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헌터-89화 (90/186)

[89화] 스톰 (3)

“인근 놈들은 모두 처리했습니다.”

“고생하셨어요. 10분간 쉬겠습니다. 그동안 레인저들은 수색을 계속하고, 보급 분배는 포터분들에게 맡기겠습니다. 경계는 하이 포터들이 맡죠.”

“알겠습니다. 모두 휴식이다!”

올해로 48세를 맞이한 스톰 부길드장 장민철이 길드를 정비하는 사이, 길드장 서유리는 소모한 마력을 서둘러 회복하며 눈앞의 어둠을 살폈다.

이곳의 마물은 <흡혈귀>였다.

말 그대로 ‘피를 빨아먹는’ 마물인데,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과 달리 그 모습이 일정하지 않았다.

인간의 외양을 가진 놈도 있지만, 늑대나 박쥐, 심지어 모기나 송충이의 모습을 한 놈도 있었다.

대부분이 중급 마물들.

서유리는 가까운 거리에 차곡차곡 쌓인 <흡혈귀>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달라졌어.’

예전, 아니, 불과 몇 주 전 같았으면 큰 화제가 됐을 <균열>이었다.

은 꽤 보기 드문 <균열>이니까.

사실상 5레벨을 감당할 수 있는 건 5대 길드가 유일했다.

저번에 발생한 <설원 균열>만 하더라도 이산이 실종되고, 만석이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이번 주만 벌써 세 번째야.’

<균열 브레이크> 소동 이후, 고레벨 <균열>이 발생하는 횟수가 증가한 것이다.

마치 다음 단계로 넘어온 것처럼.

대신 하루 2~3개 꼴로 발생하던 1레벨 <균열>이 이번 주는 두 개에 그쳤다고 했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어.’

서유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카루스를 물어뜯기 바쁜 나머지 5대 길드와 달리, 스톰은 <균열>을 처리하느라 요즘 정신이 없는 참이었다.

물론, 이카루스의 부정도 참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보다는 사회의 안정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이카루스의 책임을 묻는 건 그다음.

서유리는 현재 5대 길드장 중 자신의 역할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길드장이었다.

“휴식 끝이다! 모두 일어나!”

휴식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서유리의 마법과 길드원들의 횃불이 어둠을 밝히고, 스톰 길드는 다시 보스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마법계 각성자인 서유리는 마력 감지에 능하므로, 보스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곧 을씨년스러운 적색 활엽수림 한편에 자리한 작은 동굴이 보였다.

감지되는 마력으로 봐선 아마도 저곳이 보스의 은신처인 듯했다.

동굴 안을 슬쩍 살펴본 장민철이 말했다.

“동굴이 깊은 것 같습니다. 레인저들을 보낼까요?”

“아니요. 이걸 써 보죠.”

서유리가 품속에서 손바닥만 한 상자를 꺼냈다.

얼마 전, <언데드>들을 대비해 각성자 연구소에서 개발한 아이템이었다.

일명 <피 냄새>.

직관적인 작명답게 그 기능도 단순했다.

피 냄새를 풍겨 <언데드>와 여타 마물들의 관심을 돌리고자 만든 물건.

<피 냄새>를 건네받은 장민철이 고개를 갸웃대며 물었다.

“이걸로… 될까요?”

“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죠. 그런데 효과는 확실하다고 했어요. 무려 500만 원이나 주고 산 거니까요.”

“어쩐지 요즘 길드 재정이 좀 비더라니…….”

“제 사비로 샀거든요? 이상한 소리 말고 얼른 써 봐요.”

“…알겠습니다.”

장민철은 더는 군소리 없이 <피 냄새>를 동굴 입구에 내려놓았다.

봉인한 마개를 열자, 곧 냄새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윽!”

그러자 가까이 있던 길드원들이 가장 먼저 인상을 찡그리며 코를 막았다.

그만큼 냄새가 지독했다.

일반적인 피 냄새가 아닌, 방금 뽑은 따끈한 핏물에 코를 처박고 있는 듯한 피비린내였다.

지독하다 못 해 정신마저 아득해져 오는 짙은 혈향에 결국 참지 못한 몇몇 포터는 헛구역까지 해 댔다.

그 모습을 미안하다는 듯 바라보던 서유리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말했다.

“…이렇게나 심할 줄은 몰랐네요.”

“…….”

대답이 없어 의아했는데, 어느새 장민철도 코를 막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자, 서유리는 그 모습이 우스워 피식 웃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동굴 안에서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모두 준비하세요.”

서유리가 동굴을 향해 두 팔을 뻗는 가운데, 근접 전투를 맡은 길드원들이 입구의 양옆에 섰다.

사아아아아―

동굴 안에선 바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명 무언가가 날아오는 소리.

양손에 마력을 끌어 올린 서유리가 말했다.

“40미터.”

화르륵!

기다리던 전투원 하나가 동굴 입구로 들고 있던 횃불을 던졌다.

하지만 동굴이 낮고 깊은 탓에 입구만 조금 밝혀졌을 뿐, 내부가 들여다보이진 않았다.

“30미터.”

츠츳!

서유리의 손에서 백청광의 스파크가 튀었다.

그녀가 이끄는 길드명이 괜히 ‘스톰’이 아니었다.

마법계 각성자 중에서도 수준급으로 <전격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자가 바로 그녀였다.

“20미터.”

츠츠츳!

그녀의 양손에 휘감긴 스파크가 요동쳤다.

떨어져 선 장민철의 머리칼까지 쭈뼛 서는 게, 마치 고압선 아래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10미터!”

츠츠츠츳!

“지금!”

서유리의 신호와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전류가 흘러나갔다.

눈으로 쫓을 수도 없을 만치 쏜살같이 뻗어 나간 백청광의 전기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드라큘라>의 몸을 강타했다.

쾅―!

마치 대포 터지는 듯한 소리였다.

굉음이 온 숲을 쩌렁 울리는 가운데, 대기하던 전투원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쳐라!”

“이야아아!”

동굴에서 나온 건 다름 아닌 <드라큘라>.

하지만 아마도 로브였을 것이라 추정되는 놈의 옷은 서유리의 공격에 당해 천 쪼가리로 전락해 있었다.

“……?!”

긴 곱슬머리가 반쯤 탄 놈은 이미 반쯤 정신을 놓은 듯했다.

<드라큘라>는 갑작스러운 공격 세례에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푹! 푹!

키아아아아!

각성자들의 쇠붙이가 사정없이 놈의 몸을 찌르고, 그들이 물러서자 총소리가 사납게 울려 퍼졌다.

탕! 탕! 탕!

하나같이 마력을 머금은 특제 탄환들.

거기에 서유리의 후속 마법까지 퍼부어지자, <드라큘라>의 몸이 넝마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불과 20초 사이에 100번 이상의 공격을 받은 놈은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바닥에 몸을 눕혔다.

상급 마물치고는 퍽 허무한 죽음.

이것이 바로 스톰의 힘이었다.

장민철이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큰 피해 없이 처리했군요. 길드장님의 마법은 언제 봐도 경이롭습니다.”

“하아, 뭘요.”

서유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그간 스톰이 수많은 <균열>을 처리하면서도 사상자 수가 적은 건 다 그녀 덕분이었다.

마력을 아꼈다가 보스를 만나면 모든 마력을 퍼붓는 게 그녀의 사냥법이었으니까.

이미 서유리의 <전격 마법>은 해외 언론에도 몇 차례 보도될 정도로 상당한 위력을 자랑했는데, 그런 그녀의 총공세를 받고도 건재할 마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단, 그러한 사냥법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었다.

사냥을 마치고 나면 온몸이 녹초가 된다는 것.

다른 길드장이라면 생각도 못 할 레이드 법이나, 그녀는 같은 3차 각성자인 장민철을 믿었다.

비록 부길드장으로 있지만, 그 역시 상당한 실력자.

특유의 무욕(?) 정신만 아니라면, 길드장을 해도 충분히 대성했을 사람이다.

“그럼 이쪽 수습을 맡아 주세요. 저는 레인저들과 동굴을 살펴보고 올게요.”

숨을 고른 서유리는 당장에라도 동굴로 들어갈 태세였다.

그러자 보다 못한 장민철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뒷정리는 저에게 맡기시죠. 안 그래도 브레이크 때부터 너무 무리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셔서 따듯한 물에 근육도 풀고 푹 쉬세요. 그래야 또 이카루스와도 싸우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입니까. 이럴 땐 그냥 ‘네, 알겠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장민철이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짓자, 그게 우스웠는지 서유리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이 차가 꽤 나는 편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둘은 더 빠르게 친해졌다.

이제는 친하다 못해 편안하기까지 한 사이.

서유리도 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럴까요?”

안 그래도 서유리도 피로를 느끼던 참이었다.

브레이크 이후로 제대로 쉰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 정도로 <균열> 레이드에 집중해 있던 것이다.

“너희 둘, 길드장님을 모셔라.”

“알겠습니다.”

장민철의 명령에 길드원 둘이 서유리의 뒤로 가 섰다.

그중 하나가 3차 각성자이니, 혹 숨어 있던 마물이 튀어나온들 큰 위협은 되지 못할 터였다.

장민철의 배려에 작게 고개 숙인 서유리가 말했다.

“그럼 부탁드려요.”

“예. 정리가 끝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도착하시면 연락 주시고요.”

그렇게 레이드를 끝낸 서유리는 <균열> 입구로 향했다.

사실은 이번 레이드 말고도 할 일이 많았다.

다른 5대 길드와 이카루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눠야 하고, 서로가 모은 정보도 교환해야 했으며, 지난 브레이크 때 수집한 데이터도 관찰해야 했다.

또한 강원도 횡성에서 나타났다는 일명 ‘천공 바위’와 인천 앞바다에서 목격된 ‘초대형 철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도 알아봐야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몸도, 정신도 너무 지쳤다.

레이드가 끝난 탓인지, 아까부터 몸이 나른했다.

‘오늘은… 푹 자야겠네.’

할 일이 많은 만큼 휴식도 중요했다.

서유리는 밀린 일들을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그런데 그들이 막 활엽수림을 빠져나온 그때였다.

‘응?’

서유리는 입구 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구에 이토록 많은 인기척이 느껴질 리 없는데…….

앞장서서 걷던 두 명의 길드원도 그 존재를 확연히 느낄 정도로 상대는 가까웠다.

‘혹시 기자들인가?’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물은 아니었다.

각성자는 더더욱 아니었고.

서유리의 <마력 감지>를 피해 갈 각성자는 대한민국에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라이트(Light)>.

결국 서유리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완드를 빼내 들고 전방을 밝혔다.

마법의 사정거리를 넓혀 준다는 특제 완드.

그 완드가 보여 준 풍경은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이……?’

<군열>의 입구 쪽에 140~150센티미터쯤 돼 보이는 작은 아이들이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스물은 돼 보이는 숫자.

얼굴이 핼쑥한 아이들은 하나같이 거적때기 같은 옷을 입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마치 외국 할렘가에서나 볼 법한 외양들.

저런 아이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지?

서유리가 아이들을 빠르게 훑는 사이, 불길함을 느낀 3차 각성자 사내가 속삭였다.

“…길드장님, 물러서십시오.”

아이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나같이 헐벗은 아이들이 맨발로 이 서늘한 땅에 서 있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애당초 <균열>에 일반인이 들어올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 순간, 가장 앞에 있던 한 아이의 눈이 번뜩였다.

“피하십시오!”

콰과과과!

3차 각성자 사내가 서둘러 들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

그의 푸른 마력이 사납게 날아갔으나, 아이는 그것을 간단히 피해 버렸다.

‘아……!’

그것을 시작으로 뒤에 서 있던 아이들도 몸을 움직였다.

어느새 느껴지는 마력들.

“……!”

그것은 해일이었다.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마력들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무려 스무 명씩이나.

코앞에서도 느껴지지 않던 마력이 대번에 본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아연실색한 사내가 빠르게 마력을 방출했으나. 이미 선두의 아이가 다다른 뒤였다.

어느새 검 모양으로 변한 아이의 팔이 그의 복부를 꿰뚫었다.

“컥!”

“용표 씨!”

대경한 서유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그는 다른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난도질당하는 중이었다.

강화된 3차 각성자의 신체가 종잇장처럼 너풀거렸다.

낄낄낄!

아이들은 살인귀였다.

오직 살인을 위해 태어난 악귀처럼 아이들은 용표라 불린 사내의 살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으, 으윽!”

남은 건 2차 각성자 사내와 서유리뿐.

서유리가 황급히 마력을 운용했지만, 이미 상당량의 마력을 사용한 상황.

저 스물의 아이들을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뛰어요!”

결국 서유리가 택한 건 남은 길드원의 생환이었다.

만약 단거리 이동 마법인 <공간 전이>가 없었더라면, 그들도 진즉에 이용표의 꼴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

빠르게 <마력 실드>와 <공간 전이>를 펼친 그녀는 아이들을 피해 장민철이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검은 헌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