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그들이 기억하는 세상 (1)
<데스 나이트>가 등장하자 강우와 박도진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놈의 검이 닿는 족족 변이가 진행된 <흡혈귀>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침내 일대의 모든 <흡혈귀>를 정리한 <데스 나이트>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사이트 스톤 중에서도 꽤 특별한 곳이군. 서둘러 핵을 찾아 파괴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갈 수 없어.”
그의 육성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강우는 그 목소리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 핵이라는 건 어떻게 찾지?”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놈들을 상대하면서 이미 내가 찾아 놨으니까.”
퍽 믿음직한 길잡이였다.
“따라와라.”
팟!
고리를 꺼낸 <데스 나이트>가 앞으로 쏜살같이 튀어 나가자, 강우도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박도진도 기를 쓰고 그들을 쫓았으나, 둘의 속도를 따라가기는 무리였다.
곧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싶던 찰나.
다행히 <데스 나이트>가 뜀박질을 멈췄다.
“이곳이다.”
“…….”
그가 멈춰 선 곳은 다름 아닌, 처음 호공의 분신을 만난 그 동굴 앞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곳은 동굴이라 부르기엔 애매했다.
초대형 <오우거>의 파괴적인 손길에 철저히 무너졌기 때문이다.
강우가 의아하게 여기며 물었다.
“여기에 핵이 있었다고?”
“그래.”
뒤늦게 도착한 박도진이 거친 숨을 토해 내는 가운데, <데스 나이트>는 돌무더기 위를 걸어 오르기 시작했다.
“음, 이곳이로군.”
드드드드득!
<데스 나이트>가 손을 휘젓자, 무너진 동굴 잔해들이 몸을 떨기 시작했다.
부서진 바위가 옆으로 굴러 떨어지고, 작은 돌멩이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는 이 무너진 잔해 속에서 무언가를 찾을 생각인 듯했다.
“이것이다.”
마침내 수색이 끝났을 때, <데스 나이트>는 동굴 밑에 깔려 있던 한 시신을 찾아냈다.
그것은 동굴의 빈 공동에서 만난, 홀로 부패되지 않은 여자 시체였다.
아마도 그녀의 몸에 축적돼 있던 마력이 부패를 늦춘 듯했다.
그녀를 확인한 강우가 물었다.
“이 시체가 이곳의 핵이란 말인가?”
“맞다. 이 여자가 그 주인공이지.”
<사이트 스톤>의 핵이 이 시신이라니… 아마도 ‘탑’이 핵일 거라고 추정되는 <데스 나이트>의 세상과는 어딘가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적어도 살아 있는 마물이나 건축물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문득 궁금해진 강우가 물었다.
“이 여자는 누구지?”
* * *
콰르르르르!
서유리의 마법은 현란했다.
사방팔방으로 쏘아진 전격 마법들이 변이자 난쟁이의 살을 태우고, 그 피를 증발시켰다.
장민철을 손쉽게 상대하던 대장 난쟁이도 그녀의 마법만큼은 두려웠는지 뒤로 멀리 물러서 있었다.
“살았다!”
“역시 길드장님이다!”
비로소 사기를 되찾은 스톰 길드원들의 표정도 풀렸다.
하지만 장민철만은 달랐다.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자신들의 앞에 선 서유리의 등을 바라봤다.
‘무리다. 지금 길드장님은 무리를 하고 있어.’
서유리가 온전한 몸을 되찾기 위해선 적어도 하루 이틀 휴식이 필요했다.
고작 한 시간만으로 브레이크 때부터 누적돼 온 피로를 전부 떨쳐 낼 순 없을 테니까.
평소와 달리 힘겨워 보이는 동작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건 오랫동안 그녀의 등을 지켜 온 자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마법은 제 힘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지금의 마법은 속임수고 무언가를 준비하는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그럴 여력이 있을까?
‘제기랄…….’
입술을 깨문 장민철이 품속에서 <이동석>을 꺼냈다.
서유리라고 <이동석>이 없을 리 없지만, 그녀의 성격상 이곳에서 뼈를 묻을지언정 길드원들을 버리고 달아나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녀를 보필하는 자.
무슨 수가 있어도 그녀만은 살려야만 했다.
“한별! 민재!”
장민철의 부름에 팀장급 길드원들이 서둘러 달려왔다.
“길드장님이 버틸 수 있는 시간엔 한계가 있다.”
“…예?!”
“길드장님은 마법사이지, 탱커가 아니야. 계속 저렇게 마력을 퍼부었다가는 나중에 탈출할 힘도 없어진다. 최소한 공간 전이를 사용할 힘은 남겨 두어야 해.”
“그렇다면…….”
장민철의 말뜻을 깨달은 두 팀장도 표정을 굳혔다.
이미 스톰은 패했다고.
자신들은 이 동굴에서 나갈 수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뒤는 내가 맡겠다. 너흰 길드장님을 모시고 이 동굴을 나가라. 이동석을 쓰든, 벽을 부수든, 놈들을 뚫든, 어떻게든 나가.”
“…….”
팀장들은 차마 안 된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만큼 현재 장민철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차마 그의 결의에 반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모두가 나갈 순 없다. 시간을 끌 사람들이 필요해. 너희 둘은 길드장님을 챙기고, 정예 몇몇은…….”
“그렇다면 저는 남겠습니다.”
제2팀장, 정민재가 말했다.
“정예인 제1팀이 죽어서는 스톰이 힘을 쓸 도리가 없을 겁니다. 우리 2팀이 부길드장님과 함께하겠습니다. 제1팀과 다른 지부원들이 건재하면 스톰은 충분히 재기할 수 있습니다.”
“너……!”
“안 된다고 하지 마십시오. 저도 부길드장님만큼 스톰을 사랑하니까요.”
결국 장민철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차마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하겠구나.”
코끝이 시큰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장민철은 그것을 견뎌 냈다.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정민재, 부디… 이 스톰을 위해… 죽어 다오.”
“영광일 따름입니다.”
그렇게 장민철은 서둘러 탈출조를 꾸렸다.
제1팀장 박한별과 그의 정예조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 와중에도 정신없이 마법을 퍼부으며 적을 견제하는 서유리는 뒤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르는 듯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장민철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길드장님!”
“지금 바빠요! 또 쓸데없는 말은 사절입니다!”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건가?
어쩐지 서유리의 말투에는 이 급박한 와중에도 농담기가 섞여 있었다.
“너무 무리하셨습니다! 앞은 저희가 맡을 테니, 잠시 뒤로 와서 휴식을 취하십시오!”
“그럴까요? 안 그래도 조금 힘들던 참이었어요!”
그제야 장민철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평소대로라면 괜찮다며 거절했어야 할 그녀인데…….
하지만 그 이상함의 이유를 깨닫기에는 상황이 너무 긴급했다.
서유리의 마법을 피해 물러난 난쟁이들이 입구 사이사이에 몸을 숨긴 가운데, 공격을 멈춘 그녀가 말했다.
“그럼 수고 좀 부탁해요.”
“믿어 주십시오.”
그녀를 대신해 장민철과 제2팀 공격대들이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난쟁이들은 그것이 속임수라 생각했는지, 바로 공격해 오진 않았다.
놈들이 멀찍이서 이쪽을 주시하는 사이, 장민철이 제1팀장 박한별과 눈을 맞췄다.
같은 3차 각성자라고 한들, 마법계 각성자인 서유리가 그의 근력을 감당할 순 없을 터.
박한별은 그녀를 안고 이 동굴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장민철 님.”
서유리가 대뜸 부길드장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돌아보자, 그녀는 환희 웃고 있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항상 감사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인사일까?
하지만 오늘 밤 그녀가 죽을 일은 없을 터였다.
자신이 그렇게 놔두지 않을 테니까.
그녀의 감사에 장민철도 환하게 웃었다.
“저야말로 감사했습니다. 길드장님이 아니었다면, 인생엔 이런 감정도 있다는 걸 알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는 사이, 이쪽의 상황을 인지한 난쟁이들이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들을 보며 서유리가 말했다.
“스톰을 잘 부탁해요.”
“…예?”
장민철이 의아하게 묻는 사이, 서유리의 손에서 마력이 일고 있었다.
곧 그 이유를 깨달은 장민철이 소리를 질렀다.
“아, 안 돼! 길드장님―!”
그것은 <공간 전이>였다.
여태껏 마력을 아껴 둔 건 설마 이것을 위해서였나?
[차마 부길드장님이 저보다 먼저 죽는 걸 볼 자신이 없네요. 저 이기적이죠? 미안해요.]
그것은 장민철만 들을 수 있는 <전음>이었다.
그녀의 입이 열렸다.
“차기 길드장은 장민철 부길드장님입니다.”
“아, 안 돼! 안 됩니다!”
하지만 장민철의 절규에도 마법은 감행됐다.
곧 장민철과 제2팀장 정민재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랜덤으로 선정된 길드원들이 동굴을 빠져나갔다.
기껏해야 열다섯 남짓한 숫자.
모두를 내보냈으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서유리의 실력과 마력이 부족했다.
서유리는 옆에 선 제1팀장 박한별을 바라보았다.
그는 장민철에게 명령을 받기 전부터 이 계획에 대해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사이, 난쟁이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서유리가 박한별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길드장님 곁에 우리가 없으면 누가 있겠습니까. 길드장에게는 제1팀, 부길드장에겐 제2팀이 제격이죠.”
그의 농담에 서유리가 웃었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싸움이 될 터였다.
어느새 다가온 난쟁이들에게 마법을 펼치며 그녀가 소리쳤다.
“스톰이여, 끝까지 자신을 불살라라! 폭풍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와아아아아!”
그 외침을 시작으로 치열한 최후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서유리도, 제1팀장 정민재도, 다른 길드원들도.
동굴에 남겨진 스톰 길드원들은 그렇게 모두가 장렬히 산화했다.
* * *
“이 여자가… 서유리라고?”
강우는 시신의 정체에 다소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그럼 이곳의 시간 배율은 얼마지? 스톰이 이곳에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백골이 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렇게 뼈까지 검게 변할 순 없어.”
서유리는 마력 탓에 시신이 남았다고 해도 다른 스톰 길드원들은 모두가 백골로 발견되었다.
그러자 <데스 나이트>가 서유리의 시신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니, 충분한 시간이지. 그 여자가 죽은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으니까.”
“몇 년이… 지났다고?”
그 대답에 박도진도 화들짝 놀란 눈치였다.
도무지 믿지 못한 강우가 물었다.
“그렇다면 이곳의 시간 배율이 수십 배란 뜻인가?”
“…….”
하지만 <데스 나이트>는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답답해진 강우가 그의 앞으로 다가가 노려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죽은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 법이지.”
역시나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강우가 다시 물으려던 찰나, 그가 일축했다.
“더 이상 들려줄 시간은 없다. 이곳을 탈출하는 데 시간을 너무 지체했어. 다만…….”
<데스 나이트>가 강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직 이 여자는 죽지 않았다.”
“…뭐?”
“살릴 수 있다.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면.”
죽은 지 몇 년이 지났다면서, 이번에는 다시 살릴 수 있다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뿐이었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는 자신의 말만 계속했다.
“이 여자를 도와라.”
“위령이라도 하라는 말인가?”
“뭐, 비슷해. 이 여자를 네 검으로 없애. 그러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해도 지금은 믿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 죽음의 기사는 제대로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까.
더 고민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강우는 그 즉시 서유리의 시신으로 다가가 <피바라기>로 살을 찔렀다.
그러자 오래된 시신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심지어 따듯한 피가.
“…….”
강우는 궁금해도 더 묻지 않았다.
묵묵히 <피바라기>를 이용해 그녀의 피를 삼켰다.
그러하자 신기하게도 죽은 서유리의 몸이 급속도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의 시신이 허공으로 먼지가 돼 사라졌을 때.
강우와 박도진의 시야가 변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