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손님 (1)
“한명회… 네놈이 감히!”
분노한 이승우가 주먹을 쥔 채 몸을 부들부들 떨자, 옆에 서 있던 한세라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이토록 분노한 길드장은 오랜만이었다.
‘한명회가 사라졌다.’
집에 다녀온다던 그는 그날 이후로 행방이 묘연했다.
그야말로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가족도, 재물도, 전부 가지고 숨어 버렸다.
그의 의도는 분명했다.
바로 배신.
‘대체 왜…….’
하지만 한세라는 사촌인 한명회가 배신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아무리 만석이 명백한 증거를 찾아왔다지만, 평생을 이카루스를 위해 헌신한 그다.
이카루스는 그의 자랑이자 삶의 목적.
이토록 쉽게 포기할 그가 아닌데…….
‘분명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찾으려는 한세라와 달리 이승우는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놈은 만석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승우는 이를 부득, 갈았다.
현재 뉴스에서는 <균열>에서 전멸 가까이 이르렀다는 서유리의 인터뷰가 한창이었다.
한명회가 죽이겠다고 한 그녀라 버젓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녀가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우리는 <균열>에 스톰 길드원을 사칭하고 잠입한 자를 쫓고 있습니다. 어쩌면 거기에 새로운 진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이번 일에 흑막이 존재한다면, 스톰은 결코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설령 그것이 전쟁이라도 불사할 것입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본 재방송이지만, 들을 때마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승우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생각했다.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자신이 본 그 ‘아이’들이라면, 김인표도 죽일 수 있을 만치 강했는데…….
‘한명회, 이 새끼가 분명 수작질을 부린 게 분명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이유는 그뿐이었다.
증거도 있었다.
그날 <균열>에 변이자를 풀었다던 놈도 한명회와 함께 사라진 것이다.
당연히 놈이 가져간 그 귀중한 보석도 사라져 버렸고, 엄청난 자금을 들여 만든 변이자 부대도 모두 죽어 버렸다.
“시발!”
콰직!
이승우가 내려친 탁자가 반으로 쪼개지며 요란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가 씩씩대며 중얼거렸다.
“애초에 내 스타일대로 밀어붙여야 했어! 그 탁상공론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이 빌어먹을 새끼!”
한세라는 이승우가 하는 사촌의 욕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괜히 그 불똥이 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이승우는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넌 당장 나가서 서유리 측의 이야기를 알아 와. 어떻게 놈들을 상대했는지, 혹 균열에 들어간 그 새끼를 찾아냈는지 등, 알아낼 수 있는 건 전부 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한세라가 집무실을 나가자, 이승우는 그녀가 나간 문을 한참이나 노려봤다.
‘분명 한선화라고 했지.’
그는 이카루스를 찾아온 만석의 여자를 떠올렸다.
‘한명회, 한세라, 한선화.’
셋의 성이 같은 건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한세라를 비서직에 추천한 것도 한명회였다.
그러고 보면 이카루스의 최상위에 한씨 가문이 둘이나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한선화라고?
역겹고도 불길한 상상이지만,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망상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만큼 현재 그의 심리가 불안정한 탓이었다.
‘한명회는 왜 갑자기 석철을 멕시코로 보냈지?’
자신이 석철을 불편해한 건 맞지만, 석철을 멕시코로 보내고 처리할 계획을 짠 건 한명회였다.
모든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분명히 그전까지만 해도 허의 사절과 자신은 완벽한 동맹 구도를 갖추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들과 척지어 버렸다.
이 모든 게 누군가 자신을 고꾸라뜨리기 위해 꾸민 간계만 같았다.
‘설마 한 비서도 한패는 아니겠지…….’
혹시 모르니, 당분간은 한세라도 멀리할 생각이었다.
소파에서 일어난 그는 창가로 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지치지도 않는지, 이카루스 앞에는 연일 누리꾼들의 시위 한창이었다.
오히려 어제보다 더 늘어난 듯했다.
‘벌써 며칠째 이곳에 숨어 있는 건지…….’
이승우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건 영웅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탁자에 놓인 증거서류를 바라봤다.
저것들이 세상에 풀리는 순간, 그것이 곧 자신의 몰락이 될 터였다.
틀림없다.
그때가 되면 재기의 기회조차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해. 처음부터 판을 다시 짜야 한다.’
하지만 이승우의 머리로는 도무지 괜찮은 작전이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그가 떠올린 건 또 다른 누구에게 기대는 수뿐이었다.
그는 수화기를 들어 오랜 동맹 길드에 연락을 취했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십니까.”
곧 그가 유창한 일본어로 누군가와 통화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오동 길드 쪽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그들도 이카루스의 소식을 들었을 터.
그들로서도 지금까지 긴 인연을 맺어 온 동맹국의 실세가 달라지는 건 바라지 않을 터였다.
“예.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윽고 오동 길드 쪽과 통화를 마친 이승우가 수화기를 내려놨다.
“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이미 자신은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이제 남은 희망은 일본뿐.
그들이 자신의 필요를 증명해 주어야 한다.
자신의 생사여탈권이 타인에게 있다는 게 썩 자존심 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선은 수습과 살아남는 게 먼저다.
곰곰이 고민하던 그가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지금 당장 5대 길드장들 소집해. 당장.”
이승우는 5대 길드장들을 이카루스로 불러들였다.
지금이라도 그들과 대화해야 했다.
이카루스가 처한 상황을 알리고, 한명회와 만석이 선수를 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사죄할 생각이었다.
그런 뒤에 일본의 도움을 받으면 살아날 방도가 생길 것도 같았다.
‘브레이크가 사라졌으면, 일본이 그 일을 대신하면 될 일이야.’
그런데 그때였다.
나름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한 그때, 이승우는 갑작스러운 이명과 함께 어지러움을 느꼈다.
“…윽!”
두통이 심했다.
몸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승우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밖에 누가 있을까 싶어 감각을 활짝 열었지만,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쨍그랑!
책상을 붙으려던 이승우의 손길이 실수로 그의 명패를 스쳐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승우는 깨진 자신의 이름을 보며 이마를 움켜쥐었다.
금방이라도 구토를 쏟을 것 같았다.
‘몸이 갑자기 왜…….’
그때였다.
똑똑.
노크한 누군가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한세라였다.
벌써 조사가 끝났나?
아니, 그보다 밖에는 아무도 없던 것 같은데?
한세라가 비각성자라 몰랐나?
이승우가 한세라를 혼란스럽게 바라보는 사이, 다가온 그녀가 그를 부축하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길드장님, 괜찮으십니까?”
“…….”
뭐지?
이승우는 그녀의 말투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이상함을 느낀 것과 동시에 이승우는 사냥꾼의 본능을 발휘했다.
그간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긴 해도 수십의 <균열>에서도 선전한 그였다.
그는 한 치 망설임도 없이 한세라의 멱살을 움켜쥐며 물었다.
“너… 누구야?”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듯 머릿속이 멍했다.
하지만 그는 국내에 단둘밖에 없는 4차 각성자.
그는 이 와중에도 대단한 정신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한세라는 날 길드장이라고 안 불러. 마스터라고 부르지.”
그러자 한세라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서 그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 좀 놔주십시오, 마스터.”
하지만 이승우는 손을 풀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올려 쥐었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너 누구냐고!”
“…….”
그러자 침묵하던 한세라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가 생전 처음 보는 얼굴로 말했다.
“생각보다 일찍 들켰군요.”
“…뭐?”
이상한 일이었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난 이승우는 손을 풀고 뒤로 물러섰다.
어느새 한세라가 서 있던 자리에는 낯익은 붉은 머리 사내가 서 있었다.
그가 자신의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아직 여자 연기는 어색한가.”
“너… 너 누구야?!”
고오오오!
어느새 마력을 끌어 올린 이승우가 상대를 경계하며 소리쳤다.
이 정도 소리를 질렀으면 밖에서 누군가 달려와야 하건만,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얼떨결에 방출하려던 마력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당황한 그 모습에 붉은 머리 사내, 석탈해가 웃으며 말했다.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영 아니군요.”
“너……?”
기억을 헤집던 이승우는 비로소 눈앞에 선 남자의 이름을 떠올렸다.
몇 주 전부터 한세라의 보고서에 꾸준히 올라오던 그 남자였다.
“석탈해, 맞지?! 신라 길드의 길드장! 네놈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어떻게 들어왔어?!”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미친 걸까?
하지만 분명 놈은 한세라의 모습을 하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둔갑이나 모습을 바꾸는 마법은 생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당황한 이승우는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지만, 석탈해는 점차 다가와 창문에 기댄 그의 코앞에 다다랐다.
석탈해의 숨결이 닿을 만한 거리.
얼굴을 내민 그가 말했다.
퍽 따듯한 미소였다.
“요즘 당신이 어렵다는 말을 들었어요. 어쩌면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도움…이라고?”
“예. 저도 얼마 전에 친구를 잃었거든요. 그 친구를 대신할 사람이 필요한데…….”
이승우가 몽롱한 얼굴로 되물었다.
“…친구?”
석탈해가 밝게 웃었다.
“네, 친구. 체격도 비슷한 게, 당신이 그 자리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성격도… 조금 닮은 것 같고요.”
석탈해와 눈을 마주치자 이승우의 동공이 햇빛 아래 선 것처럼 쪼그라들었다.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느낌이었다.
전설 속 <만드라고라>의 향을 맡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이승우는 점차 감각이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츠츠츠츳―
어느새 석탈해의 등 뒤로 붉은 날개가 돋아나 있었다.
온 우주를 가득 채운 붉은 두 개의 날개.
이승우는 그것이 환상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다만, 포근했다.
어릴 적 엄마의 품에 안길 때처럼 따듯하고도 마음이 편해지는 기운이었다.
그 붉은 기운 속에서 이승우의 몸이 점차 허물어져 내렸다.
석탈해가 속삭였다.
“당신은 저라는 친구를 얻고, 저는 당신이라는 친구를 얻고.”
따스하고 자상하기 그지없는 음성으로.
“어때요? 절 도와주지 않겠어요?”
그가 환하게 웃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