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그들이 기억하는 세상 (3)
대뜸 <사이트 스톤>의 세상에 붙잡혀 온 아이들은 잔뜩 날이 선 상태였다.
낯선 환경에 본능적으로 경계와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겁먹은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리긴 해도 아이들은 눈앞의 <데스 나이트>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묵직한 대검을 들고 선 그가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칫 말이라도 걸면 그대로 목을 망나니처럼 내려칠 것만 같았다.
아이들은 호공의 의도대로 본능에 충실했다.
[…….]
졸지에 아이들의 보모가 된 <데스 나이트>는 대검을 바닥에 받치고 선 채 묵묵히 있었다.
내가 왜 아이들을 탑 안으로 들였지?
<데스 나이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다른 고민이 더 컸다.
<사이트 스톤> 안으로 강우가 들어온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가 탑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강우의 얼굴을 확인한 <데스 나이트>가 물었다.
[…화가 난 얼굴이로군.]
그러나 강우는 아이들 쪽을 한 번 쳐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피바라기>를 꺼내 들었다.
그가 검날에 검은 불길을 피우며 말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른 채 행동하는 건 그만두겠다.”
[…….]
“넌 호공을 만나길 꺼려했다. 일찍 나올 수 있었음에도 놈의 분신이 죽은 뒤에야 모습을 드러낸 게 그 증거지. 즉, 넌 호공이 널 알아볼 걸 염려했던 거다.”
<데스 나이트>는 부정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숨겨 왔지만, 이런 경우가 벌써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강우의 신뢰를 잃게 될 터.
아무리 그들의 목적이 같은 방향이라고 한들, 서로 반목해서는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터였다.
“사도가 아니면서 호공이 알아보는 자, 사도가 아니라면서 석탈해와 사도의 일에 개입하는 자, 그리고 그들보다 더한 능력과 지식을 갖춘 자. 넌 대체 누구지? 내게서 뭘 이루려는 거냐?”
대답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공격해 올 기세였다.
<데스 나이트>는 그게 괜한 협박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이미 강우의 성격은 그간의 행보로 잘 증명되지 않았던가.
뜸을 들이던 <데스 나이트>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공기 중에서 돌연 작은 쪽지들이 끌려 나왔다.
[조릭과 투움바란 놈이 보내온 것이다.]
강우는 그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연락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다행히 그 둘은 임무를 잘 수행하는 듯했다.
<데스 나이트>가 팔을 휘두르자, 쪽지가 강우에게로 날아들었다.
강우는 여전히 <피바라기>의 불길을 꺼뜨리지 않은 채 쪽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탐사 1주 차. 일주일을 걸었으나 여전히 이곳은 용암지대다. 탑에서 멀어진 탓인지, 마물의 수가 늘어났다. 주변은 지옥, 그 자체다. 우리도 죽으면 다시 태어나는 건지 궁금하다.』
『탐사 2주 차. 방향을 잘못 잡은 건가. 우리는 아직 용암지대에 있다. 하지만 운 좋게 새로운 걸 발견했다. 바로 뼈다. 조릭이 용암에 녹지 않은 뼈를 찾아냈다. 이곳의 마물은 죽는 즉시 바닥으로 스며드는데, 이 뼈는 유일하게 온전히 남아 있다. 아마도 사람의 갈비뼈로 추정된다. 지난번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다면 부탁한다.』
『탐사 3주 차. 건물의 터였을 것이라 추정되는 장소를 발견했다. 이곳에도 문명이 존재했던 건가? 어제는 이상한 일도 있었다. 조릭이 발견한 뼈가 사라졌다. 아마도 탑이 초기화되면서 뼈도 사라진 것 같다. 누군가를 또 고문하고 있는 건가? 회신을 부탁한다.』
탐사 결과는 거기서 끝이었다.
쪽지를 모두 읽은 강우는 그들의 보고서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이상하군. 이곳은 무한히 반복되는 세계다. 죽음은 다시 탄생으로 이루어지지. 그렇다면 이곳에 사람의 뼈가 존재할 수 있나?”
[…….]
강우는 고민했다.
지금 상황에서 <데스 나이트>가 쪽지를 주었다는 건, 이것이 그 대답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상대는 지금 머뭇대고 있었다.
최대한 대답을 미루고 있는 걸 보면, 그 뒤에 전혀 예상 못 한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게 분명했다.
‘존재해선 안 될 것이 존재하는 곳이라…….’
서유리가 죽었다는 그 <사이트 스톤>에도 뼈는 있었다.
모든 것이 썩어 있는 와중에도 서유리의 시신만은 완전히 부패하지 않았었지.
분명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어 있던 세상.
그곳은 흡사 변이자 아이들에게 스톰이 당한 미래 같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강우는 문득 잊고 있던 단어를 떠올렸다.
‘미래.’
강우는 생각했다.
만약에 조릭이 발견했다는 뼈가 이 세계에 줄곧 존재하던 것이라면?
이 세상이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던 것이라면?
순간, 머리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서유리가 죽은 <사이트 스톤>의 세상이 미래라면, 서유리가 살아 있는 현실은 과거였다.
<사이트 스톤>은…….
“혹, 사이트 스톤은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 말이 됐다.
서유리가 죽어 있던 세상이 만약 미래를 보여 준 것이라면, 자신이 현실에서 그녀가 죽지 않게 살려 낸 것이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틀린 부분이 무엇이지?”
비로소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지, 죽음의 기사가 처음으로 확실한 답을 전했다.
[이곳은 일어날 미래를 보여 주는 곳이 아니다. 이미 일어난 미래를 보여 주는 곳이지.]
* * *
이미 일어난 미래.
<데스 나이트>는 수천 년 전에 태어났고, 수천 년이 지난 뒤에도 살아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그리고 시간 여행의 산증인이었다.
“이미… 일어난 미래라고?”
강우는 탑 밖의 세상을 떠올렸다.
하늘은 마치 먹칠한 듯 새까맣고, 땅은 피를 쏟아부은 듯 시뻘겋게 끓어오르는 세상.
온통 마그마와 마물로 가득 찬 세상.
탑 밖의 세상은 형언할 수 없는 대재앙,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것이 미래라고?
[그래. 이곳이 바로 네가 사는 행성의 미래다.]
“…….”
만약 <데스 나이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런 짓을 벌일 만한 존재는 단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석탈해의 짓인가?”
<데스 나이트>는 침묵했으나,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역시 놈은 마물이 맞았던 모양이다.
얼굴이 잔뜩 굳어진 강우가 물었다.
“내가 죽은 뒤, 무슨 일이 벌어졌지?”
과거로 회귀했으니, 자신이 죽은 이후의 세상을 딱히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이미 그곳에는 미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자신도, 혜진과 아이도, 신라 길드원들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막연히 그곳의 시간이 멈췄을 거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는 강우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은 시간이 흘러서 결국엔 이러한 모습이 됐다고 말하고 있었다.
[네가 죽은 뒤에도 놈은 몇 차례 놀이를 계속했다. 전 세계에서 브레이크가 일어나고, 마물들이 튀어나와 인간들을 학살했지. 그때마다 인간 진영에서 소위 말하는 ‘영웅’이 등장했지만, 너만큼 놈의 흥미를 끄는 인간은 없었다. 곧 지루해진 놈은 게임을 끝냈지.]
휙―!
<데스 나이트>가 손을 휘두르자, 주변 풍경이 변했다.
그들은 어느새 다시 용암지대에 서 있었다.
[이게 그 게임에서 너희가 패배한 결과다.]
숨통을 옥죄는 듯 뜨거운 바람 불어닥쳤다.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폐가 다 녹아내릴 것 같은 화기였다.
혼란스러웠다.
석탈해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행성 하나를 이런 식으로 망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으니까.
“놈은… 누구지?”
[본래 놈은 이름이 없다. 석탈해란 이름도 갑자기 이 행성에 도착해 스스로 지은 이름이지. 다만, 누군가는 그를 왕이라 부르기도 하더군.]
왕이라…….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었으나, 이 광경을 보아하니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서유리의 일은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살아가던 세상에서 그 여자는 죽지 않았다. 변이자를 만나지도 않았지. 그런데 어떻게 변이자들에게 죽은 게 그 여자의 미래였다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는군. 내가 과거로 돌아오면서 미래가 바뀐 건가?”
<데스 나이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가지 설명을 덧붙여야겠군. 서유리는 분명 죽었다. 시신이 발견된 그 시간선에서는 말이지.]
“시간선…이라고?”
[시간선은 하나의 세계다. 이 우주에는 헤아릴 수도 없을 만치 수많은 시간선이 존재해. 현재 네가 있는 그 세계에선 서유리가 살아 있지만, 다른 시간선에선 죽었다. 네가 만난 시신은 그 다른 시간선의 서유리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뿐이었다.
[시간선은 무한하다. 지금도 수백, 수천 개의 시간선이 나누어지고 있지. 네가 스톰이 있는 균열에 들어선 순간부터 또다시 수십 개의 시간선이 나뉘어졌다. 우리가 대화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지. 모든 시간선이 같은 시간대를 공유하는 건 아니다.]
무한히 증식하는 세계라는 말인가.
잠시 생각을 정리한 강우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는 건… 나는 과거로 돌아온 게 아니로군. 나는 새로운 시간선에 접어든 거다.”
[제대로 이해했군.]
“그럼 본래 이곳에 있던 나는 어떻게 됐지?”
잠시 뜸들이던 <데스 나이트>가 답했다.
[그는 죽었다. 이 탑으로 불러들였지만, 그때의 넌 어리더군. 얼마 버티지 못했다.]
어딘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장혜진.
그녀는 어떻게 됐을까.
하지만 강우는 그 질문을 애써 삼켜 냈다.
아직은 아니다.
어쩐지 그 대답을 들으면 잘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치미는 감상을 애써 꾹꾹 누르며 물었다.
“네 말대로라면, 결국 사이트 스톤은 하나의 시간선이로군.”
[그래. 하지만 시간선 중에서도 극히 일부분의 구간만 기억하는 세상이지.]
“서유리 말이로군.”
[맞다.]
강우가 호공의 분신을 해치운 <사이트 스톤>은 서유리의 시간을 담은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이트 스톤은 한(悔)의 결정체다. 신기하지 않은가, 한 존재의 한이 이런 보석으로 남게 된다니.]
그래서 그곳의 핵이 죽은 서유리였던 건가.
강우는 눈앞에 서 있는 죽음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곳이 서유리의 한이 맺혀 만들어진 <사이트 스톤>이라면, 이곳은 그의 한이 맺혀 만들어진 <사이트 스톤>일 터였다.
강우는 궁금했다.
이 멸망한 세계를 한으로 남긴 이는 대체 누구인가.
이 멸망한 세계를 홀로 기억하는 이 기사는 대체 누구인가.
“넌… 누구지?”
강우의 물음에 <데스 나이트>가 한동안 물끄러미 마주했다.
그러다 그의 양손의 자신의 검은 투구에 닿았다.
죽음의 기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의 투구를 벗었다.
세상이 모두 멈추고, 오로지 기사만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시간이 마치 억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투구 밖으로 기사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깨에 닿은 붉은 장발과 붉은 눈썹,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마치 불로 빚어낸 것 같은 남자.
이미 강우에겐 익숙한 얼굴이었다.
절로 그의 이가 갈렸다.
“석탈해……!”
그랬다.
<데스 나이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석탈해였다.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내가 석탈해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