠다는 건가?”
“물론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하신 균열 분배에서도 일체 손을 떼겠습니다. 국내 균열에 대한 입찰도 포기하겠습니다. 국내 균열은 모두 타 길드에게 맡기고, 이카루스는 연합과 해외에만 집중하겠습니다.”
“대국민 사과는?”
“그것도요.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이카루스가 안정화되는 즉시 기자회견을 마련하죠. 브레이크 사태에 대한 피해액도 최대한 보상하겠습니다.”
“…….”
“그리고 해외 원정에 대한 독점권도 포기하겠습니다. 이제부턴 원하신다면 그 어느 길드든 간에 해외 원정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불과 몇 주 전과 비교하면 실로 파격적인 변화였다.
말은 해체를 요구했어도, 사실 이승우만 물러나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유지태였다.
이카루스의 해체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지, 랭킹 1위 길드를 단번에 공중분해시키는 건 그로서도 부담감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기엔 현재 이카루스가 맡는 역할이 너무나도 막중했다.
‘실수다. 애초에 권력이 집중되는 걸 막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현실은 각성으로 권력이 나뉘는 세상이다.
그것이 유지태나 다른 5대 길드장들의 탓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말한 것들에 대해 각서를 쓸 수 있겠나?”
“유지태 님!”
다른 길드장들이 만류했지만, 유지태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했다.
이승우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친필이면 되겠습니까?”
“…….”
곧 이승우는 5대 길드장들을 증인 삼아 각서를 작성했다.
김인표는 못마땅한 듯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고, 송민호는 눈치를 살폈으며, 서유리는 그 모습을 답답하게 지켜보았다.
유지태만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한국에 연합 평가단이 도착했다.
평가를 맡은 실권자는 일본 오동 길드의 부길드장이었다.
* * *
연합의 방문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균열> 관리 판결이 나는 건 앞으로 일주일 뒤.
그 결정이 적격이냐, 부적격이냐에 따라 대한민국의 행보가 달라질 터였다.
“이거… 아무래도 이카루스가 수작질을 부린 것 같은데요.”
황한수의 말에 강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검계가 모은 석탈해에 관한 자료를 받기 위해 양복점을 찾은 터였다.
황 노인은 보이지 않았는데, 저번에 황한수가 말한 것처럼 또 어딘가로 여정을 떠난 모양이었다.
“아마도 이카루스는 연합으로부터 부적격 판결을 받길 원하겠지.”
“맞아요. 그래야 이카루스의 필요성이 더욱 대두될 테니까요.”
“그나저나 왜 이카루스에 관한 기사를 내지 않은 거지?”
검계는 기껏 수집한 이카루스의 비리에 대한 증거들을 언론에 풀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스톰을 공격한 게 이카루스라는 사실도.
“한명회가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인가?”
“설마요.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냥 봐줄 우리가 아니죠. 한명회도 잡아넣을 겁니다.”
“그럼 왜지?”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는지 모르겠는데, 아직 이카루스는 망하면 안 돼요. 이카루스를 대체할 집단이 생겨나기 전까지는요. 그래야 신라도 견제하기 쉽고요.”
“…정말로 이자들을 이용할 생각인가?”
강우가 일전에 챙긴 쌀가마니 엠블럼을 꺼내 보이며 물었다.
원래는 서유리 구조 때 꺼내려던 거지만, 갑작스러운 <사이트 스톤>과의 조우로 이용하지 못한 물건이었다.
“예. 그들이 제2의 이카루스가 될 거예요.”
“다른 5대 길드들도 있을 텐데?”
“그보다는 이곳이 강우 씨가 인연이 깊잖아요. 또 5대 길드에는 송학을 제외하고는 길드장이 무른 사람도 없고요.”
“…….”
“부적격 판단이 떨어지면, 일본이든 연합이든 분명 일을 벌일 거예요. 우리는 그때 움직일 겁니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강우는 묵묵히 엠블럼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대머리 부길드장과 심봉사를 외치던 마법사 길드장을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어딘가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예정대로 일주일 뒤.
연합은 강우의 예상대로 한국에 <균열> 관리 ‘부적격’ 판정을 내렸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