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스톰 (2)
[이카루스, 움직입니다.]
“알겠다.”
황한수의 신호를 받은 강우가 대답했다.
다행히 브레이크는 순조롭게 마무리됐지만, 강우로서는 아직 제대로 정리된 게 하나도 없었다.
‘놈이 계획을 바꾸었다.’
석탈해는 애초에 강우와 검계가 막을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이번 브레이크 과정에서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놈은 ‘신라 길드 키우기’를 포기한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몇 주 전, 인천 바다 상공에 초대형 철퇴가 목격돼 큰 파장이 일었는데요, 이번에는 강원도 횡성에서 초대형 바위가 목격돼 충격을 낳고 있습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몇몇 전문가들은 이번 현상이 브레이크를 앞두고 벌어지는 전조 현상이라며…….』
묘한 대치가 진행 중이었다.
석탈해도 강우의 존재를 알고, 강우도 석탈해의 존재를 알지만, 서로 부딪치지는 않는다.
당장에라도 놈을 덮쳐야 할까?
아니. 그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첫째로, 자신은 석탈해의 실력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강력한 사도들을 수하로 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만만치 않다고만 어림짐작할 뿐.
둘째로, 석탈해가 죽으면 그 사도란 놈들이 꼭꼭 숨어 버릴 수도 있다.
특히나 임가륜처럼 <균열> 너머로 사라진다면?
강우로선 도무지 잡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의 목표는 석탈해뿐만이 아니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파멸로 몰고 간 그놈들 ‘전부’였다.
“나옵니다.”
그때, 운전석에 앉아 창밖을 지켜보던 박도진이 입을 열었다.
그의 말대로 이카루스의 본관에서 사람들이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
직원들의 퇴근 행렬.
이카루스가 정신없는 와중에 정말로 다 퇴근시킬 리는 없고… 아마도 저들 사이에 누군가를 숨겨 내보려는 속셈일 터였다.
역시나 남아 있던 기자와 누리꾼들은 그 인파 속에서 주요 인사를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 중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차 안에서도 어렵지 않게 쫓아야 할 자를 짚어 냈다.
“저 차를 쫓아라.”
“알겠습니다.”
산 지 제법 돼 보이는 국산 승용차.
그곳에 탄 자는 일전에 만난 적이 있는 한명회였다.
곧 그가 탄 승용차를 따라 박도진이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현재 강우는 이카루스가 샀다는 ‘아이들’을 찾는 중이었다.
놈들도 석탈해의 계획에 놀아났을 뿐이지만, 할 일이 많고 복잡할수록 가장 쉬운 것부터 해결해 나가는 게 좋았다.
강우는 석탈해가 잠잠한 지금, 검계와 공조해 이카루스부터 처리할 생각이었다.
‘이승우는 석철 외에 다른 사도와 접촉했을 확률이 크다. 어쩌면 놈들이 데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지.’
아이들이 이카루스로 오게 된 경위를 조사하다 보면, 꽤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문제는 놈들이 아이들을 어디에 숨겨 두었는지, 도통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혹 판교역에서 아이들의 행방이 묘연한 것과 관련이 있을까?
석철의 금고에서 본 물건들로 짐짓 예상가는 바가 있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었다.
“…….”
당장 이승우의 집무실에 쳐들어가 그 목을 움켜쥐고 묻는 수도 있었다.
오히려 그편이 강우와 잘 어울린달까.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을 잃었는지 황 노인은 완곡히 말했다.
이카루스만큼은 자신의 계획을 따라 달라고.
강우는 어젯밤 그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 * *
“이카루스는 이한과 다르네. 뿌리가 깊은 만큼 무너뜨리기 쉽지 않지.”
황 노인은 놈들을 잡는 데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뒤도 생각해야 하네. 이카루스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 나라가 그들의 비호 아래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이카루스가 없는 한국? 세계 강호들의 좋은 먹잇감일 뿐이지.”
그는 이카루스가 사라진 한국을 걱정하고 있었다.
<균열> 이후 세계는 약육강식 그 자체였다.
군국주의의 부활이라고 해야 할까.
실제로 국경을 넘어 침략하는 경우는 드무나, 강대국이 타국의 존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랬다.
<균열>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소위 ‘약소국’은 강대국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다.
만약 자국에서 발생한 <균열>과 <브레이크>를 막아 낼 수 없다면?
그건 이미 국가로서의 존재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예로, 한때 개발도상국이라 불리며 성장을 거듭하던 작은 국가들은 <균열>이 등장하면서 나라의 경제가 폭삭 망해 버렸다.
주가가 폭락한 것이다.
투자자들은 그 나라에서 돈을 빼고, 투자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언제 마물에 의해 망할지 모르는 나라에 투자할 이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자국에서 발생한 <균열>을 강대국의 손에 맡기는 것.
그러면 강대국은 <균열>도 처리하고, 비싼 전리품도 온전히 챙길 수 있다.
일거양득인 것이다.
황 노인이 걱정하는 건 바로 그것이었다.
이카루스가 사라져 국가의 안보와 국력이 약해진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로 전가될 터.
한국이 망하는 것도 그저 상상만은 아니었다.
“이카루스는 망하더라도 한국은 건재해야 하네.”
하지만 그건 쉽지 않았다.
이카루스의 비리를 캔다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전력도 줄어들 테니까.
거기에 대한 황 노인의 대책은 이랬다.
“방법은 단 하나. 한국에는 제2의 이카루스가 필요하네.”
제2의 이카루스.
그는 이카루스를 대체할 길드가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카루스는 4차 각성자인 이승우가 절반은 먹고 가는 길드.
국내에서 그에 비견될 이는 독종의 김인표가 유일했으나, 그는 전형적인 무인(武人)이지, 정치인(政治人)은 아니었다.
되레 운영 면에선 이승우가 더 나은 수준.
최소한 그는 사람이라도 쓸 줄 알았다.
“그럴 만한 곳이 있겠습니까?”
강우의 물음에 황 노인은 지그시 그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서 묘한 부담감을 느끼던 찰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있지 않은가.”
“……?”
무슨 소리냐는 듯한 강우의 표정에 노인이 말했다.
“굳이 멀리서 찾을 이유는 없지. 자네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이승우를 대체할 수 있을 것 같네만. 아니, 대체라는 말도 웃기겠군. 이승우라고 하늘에 돌덩이를 불러들일 순 없을 테니까.”
“…저더러 길드를 만들라는 말입니까?”
“아니, 신생 길드는 안 되네.”
황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어도 중견쯤 된 길드여야 하지. 갑작스러운 신성의 등장은 되레 반발감을 사기 좋아. 그리고 자네더러 길드장을 맡으라는 게 아니네. 자네는 몸담고 있는 것만으로도 족해. 그런 만큼 길드장이 조금 물러야 하겠지만.”
말투를 보니 아무래도 황 노인은 염두에 둔 길드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어디입니까?”
* * *
황 노인이 말한 길드는 예상 밖의 이름이었다.
문득 ‘그들’을 떠올린 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하지만 황 노인은 검계의 수장.
그곳에 몸담은 이상 그 뜻을 거스를 순 없었다.
‘…정말로 쓸 곳이 생길 줄이야.’
강우는 전날 노인이 건넨 엠블럼을 만지작거렸다.
쌀가마니 다섯 개가 그려진 촌스러운 마크였지만, 나름 랭킹 10위대 길드의 엠블럼이었다.
‘괜한 일을 했나.’
마침 그들을 통해 전북의 브레이크를 막은 터였다.
게다가 검계는 그들의 이름으로 이카루스가 찾던 <변종 인어>까지 잡아냈다.
‘어쩌면 석철의 USB를 건넨 순간부터 이런 계획을 세웠는지도.’
강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차는 계속 달렸다.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
한명회를 쫓는 내내 차 안은 침묵만이 가득했다.
유아라는 청익을 따라 이카루스와 관련된 다른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고, 한명회를 쫓는 건 강우와 박도진, 둘뿐이었다.
뒷좌석에 앉은 강우는 여전히 묵묵히 운전에 집중 중인 박도진을 쳐다봤다.
원래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나, <사막 균열>에서 변이자가 된 두 아이를 본 뒤로 박도진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며칠간 박수영도 만나지 않았다.
잔뜩 경직된 얼굴.
꼭 박광석이 죽었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아마도 그는 여전히 그 사막 속에 남아 있는 듯했다.
눈앞에서 죽어 가던 두 아이를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알 수 없는 사명감에 함몰된 것처럼, 그는 며칠 전부터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강우는 운명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분명 박도진의 운명은 험난한 구불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순탄함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으니까.
자신처럼 말이다.
끼익.
이윽고 한명회를 태운 차가 멈춰 섰다.
그곳은 강남의 한 특급 호텔이었다.
품에서 꺼낸 메모장을 잠시간 살피던 박도진이 말했다.
“한명회가 머무르는 호텔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한명회는 누군가를 만나러 왔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그는 30분이 채 되지 않아 밖으로 나왔는데, 강우는 그의 마력이 어딘가 미세하게 달라져 있음을 깨달았다.
잠시 고민하던 강우가 턱을 쓰다듬었다.
“무언가를 챙긴 모양이군.”
아마도 한명회는 이 호텔 방을 통해 누군가에게서 무언가를 건네받은 게 분명했다.
혹 자신이 예상하는 그 물건인지도 몰랐다.
“쫓아라.”
호텔을 나선 한명회는 또다시 차를 몰고 어딘가로 향했다.
그곳은 강동구였다.
“한명회가 강동구로 향하고 있다.”
[강동구요? 잠시만요.]
수화기 너머로 무언가를 검색하던 황한수가 말했다.
[지금 강동구는 스톰 길드가 레이드 중이에요.]
“레벨은?”
[음, 5레벨이네요. 설마 스톰 길드도 이카루스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니겠죠?]
“모르는 일이지.”
과거, 서유리가 비리나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그게 그녀가 깨끗한 인간이라는 증거가 되지는 않았다.
그건 오직 그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니까.
그사이, 한명회는 다시 강동구의 한 거리에서 어떤 남자와 접촉했다.
아마도 이카루스의 길드원인 듯했는데, 그는 한명회가 건넨 물건을 받아 들고는 황급히 차에 올랐다.
이토록 번거로운 운송이라면 분명 중요한 물건일 텐데…….
도무지 보이지 않는 아이들과 마력이 느껴지는 작은 물건, 그리고 석철이 금고에 보관한 전자 기기들.
서서히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
‘아무래도 내 예상이 맞는 것 같군.’
마침내 남자가 도착한 장소는 황한수의 예상대로 스톰 길드가 들어간 <균열> 앞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퍼즐이 완성되었다.
차에서 내린 남자가 천천히 구경꾼이 모인 <균열> 쪽으로 다가가는 가운데, 강우가 입을 열었다.
“이카루스와 스톰은 한편이 아니다.”
[근거는요?]
“놈들은 이번 균열에 변이자를 풀 생각이다. 아마도… 스톰을 공격할 생각인 것 같군.”
[예?! 스톰을요?]
황한수의 경악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이카루스가 대뜸 스톰을 공격한다니…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말도 안 돼요. 아무리 이카루스가 궁지에 몰렸다고 해도 그런 미친 짓을…….]
“궁지에 몰린 쥐는 뭐든 할 수 있는 법이지.”
[그렇다고 해도요. 이승우가 바보가 아닌 이상 국내 전력을 깎아 먹을 생각을 한다니… 이해가 안 돼요.]
“꼭 이해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이해할 수 있는 놈이었으면, 브레이크를 일으킬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다.”
[…….]
여전히 황한수는 믿지 못하는 기색이지만, 이미 강우는 강한 확신을 가진 상태였다.
아마도 한명회가 길드원에게 전달한 물건은 <사이트 스톤>일 터였다.
그리고 그곳에 숨겨져 있는 건… 바로 ‘변이자 부대’.
강우가 차 문을 열며 말했다.
“놈이 들어가는군. 따라 들어가겠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