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스톰 (1)
둔내면의 <사막 균열>이 클리어된 후, 그것을 기점으로 브레이크는 빠르게 정리되어갔다.
스물네 번째 브레이크를 끝으로 더 이상 브레이크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처음부터 <사막 균열> 클리어가 목적이었던 것처럼.
미처 처리하지 못한 마물들이 종종 도심에 나타나 소란을 벌이기도 했으나, 24시간 상시 대기 중인 각성자들에 의해 금방 정리되었다.
거기에 강우와 검계의 활약이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한국이 갑작스러운 브레이크 소동으로 큰 혼란에 빠졌으나, 가까스로 진압…….』
『이카루스는 이번 사태의 종결을 알리고, 피해 복구에 최선을…….』
『국제 헌터 연합, UHN은 한국의 균열 관리 실태에 의문을 품고 대대적인 전수조사를 한국 정부에 요구…….』
하지만 브레이크의 종결과 달리 한국은 전 세계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이번 사태가 꼭 한국에서만 일어나리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변종 인어>들이 동해안으로 나갔더라면?
한반도를 벗어난 <그리핀>들이 타국으로 날아갔더라면?
상상만 해도 아찔한 일이었다.
북한도 이때다 싶었는지, 한국을 비난하는 성명을 계속해서 발표하는 중이었다.
“지금 마스터께서는 부재중이십니다.”
“벌써 나흘째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 생각이지? 내가 직접 만나 이야기하겠다!”
이카루스의 빌딩 앞도 세계 속 한국 못지않게 시끄러웠다.
며칠째 5대 길드와 정부 인사, 기자와 누리꾼들이 몰려와 항의를 벌인 것이다.
흡사 이한 때의 사태를 보는 것 같은 광경.
하지만 그때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누구도 섣불리 이카루스의 빌딩 문을 열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전히 이카루스는 대한민국 1등 길드이며, 이승우는 명실상부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4차 각성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작정했는지, 흥분으로 얼굴이 붉어진 백호 길드장 유지태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비켜라.”
“죄송합니다. 이카루스 직원들이 작금의 상황에 심리적으로 위축돼 있는 상태입니다. 더 이상의 혼란은 불가합니다.”
“비키라고 했을 텐데?”
유지태의 눈이 여과 없이 살기를 드러내며 이글거렸다.
하지만 그 앞을 막아선 여자, 한세라도 괜히 이승우의 비서가 된 게 아니었다.
잠시 움찔했지만, 단지 그뿐.
그녀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불허합니다. 이건 불법 침입이며, 도발입니다. 설마 이카루스와 전쟁이라도 선포하시겠다는 겁니까?”
“네가 감히……!”
유지태가 금방이라도 한세라를 잡아먹을 듯 이를 갈았으나, 그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한국 길드 랭킹 2위인 백호와 1위 이카루스가 맞붙는다면, 그야말로 한국이 콩가루 국가임을 전 세계에 드러내는 꼴이나 다름없다.
브레이크 사태로 국가의 위신이 바닥으로 처박힌 가운데, 자신마저 거기에 똥칠을 더할 순 없는 노릇.
곧 유지태는 살기를 거뒀다.
“오늘 일은 잊지 않겠다. 그리고 이승우 길드장에게 똑똑히 전해라. 언제까지 그렇게 피할 순 없을 거라고.”
“옳은 결정, 감사합니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한세라는 유지태의 뒤에 서 있던 송학 길드장 송민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송민우 길드장님, 무슨 할 말이라도?”
“…아니다.”
유지태가 물러난 이상, 송민우도 굳이 더 나서지 않았다.
김인표라도 함께 왔으면 모르겠지만, 현재 그는 5레벨 <균열> 레이드에 나선 상황.
그가 돌아와야 무슨 일을 벌여도 제대로 벌일 수 있을 듯싶었다.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인 한세라가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업무가 바빠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기자님들은 따로 이카루스의 발표가 있을 겁니다. 그럼 모두 좋은 하루 되시길.”
그녀는 수많은 인파를 뒤로한 채 다시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 * *
“제기랄!”
쨍그랑!
이승우가 집어 던진 재떨이가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이 조각났다.
소파에 앉은 한명회가 길드장의 분노를 묵묵히 지켜보는 사이, 노크와 함께 비서 한세라가 들어왔다.
그녀를 본 이승우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됐어?”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그제야 이승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 모인 세 사람은 현재 이카루스가 처한 위기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었다.
“만석은?”
“그날 이후로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기자들을 만나는 것 같지도 않고요. 별다른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개새끼들… 대체 무슨 꿍꿍이지?”
이승우는 이를 갈았다.
대뜸 석철과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낸 놈들은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
차라리 돈이라도 요구하면 마음이 편하겠지만, 놈들은 그 뒤로 침묵했다.
주도권을 자신들이 쥐었다는 걸 과시라도 하듯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균열> 입찰에 빌빌대던 놈들이 자신을 겁박하려 들다니… 이승우의 자존심은 크게 상했다.
“통신은? 잘 처리했어?”
“예. 부조금도 넉넉하게 보냈습니다.”
“잘했어.”
그날 메시지를 전한 길드원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전국에서 브레이크가 벌어지는 와중이었으니, 사람 하나 죽일 핑곗거리는 차고 넘쳤다.
이승우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줄곧 분위기를 살피던 한명회가 입을 열었다.
“아직 별다른 말이 없는 걸로 봐선, 놈들도 그 사진 외에 확실한 증거가 없는 듯합니다. 일단 놈들은 내버려 두고, 국내 여론부터 달래는 게 좋겠습니다.”
“어떻게?”
눈살을 찌푸린 이승우가 짜증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지금 밖에 기자들 쫙 깔린 거 안 보여?! 지금이야 김인표, 그 새끼가 없어서 그렇지, 놈까지 와서 까불 걸 생각하면… 제기랄! 애초에 허와 척을 지는 게 아니었는데……!”
이승우는 ‘석철몰이’ 계획을 짠 한명회를 원망하는 중이었다.
괜히 놈을 도발했다가 모든 일을 망친 게 아닌가.
놈을 멕시코로 보내지만 않았어도, 허의 사절과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어도 이렇게 될 일은 없었을 텐데…….
처음 계획대로 석철과 이카루스가 브레이크를 처리했으면, 지금쯤 자신은 국민 영웅이 되어 있을 터였다.
어쩌면 계획대로 5대 길드 통합론도 끌어낼 수 있었겠지.
‘만약 우리가 하나였다면, 더 빠르게 막아 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인명 피해도 더 적었을 겁니다. 우리의 부모, 형, 누나, 동생이 죽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하나가 된 대한민국, 하나 된 이카루스입니다!’
멘트까지 준비해 놓은 상태였는데…….
하지만 모든 걸 한명회 놈이 망쳐 버렸다고, 이승우는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자신이 석철에 대해 불편함을 드러낸 것과 허 쪽을 견제하기로 한 생각은 이미 까마득히 잊어버린 그였다.
‘이걸 길드장이라고 여태껏 섬겼다니…….’
한명회는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뀐 이승우를 보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이래서 길드장은 머리 좋은 놈이 맡아야 하는 건데.
이승우는 무력으로 길드장을 뽑으면 왜 안 되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하지만 어쩌겠나.
한명회는 이승우가 수장으로 있는 이카루스의 부길드장.
둘은 운명 공동체였다.
이승우가 망하면, 자신이 망하는 것도 자명한 일.
한명회는 애써 화를 참으며 말을 이었다.
“김인표야 단순한 인사이니, 해외 원정에 끼워 주는 조건으로 회유할 수 있을 겁니다.”
“…해외 원정에?”
“예. 지금까지 이카루스는 다른 5대 길드의 해외 원정을 막아 왔습니다. 이카루스의 외교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이번에 그걸 역으로 이용하는 겁니다.”
확실히 그 정도 조건이면 김인표도 혹할 듯싶었다.
놈도 자신처럼 ‘명성’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운영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놈은 독불장군 성향이 있었다.
소수로 길드를 운영하는 것엔 그러한 이유도 숨겨져 있으리라.
만약 그런 놈에게 해외에서 활약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떻게 역으로 이용한다는 거지?”
이승우가 관심을 보이자, 한명회가 씩 웃으며 답했다.
“이카루스 외에 다른 길드가 얼마나 외교에 무용한지 세계에 알려 주는 겁니다. 예를 들어 김인표가 일본과 합동 작전에 나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김인표가 합동 작전에?’
― 뭐?! 쪽발이 새끼들한테도 발리고 왔다고? 네놈들이 사람이냐?!
― 이 허접한 놈들아! 지금부터 1년이 지났는데도 2차 각성을 못 이룬 놈들은 벌레로 취급하겠다. 따라 해! 나는 벌레다!
그간 보여 준 김인표이 행실이라면,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날 듯싶었다.
이승우의 표정이 조금 살아났다.
“난리가 나겠군. 그럼 유지태와 서유리는?”
송학 길드장 송민우야 애초에 이카루스에 맞설 깜냥이 되지 못하니 신경 쓸 것 없었다.
놈은 누군가를 뒤에 업어야만 목소리를 내는 쫄보였으니까.
하지만 유지태와 서유리는 달랐다.
그 둘은 사실상 김인표보다도 더 까다로운 자들.
그들을 해결하지 못하면 이 사태를 헤쳐 나가기 힘들었다.
“당분간 균열 분배에서 손을 떼겠다고 하십시오. 그럼 어느 정도 납득할 겁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할 텐데?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할 놈들이야.”
“괜찮습니다. 송학은 당연히 반길 테고, 백호와 스톰은 둘 중 하나만 설득하면 될 테니까요.”
“둘 중 하나만?”
이번에도 이해하지 못한 이승우가 눈살을 찌푸리자, 한명회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우린 그동안 준비한 게 있지 않습니까.”
“아……!”
그제야 그 뜻을 깨달은 이승우의 표정이 번뜩였다.
사실 김인표는 브레이크 과정에서 처리됐어야 할 놈이었다.
그게 자신이 ‘변이자 부대’를 만든 이유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브레이크는 이승우의 예상보다 더 큰 규모로 일어났고, 손 하나도 아쉬운 마당에 김인표를 죽일 순 없었다.
당연히 ‘변이자 부대’를 브레이크에 써먹을 수도 없었으니, 기껏 준비한 ‘조커’가 무용해진 셈.
한명회는 이번 기회에 그 조커를 꺼낼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걸 유지태와 서유리에게 써먹는 거지요.”
“…….”
이승우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김인표와 달리 유지태와 서유리는 이카루스의 미래에 있어서도 필요한 인재였다.
그들은 유능했다.
훗날 이카루스가 세계를 제패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인재들.
하지만… 훗날을 기약하기엔 당장의 상황이 너무나도 좋지 않았다.
‘대의를 위해선 희생도 감수해야 하는 법이다.’
이승우는 결심했다.
유지태와 서유리 중 한쪽을 없애 버리기로.
“그럼 유지태를 없애지. 서유리는 아까워.”
하지만 한명회의 생각은 달랐다.
“유지태보다는 서유리 쪽이 더 합당합니다. 국내에 그녀를 추종하는 인사가 많습니다. 대다수가 젊은 층인데… 그들을 계속 두어선 위험하죠. 또한, 김인표가 해외 원정에 들어오고 서유리가 사라진다면, 백호 혼자서는 우리를 견제하지 못할 테고요. 어쩌면 이번 위기가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길드장님, 지금은 사사로운 정을 논할 때가 아닙니다.”
“…….”
한명회도 이승우의 음흉한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러니 더더욱 그녀는 죽어야만 했다.
마침 적당한 기회도 있었다.
아까부터 태블릿을 살피던 한세라가 말했다.
“약 세 시간 뒤에 스톰 길드 레이드가 있습니다.”
“난이도는?”
“레벨 5입니다.”
“좋군. 일을 벌이기 딱 알맞은 난이도입니다.”
한명회의 말에 이승우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회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균열>은 계속해서 발생했다.
그들은 쉴 틈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서유리가 죽는 이유였다.
“제기랄…….”
이승우도 이번 결정이 결국엔 제 살 깎아 먹기가 될 거라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일단 자신이 살아야 하는 것을.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곳으로 아이들을 보내. 아쉽지만… 서유리를 죽인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