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도전장 (3)
황 노인이 말을 계속했다.
“사람을 읽을 수 있는 눈이지. 상대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 어떤 과거와 어떤 감정을 숨기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는 눈일세. 심지어 아주 가끔은 약간의 미래를 보기도 하지. 나는 그간 이 눈으로 수많은 이들을 읽어 왔네.”
강우는 묵묵히 황 노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말들을 하는 걸까.
자신의 비밀을 엿들은 것에 대한 보답일까?
“그런데 말이야, 이상하게도 가끔, 아주 간혹 이 눈이 까막눈이 될 때가 있다네. 지금까지 모두 두 번 있었지.”
강우는 황 노인을 돌아봤다.
과거, 황 노인은 <심안>을 가졌다고 했다.
그런 그가 읽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분명 거기엔 특별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그중 하나는 자네일세. 그리고 다른 한 명은…….”
황 노인은 뜸을 들였지만, 강우는 어쩐지 그 이름을 알 것 같았다.
“석탈해. 바로 자네의 원수라는 그자의 이름이지.”
역시나 다른 한 명은 ‘그놈’이었다.
“사실 꽤 오래전의 일이라네. 신라가 만들어지기도 전의 일이지.”
신라가 만들어지기 전이라고?
강우가 그 말을 의아하게 곱씹는 사이, 황 노인이 오래된 기억을 꺼냈다.
“그자가 한 번 양복점에 들른 적이 있었네.”
이번만큼은 강우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혀 짐작도 못 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석탈해가 검계를?’
하지만 황 노인의 다음 말은 더욱 상상을 초월했다.
“딱히 별일은 없었네. 그저 오래된 양복점이 특별해 보여 들렀다며 한 3분 정도 가게를 둘러보고 나갔지. 그런데 이상한 건 청익도, 한수도 그자를 기억하지 못하더란 걸세.”
석탈해가 무슨 수작을 부린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낮에 찾아온 상대를 그들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으니까.
하지만 황한수는 그렇다고 해도 청익은 어떻게?
정신 계열 마법은 효과에 비례해 거부감과 부작용도 컸다.
당연히 고위 각성자일수록 더 강한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청익이 새까맣게 잊을 정도라면…….
석탈해의 정신 지배 능력은 이미 예상 범위를 한참이나 벗어난 수준이었다.
“왕린을 불러 기억을 되살려 보려 했지만, 청익은 끝내 기억하지 못하더군.”
석탈해가 이미 검계와 접촉을 마친 것도 모자라, 기억마저 손대고 갔다니.
‘놈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대체 무얼 하려는 거지?
대체 놈의 진짜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강우의 머릿속이 복잡한 가운데, 황 노인의 말은 계속됐다.
“그 뒤로 그자를 찾아내려 했지만, 통 보이지 않았네. 그러다 그가 한 길드의 수장이 됐다는 걸 얼마 전에 알게 되었지. 아마 회동이 끝나고 얼마 뒤였을 걸세.”
황 노인이 묘한 눈빛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이쯤 되니 궁금해지지 않겠는가. 그자가 내 기억을 지우는 데 실패한 건지, 아니면 일부러 남겨 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쩐지 후자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강우는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마치 잘 짜인 각본처럼 느껴졌다.
자신과 석탈해가 주인공인 각본.
황 노인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자가 다녀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 자네가 나타났네. 내 눈으로도 읽을 수 없는 두 남자가 비슷한 시기에 날 찾아온 걸세.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내가 겪은 두 번의 만남이 그저 우연에 불과해 보이는가?”
“…….”
그건 강우도 답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과거로 다시 돌아온 자신과 예상치 못한 행보를 보인 석탈해.
자신의 회귀와 놈이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놈의 가면 뒤엔 어떤 얼굴이 있는지.
이제는 강우도 잘 가늠이 가질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잘 알았다.
황 노인은 그저 인정에 끌려서 자신을 거둔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서 석탈해와 같은 것을 읽은 것이다.
황 노인은 직감적으로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자신이 휘말려 들었음 느낀 듯했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물었다.
“혹, 그자도 자네처럼 미래에서 온 존재인가?”
“…그것까진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예상할 뿐입니다.”
“그럼 이번 브레이크는 그자의 작품인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황 노인은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자네와 그자의 싸움이기도 하겠군.”
“…….”
강우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황 노인은 은연중에 묻고 있는 것이다.
석탈해와의 싸움에 자신들을 끌어들인 거냐고.
처음 검계에 발을 들일 때부터 강우는 검계를 이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검계를 통해 가면을 얻고, <백귀 균열>에 참가하고, 그들에게서 정보를 구하고.
모든 게 석탈해를 잡기 위한 준비에 불과했다.
그러니 황 노인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비로소 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랬군.”
황 노인은 이번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다시 또 침묵.
주변 공기가 점차 어색해질 무렵, 공원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던 황 노인이 강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행여라도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럴 필요는 없네. 우리는 원래 다 그런 존재가 아닌가. 누구나 스스로를 위해 살아가는 법이지.”
“단…….”
황 노인이 말을 덧붙였다.
“그 결정에 무고한 누군가가 희생되어서는 안 되네.”
황 노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다시 묻지. 자네에게 검계란 무엇인가? 여전히 신분을 감출 가림막에 불과한가? 자네의 복수를 위해 희생할 소모품에 불과한가?”
아니다.
그것만은 확실히 대답할 수 있었다.
처음 검계를 찾아왔을 때와 지금은 명백히 그 마음가짐이 달랐다.
이미 강우는 그들의 호의를 받았고, 그것이 진심임을 익히 알았다.
여전히 집에서 석탈해의 동태를 살피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유아라가 그렇고, 박도진이 그러며, 지금도 브레이크를 막기 위해 열심히 애쓰고 있을 청익과 황한수가 그랬다.
그들은 전생에도 존재했으나, 과거의 그들이 아니었다.
이미 그들은 이번 생에서 강우의 인생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 그들을 소모품이라 일컬을 수 있을까?
아니다.
그랬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도 않았겠지.
강우는 그들을 진심으로 대했고, 조금의 거짓도 남겨 두지 않기 위해 진실하게 대했다.
그것이 그들의 마음에 보답하는 길이었으니까.
강우는 황 노인의 시선을 마주하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황 노인은 이번에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윽고 황 노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됐네. 자네는 달라졌어. 이전에는 공허만이 가득했는데, 이제는 열의를 품었지. 슬픔만 가득하던 눈에 애환을 품고, 자신뿐만이 아닌 다른 이의 삶도 담았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자네를 지지하네. 내가 말했지, 우리는 세상의 활인검이 되기를 자처한다고. 이제 우리의 적은 같아졌어. 함께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지.”
― 우리의 적은 같아졌다.
그 말에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으나, 지금 이 순간, ‘적’은 명백했다.
황 노인이 지팡이를 마치 검처럼 쥐며 말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검계는 자네와 항상 함께할 걸세. 자네의 복수에 동참한다는 게 아니야.”
그 비장한 표정을 보며, 강우는 그제야 지팡이의 정체를 알 것도 같았다.
곧 지팡이의 끝을 잡아당기자, 그 안으로 서슬 퍼런 검날이 보였다.
그건 지팡이의 외양을 한 검.
검계의 수장만이 사용한다는 <삼인검>이었다.
검날에 세세하게 새겨진 북두칠성이 오후 햇살에 번뜩였다.
“다만, 우린 같은 인간의 적을 처단하는 걸세. 나와 우리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그것은 일종의 맹세였다.
과거의 황 노인이 그랬듯, 이번 생의 황 노인도 석탈해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그 비장한 모습에서 강우는 문득 그가 죽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이 과거의 노인과 자신의 관계를 고백할 좋은 타이밍임을 알았다.
“…….”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젠가는 말해야 할 이야기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강우는 이를 악무는 것으로 모든 대답을 대신했다.
* * *
황 노인에게서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받은 뒤, 강우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브레이크에 집중했다.
비록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작은 혼란이 피었지만, 강우는 그것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놈을 베는 것뿐. 달라지는 건 없다.’
그 뒤로 강우는 박도진, 유아라와 함께 저택에서 줄곧 대기했다.
수영이는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전까지 왕린 쪽에서 돌봐 주기로 했다.
박도진이 언제 출동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저택에 계속 있을 순 없기 때문이다.
“인천 쪽 미궁은 어떻게 됐지?”
강우의 물음에 유아라가 답했다.
“그쪽은 황한수 씨가 감시를 맡아 주기로 했어요.”
그거면 충분했다.
설령 <미궁>이 생겨난다 해도 임가륜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섬은 석철의 <역(力)>으로 인해 흔적도 없이 함몰돼 버렸다.
놈들이 날 수 있지 않는 한, 바다 위를 건너오긴 힘들 터였다.
“만약 균열이 재발생하면 즉각 보고해라.”
“알겠어요.”
“그리고 오늘 아침에 왕린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일이지?”
“한선화 씨가 다량의 비늘을 구한 모양입니다.”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박도진의 말에 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되는 대로 모두 사겠다고 해라.”
“알겠습니다.”
대량이라도 보관에는 문제가 없었다.
강우에게는 <사이트 스톤>이라는 무한한 금고가 존재했으니까.
마물의 산물인 비늘을 보관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는 금고가 말이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일이 벌어지길 기다리는 것뿐.
그러고 나서 다시 나흘 뒤.
『전라남도 완주군에 균열 브레이크가 발생했습니다!』
『경기도 시흥시의 한 아파트 단지에 고블린 부락이 등장했습니다!』
『강릉 안목거리에 갑작스러운 브레이크가……!』
마침내 모두가 기다리던 <균열 브레이크>의 신호탄이 쏘아졌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