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제안 (1)
이카루스 길드장 이승우의 집무실.
“결과는 아직이야?”
“아직 수하가 들어간 지 30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제길.”
한명회의 말에 이승우는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아직도 서유리를 죽이기로 한 결정이 과연 잘한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마법계 각성자는 흔치 않은데…….’
오늘따라 똑 부러지던 서유리의 얼굴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도는 이승우였다.
‘…쯧쯧.’
한명회는 그런 이승우를 보며 이번에도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자신감을 빼면 시체인 이승우이건만, 근 며칠 사이 그의 진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똑똑.
비서 한세라가 문을 열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숨소리가 다소 불규칙하고 얼굴이 상기된 게, 황급히 달려온 게 분명했다.
결과가 나온 건가?
이승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락… 왔어?”
하지만 한세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입니다. 그런데…….”
기대하던 답변이 아닌데다가 말끝까지 흐리자, 가뜩이나 날카롭던 이승우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가 살짝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물었다.
“뭔데 그래?”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이승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와도 다 쳐 내기 바쁜 와중에 손님은 무슨 손님이란 말인가.
한명회도 의아한 듯 쳐다보며 물었다.
“미국 측인가?”
“아닙니다. 자신이 오만석의 사촌이라 주장하는 여자가 왔습니다.”
“…오만석의 사촌이?”
“예. 이름이…….”
잠시 기억을 되짚던 그녀가 말했다.
“한선화라고 했습니다.”
‘한선화?’
한세라의 말에 이승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어릴 적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큰 오만석은 친척 하나 없이 외롭게 살아왔다.
그런데 뜬금없이 사촌이라니.
찾아왔다는 여자는 오만석의 사주를 받고 온 만석 길드원이 분명했다.
“이 바퀴벌레들이 드디어 움직이는군.”
이렇게 이카루스가 궁지에 몰린 마당에 놈들이 대체 무얼 요구할지 가늠이 가질 않았지만,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것보단 나았다.
이승우가 쳐다보자 한명회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별 반응이 없으니 슬슬 초조해진 모양이지요. 잘됐습니다. 이참에 놈들이 요구하는 사항을 들어 보죠.”
이승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고 해.”
“그런데… 조건이 있답니다.”
“조건? 무슨 조건?”
잠시 뜸을 들이던 한세라가 말했다.
“한명회 이사님이 나와야 이야기를 하겠답니다. 마스터께서 오면 대화는 없다고…….”
“뭐?”
예상치 못한 조건에 얼굴을 찌푸린 이승우가 한명회를 바라봤다.
하지만 한명회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유가 뭐래?”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무작정 한명회 이사님과만 이야기하겠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허…….”
고민하던 한명회가 물었다.
“몇 명이 왔지?”
“여자 하나, 보디가드로 보이는 남자 하나입니다. CCTV를 치우라고 성화이긴 했지만, 허튼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으음.”
이승우와 한명회가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쓰는 가운데, 한세라가 곤란한 얼굴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10분만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바로 돌아가겠다고…….”
그녀가 자신의 시계를 살폈다.
“이제 6분 남았습니다.”
“…….”
부득.
그 건방지다 못해 오만한 이야기에 이승우의 이가 절로 갈렸다.
참지 못한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 연놈들 면상을 당장 봐야겠어. 어디 경호원 놈의 사지를 끊어 놔도 그런 말이 나오나 보자고. 우리도 인질 하나 있어서 나쁠 건 없겠지.”
“안 될 말입니다.”
그러자 한명회가 서둘러 일어나 씩씩대는 젊은 길드장을 말렸다.
“지금은 상대를 도발해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현재 불리한 건 우리니까요. 일단 제가 놈들을 만나 보고, 어떤 증거를 가졌는지 파악해 보겠습니다.”
“제기랄…….”
“일단은 순순히 따라 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어르고 달래야 하는 때입니다, 길드장님.”
분노를 참지 못한 이승우의 얼굴이 버려진 종이처럼 구겨졌지만, 아무리 성질 급한 그라도 공사와 대소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다.
그가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녀와. 그리고 한 비서는 그 새끼들 얼굴 찍은 CCTV 찾아서 가져오고. 입구에선 찍혔을 거 아니야. 어떤 낯짝인지 당장 확인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어.”
“알겠습니다.”
그렇게 한명회는 황급히 한세라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가 저토록 후다닥 달려가는 게 얼마 만이던가.
바삐 움직이는 한명회의 뒷모습을 본 이승우는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4차 각성자가 되고 나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기는 오랜만이었다.
자신의 앞으로는 탁 트인 실크로드만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영웅의 앞길에는 장애물이 존재하는 것인가.
‘하다못해 마물이면 힘으로 다 쳐 죽이면 그만일 텐데…….’
그러면 얼마나 좋으련만, 사회는 <균열>이 아니었다.
그만큼 신경 쓸 것도, 골치 아픈 일도 많았다.
마물 같은 인간은 있어도, 쉽게 때려 죽여도 문제가 없는 인간은 없었다.
악하디악한 인간일지라도 그를 처리하기 위해선 꽤 많은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간 이승우가 그럴 고민을 한 경우는 드물었다.
이카루스에서 한명회와 한세라라는 최고의 뒤처리 귀재들이 있었으니까.
“후우.”
이승우는 치미는 화를 애써 억누르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언젠가 한세라가 알려 준 ‘마음 가라앉히는 방법’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으면 돼. 서둘러 국내를 정리하고 다시 해외에 집중한다. 일본도 당장은 우릴 끊어 낼 수 없는 처치니까… 아직 여유는 있다.’
그런데 심호흡이 한창이던 그때였다.
갑자기 주머니에서 진동이 일었다.
‘발신 제한?’
사무용이 아닌, 개인용 핸드폰으로 발신 번호가 가려진 전화가 걸려 오고 있었다.
만석은 단 한 번도 이 번호로 연락한 적이 없었다.
이승우는 문득 불길한 기분을 느꼈지만, 중요할지도 모르는 개인 전화를 무시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혹시 이승우 씨 핸드폰인가요?]
“…….”
처음 들어 보는 남자 목소리였다.
아니라고 잡아뗄까도 생각했지만, 이미 이 번호로 연락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번호라는 걸 알고 전화한 것이었다.
이승우가 한껏 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맞습니다. 누구십니까?”
[아, 맞네. 저는 길드 만석의 대리인입니다. 음, 미스터 황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미스터 황?’
이미 한명회를 불러내 놓고, 자신에게 따로 전화하다니…….
무슨 개수작을 벌이려는 게 분명했다.
그가 이를 갈며 신경질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수작질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지금 내 기분이 썩 좋지 않거든. 당장에라도 네놈들이 보낸 연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수도 있어.”
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상대, 황한수는 그 살벌한 협박에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는 양복점에서 코까지 후벼 가며 오히려 더 여유로워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이구, 무서워라. 그래서 어디 말이나 붙이겠어요?]
“개소린 그만두고, 용건만 말해.”
[…큭.]
큭?
분명한 비웃음이었다.
“웃어? 이 개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분노한 이승우가 욕을 퍼부으려던 순간, 황한수가 대뜸 입을 열었다.
[이카루스, 지키고 싶죠?]
“…뭐?”
[이카루스요. 지키고 싶잖아요. 아깝지 않아요? 대한민국 1등 길드가 이렇게 무너지면?]
헛소리다.
놈은 심리전을 펼치려는 모양이었다.
정신을 다잡은 이승우가 웃음기 가득한 말투로 대답했다.
“네놈들이 아무리 개수작을 떨어도 이카루스는 무너지지 않아. 왜? 대한민국은 아직 이카루스를 필요로 하거든.”
하지만 그의 발언에도 황한수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음, 이제 그렇지 않을 텐데요? 당신, 지금 서유리 씨를 죽이려고 하잖아요? 맞죠?]
“……!”
그 말에 이승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놈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광대 근육이 팽팽하게 경직되며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세차게 뛰었다.
“서유리를 죽이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뭐, 증거 다 잡은 마당에 부정하려거든 계속하시고요. 자신의 부패를 감추기 위해 자국의 길드장을 죽이려 한 이승우 길드장. 어때요? 기삿감으로 딱 좋죠? 그 사실이 드러나도 대한민국이 이카루스 편일까요?]
할 말을 찾지 못한 이승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자국, 그것도 미래가 촉망받는 길드장을 암살한다?
그건 브레이크를 일으킨 것보다도 더 돌이킬 수 없고,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이카루스 길드원도 가만있지 않을 정도로.
계속 잡아떼야 할까?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대체 놈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냐는 점이었다.
그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자신과 한명회, 그리고 한세라뿐인데…….
그때, 수화기 너머로 황한수가 중얼거렸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함정이었다.
분명한 함정이나, 맛보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달콤한 함정이었다.
설상가상 조언을 구할 이사도, 비서도 없는 상황.
결국 이승우는 그 달콤함에 혀를 내밀었다.
“그게… 뭐지?”
[한명회 이사.]
“……?”
[그를 우리한테 넘겨요. 그러면 우리가 가진 증거 모두를 폐기할게요. 뭐, 상당수는 그가 다 덮어써야 폐기되겠지만요.]
역시 개수작이 맞았다.
자신과 한 이사를 떼어 놓고자 벌이는 이간질.
너무나도 원초적이고 원시적인 간계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쥔 패가 강하다고 한들, 물어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다.
잠시나마 희망을 품은 내가 병신이지.
“내가 그런 헛소리에 넘어갈 것 같아?”
[그건 길드장님 마음이고요. 지금 한명회 이사도 우리 쪽 사람 만나고 있죠? 우린 그 사람한테도 똑같이 제안할 거예요.]
“…뭐?”
[이승우 길드장 하나만 물러나면 이카루스는 살 수 있을 거라고요. 흠, 그도 길드장님처럼 의리를 지킬지 궁금하네요. 한명회 이사가 이카루스에 대한 애정이 깊죠? 젊은 길드장보다는 자기가 창단 멤버로 있는 길드를 더 지키고 싶을 거예요, 아마?]
농간이다.
지금 자신은 놈의 세 치 혀에 놀아나고 있는 거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승우는 놈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어차피 국내 실무는 한명회 이사가 다 해 온 거잖아요? 길드장님은 줄곧 해외에 있어서 국내 일은 잘 모르고요. 그냥 원년 멤버인 한 이사가 잘하는 줄 알고 믿고 맡겼는데, 그런 일을 벌인 거죠? 맞죠?]
수화기 너머로 황한수가 능글맞게 웃었다.
[우리가 면죄부를 줄게요. 길드장님이 원한다면.]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