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함정 (4)
콰과과과!
초대형 <오우거>들의 파상공세에 땅이 갈라지고, 활엽수들이 뿌리째 날아갔다.
사방에서 방대한 흙먼지가 일었으며, 바위가 부서지며 굉음을 토했다.
흡사 신들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콰직!
박도진은 자신에게로 날아든 거목을 펄쩍 뛰어 피한 뒤, 연달아 쇄도하는 괴물의 팔 두 개를 비껴냈다.
그러고는 변형된 자신의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들려온 소리는 날카로운 마찰음뿐이었다.
캉!
‘이런……!’
변이를 거친 박도진의 팔도 단단하지만, 상대의 신체도 만만치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들은 골격부터 차원이 달랐다.
박도진의 공격은 비슷한 강도(剛度)의 팔에 허무하게 막혔고, <오우거>는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실소를 지은 뒤 주먹을 휘둘렀다.
퍽!
놈의 무지막지한 주먹에 얻어맞은 박도진이 저 멀리 날아가 활엽수에 등을 부딪쳐 떨어졌다.
다른 초대형 <오우거>들이 날아간 장난감을 찾기 위해 사방을 둘러봤지만, 다행히 숲에 가득한 활엽수들이 박도진을 가려 주고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박도진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까진 손등에서 흐르는 피와 몸 곳곳에 엉망진창으로 달라붙은 나무 이파리들.
그러나 찰나간에 몸을 웅크린 덕분인지, 큰 상처는 없어 보였다.
‘마력을 사용했는데도 자르지 못하다니…….’
예상보다 적은 더 강력했다.
같은 변이의 힘이라도 적은 더 거대하고, 수가 많았으며, 특유의 괴성으로 정신을 흔들었다.
그어어어억!
어쩌면 놈들이 연신 질러 대는 괴성에도 마법이 걸려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간혹 마물 중에는 목소리를 통해 상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거나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놈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박도진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혀 낙심하지 않았다.
자신은 이곳에서 죽어선 안 될 사람이니까.
자신에겐 소중한 딸이 있고,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그간 못난 아빠로 수영이를 외롭고 아프게 한 빚.
강우와 유아라에게 갚아야 할 빚.
죽은 아버지 박광석에게 갚아야 할 빚.
검계의 사람들에게 갚아야 할 빚.
그리고…….
‘씹어 먹을 놈들.’
아이들로 장사를 한 그놈들에게 갚아야 할 빚.
자신은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빚더미 속에서 삶을 살고 있었다.
그 빚을 전부 갚아 주기 전까진 절대로 죽지 않으리라.
쿵!
박도진은 호흡을 고르며 저 멀리서 고꾸라지는 <오우거>를 바라보았다.
분명 강우의 짓일 터였다.
나무에 가려 그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 존재감만은 여과 없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미래에서 온 남자.
여전히 얼떨떨하지만, 그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먼 훗날의 강우가 자신과 안면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날 밤, 그가 들려준 이야기에 자신과 수영이, 유아라는 없었으니까.
다만, 사랑하는 여인과 잃어버린 자식,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앗아간 존재에 대한 복수감만 있었을 뿐이다.
강우는 애써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박도진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분노하고 있다고.
본래의 강우가 어떤 성격인지는 몰라도, 절망적인 풍파가 그를 좀 더 염세적으로 만들었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거두어 주었다.
수영이와 유아라를 구해 주었다.
살게 만들었다.
딸의 병마로 인해 세상에 분노로만 가득하던 자신과 달리 다시 태어난 그는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 지저분한 세상에 체념하지 않고 오히려 깨부수려 하고 있었다.
비록 본인은 자신의 가치를 잘 모르는 듯하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박도진은 어느 순간부터 그를 닮고 싶어졌다.
그처럼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회귀’가 강우의 ‘구원’이라면, 강우는 박도진의 ‘구원’이었다.
비록 아버지는 지키지 못했지만, 더 이상 누군가를 잃지 않을 수 있다면.
남의 강요에 못 이겨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있다면.
이 저주받은 힘으로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화르륵!
박도진의 투지에 따라 그의 보랏빛 마력이 더욱 강하게 요동쳤다.
그어?
그때, 주변을 수색하던 한 초대형 <오우거>가 박도진을 발견했다.
우지끈!
거대한 초목들을 양손으로 커튼처럼 열어젖힌 놈이 박도진을 보며 더러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한껏 들이민 얼굴.
충혈된 눈을 한 바퀴 굴리는 게, 마치 ‘찾았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게 놈이 그 눈으로 보는 세상의 마지막 풍경이었다.
콰득!
박도진이 <오우거>의 눈에 냅다 변형된 팔을 꽂아 버린 것이다.
그아아아아악!
놈이 화들짝 일어선 탓에 그의 몸도 허공으로 치솟았으나, 곧 놈의 눈알 신경을 끄집어낸 박도진은 거대한 몸을 미끄럼틀 타듯 유유히 내려와 바닥으로 착지했다.
그의 손에서 놈의 눈알 일부와 신경이 해파리처럼 나풀거렸다.
박도진은 그것을 바닥에 버리며 여전히 괴성을 고래고래 지르며 몸부림치는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팔이 안 된다면 다른 신체 부위를 공략하면 될 일.
박도진은 절대로 강우에게 누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의 실력이 어쨌든, 자신은 자신의 몫을 해야만 했다.
그게 자신이 유아라 대신 강우를 따라온 이유였으니까.
그아아아아악!
그때,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두리번거리던 놈이 뒤늦게 박도진을 발견했다.
어깨가 위로 솟는다 싶더니, 놈의 묵직한 주먹이 그대로 떨어졌다.
박도진은 그 타이밍에 맞춰 재빨리 도약했다.
하지만 그저 피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그대로 놈의 손등 위에 착지한 뒤, 팔을 따라 거인의 몸을 등반했다.
그아아악!
놈이 달라붙은 벌레를 떨쳐 내려는 사람처럼 질색하며 팔을 이리저리 휘둘렀지만, 그 살에 손을 박아넣은 박도진의 균형감각은 발군이었다.
박도진이 놈의 어깨까지 다다른 가운데, 그와 눈을 마주친 <오우거>가 몸을 떨었다.
“……!”
박도진의 눈이 사납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오우거>는 생전 처음으로 호랑이의 눈을 마주한 토끼의 기분을 느꼈다.
‘조금만 기다려, 수영아. 아빠가 금방 갈게.’
콰직!
거대해진 박도진의 팔이 하나 남은 놈의 눈알에 마저 꽂혔다.
* * *
쾅!
녹색 거인의 팔과 인간의 주먹이 부딪치며 천둥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
예상치 못한 굉음에 초대형 <변이 오우거>는 당황했다.
이상한 일은 소리뿐만이 아니어서, 놈은 자신의 주먹을 받아 낸 인간을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어떻게 여리디여린 인간의 팔이 자신의 주먹을 견뎌낼 수 있는가.
그것도 수십 배나 차이 나는 작은 주먹으로 말이다.
하지만 결과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우드드득!
그아아아악!
인간의 주먹은 자신의 주먹을 막은 것뿐만 아니라 뼈를 으스러뜨리고, 팔과 어깨마저 뒤틀리게 했다.
마치 대장장이 신의 망치가 주먹을 내려친 듯한 통증이었다.
주먹 하나로 초대형 <오우거>를 자지러지게 만든 강우는 서둘러 달려가 놈의 발목에 <피바라기>를 그었다.
스각!
석철의 피를 흡수한 덕분에 강우의 근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빈말로 행성 하나라도 쪼갤 법한 힘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변이를 거쳤다고 한들, 근력 싸움에선 절대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쿵!
곧 양쪽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오우거>가 바닥으로 자빠졌다.
쓰러진 놈이 비명을 지르며 팔다리를 이리저리 흔들었으나, 그 좋은 기회를 놓칠 강우가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놈의 가슴 위로 올라탄 뒤, 심장이라 예상되는 곳에 검은 마력이 치솟은 <피바라기>를 찔러넣었다.
푹!
그와 동시에 사지를 하늘로 쭉 뻗은 놈은 짧은 경련을 끝으로 생을 마감했다.
벌써 네 번째 <오우거> 사냥에 성공한 강우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쿵!
박도진이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곳에서도 <오우거> 하나가 쓰러지는 게 보였다.
‘오?’
강우는 언제가 마지막인지 모를 감탄사를 내뱉었다.
같은 ‘변이’ 종이라 걱정했는데, 박도진도 그 나름대로 잘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간만 끌어줘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 의왕 IC 때 확인한 실력이 박도진의 전부가 아닌 듯했다.
하긴, 딸의 건강이 자신에게 달려 있는데 전력을 다할 순 없었겠지.
그러나 지금의 변화는 마음가짐뿐만은 아니었다.
‘기세가… 달라졌다.’
불과 몇 분 만에 박도진이 내비치는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잘 벼려진 칼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해야 할까.
칼집을 부수고 튀어나온 그의 마력이 한층 더 단단하고 깊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강우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4차 각성이 기대되는군.’
알고 있는 조금의 정보를 활용하자면, ‘변이자’에게도 각성자처럼 ‘성장’이 있었다.
만약 흑혈병을 앓고 있는 박수영을 1차 변이자라 부를 수 있다면, 박도진은 변이의 힘을 완벽하게 다루는 3차 변이자였다.
그리고 그 벽 너머에는…….
‘4차 각성을 이룬 변이자는 본 적이 없다.’
실로 어마어마한 경지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변이자가 마력을 다루는 효율은 일반 각성자보다 뛰어났으니까.
그때가 돼면 한 번 더 붙어 볼 수 있을까?
짧은 감상을 마친 강우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쉴 틈이 없다.
아직도 주변에는 초대형 <변이 오우거>가 다섯이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동굴에서 만난 변이자 소년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어딘가에 숨어 이쪽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겠지.
어쩌면 또 이런 괴물들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강우는 자신을 경계하고 서 있는 <오우거>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가 서둘러야 할 텐데.’
여전히 자신은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 변이자 소년에게 열쇠가 있으리라고는 예상되지만, 확실한 것도 아니었고.
‘만약 놈이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라면…….’
이곳을 강우 혼자만의 힘으로 빠져나가기는 힘들 터였다.
애초부터 이곳은 자신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덫이었으니까.
그건 이카루스가 서유리를 치고, 강우가 그들을 막아 낼 거라는 사실을 상대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카루스에도 놈들의 끄나풀이 있었는지도.’
그래서 강우는 고민 끝에 자신을 대신해 이곳을 부숴 줄 존재를 찾았다.
이미 이야기도 모두 끝낸 상태.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시간이라…….’
상념을 마친 강우는 다시 <피바라기>를 들어 올렸다.
모든 게 시간문제였지만, 눈앞의 적을 살려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섣불리 다가오지 못한 채 머뭇대고 있는 거인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동료들이 속절없이 쓰러진 탓에 겁이라도 먹은 모양이었다.
화르륵!
전신에서 피어난 검은 불길에 <오우거>들이 몸을 떠는 사이, 강우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