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역사 (4)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원.
계절이 여름으로 향하면서 요즘 공원은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로 붐볐다.
각자의 반려견, 반려묘를 데리고 나와 걷는 사람도 있고, 친구 혹은 연인, 또는 가족들과 산책을 함께하는 이들도 있었다.
벤치나 공원 정자에 앉아 간단한 음식을 먹으며 담소하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평소라면 그 모두를 부러운 듯 지켜보았을 유아라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회귀자라니…….’
지금,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녁 식사 도중에 강우가 들려준 이야기들.
당시에는 잘 와닿지 않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엄청난 내용들뿐이었다.
그때, 손을 잡고 걷던 박수영이 그녀를 불렀다.
“언니!”
“응? 왜? 화장실 가고 싶어?”
“아니요~ 우리 잠깐 저기 앉았다 가요. 다리 아파요.”
“아… 그러자.”
유아라는 박수영과 함께 벤치에 앉았다.
노란빛 가로등이 은은하게 비치는 자리였다.
“오늘도 사람이 엄청 많네요.”
“그러게…….”
하지만 유아라의 대답은 평소와 달리 영혼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박수영이 물었다.
“언니, 무슨 고민 있어요?”
“…응? 아니야. 고민은 무슨.”
“고민 있는데요, 뭘. 원래대로였으면 언니가 벌써 아이스크림을 사 줬을 텐데, 오늘은 빈손으로 왔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공원에 들어오기 전에 수영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주지 않았다.
아이의 섬세함에 감탄하면서 유아라는 씩 웃었다.
“언니가 수영이를 못 이기겠네. 사실 언니가 요즘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음, 어… 외계인이었대.”
“…외계인이요?”
“응. 그런 비슷한 거. 그냥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원래 다른 친구도 많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었고, 나이도 엄청 많았던 거지.’
“친한 사이였어요?”
친하다.
그 남자와 자신 사이에 그런 단어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어색한 관계에 더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마냥 어색하기만 하냐면, 또 그렇지는 않았다.
“좀… 모호한 관계야. 가까워졌다 싶으면 멀게 느껴지는? 외계인이라 그랬나?”
“에이, 그거 밀당이네요.”
“…미, 밀당?”
여섯 살짜리 소녀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저번에도 그렇고… 요즘 어린이집에선 대체 어떤 대화가 오가는 거지?
하지만 유아라의 머릿속이 어떻든 박수영은 진지했다.
그녀가 앙증맞은 두 손을 꼬옥 마주 잡았다.
“외계인과의 밀당이라니… 굉장해요!”
“…그런가?”
“그렇죠!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초롱초롱한 박수영의 눈을 보며 유아라는 머쓱하게 웃었다.
하긴, 여섯 살짜리 아이한테 무슨 이야기를 듣겠는가.
아이들의 눈엔 이 세상 모두가 신비한 환상의 나라일 텐데.
하지만 수영이의 다음 말은 그런 유치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외계인 친구는 그동안 엄청 외로웠겠어요.”
“응? 무슨 말이야?”
“비밀을 감추고 있었잖아요.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사람인 척하면서 살았을 텐데… 쓸쓸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겠네.”
“원래 비밀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꽁꽁 감추는 법이거든요. 비밀을 밝히면 친구가 떠나갈까 봐요.”
“…….”
유아라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고민에 잠긴 채 박수영만 바라보았다.
“우리 아빠도 그랬어요. 사실… 저는 알고 있거든요. 우리 아빠가 다른 아빠들과 다르다는걸요. 아빠가 변신한 모습을 몇 번 봤어요. 하지만 전 그게 더 좋아요! 세상에 저밖에 없는 아빠잖아요! 변신 아빠!”
박도진을 떠올린 탓인지, 박수영의 눈이 더 또랑또랑해졌다.
“하지만 아빠한텐 그걸 비밀로 할 거예요. 아빠가 먼저 말해 줄 때까지요. 그게 우리가 서로를 아껴 주는 방법이에요.”
외계인은 한강우만이 아니었다.
언니를 잃고 미쳐 날뛰던 자신도 외계인이고, 딸을 위해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던 박도진도 외계인이었다.
세상의 풍파에 휘말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부적응자들.
자신들이 외계인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도 용기 있게 고백한 걸 보면, 역시 외계인은 용감한가 봐요. 부러워요, 외계인 친구라니! 저라면 더 잘해 줄 것 같아요. 외계인 친구라면,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관계잖아요!”
“맞아, 수영아. 네 말이 다 맞아.”
“그런데요, 언니. 혹시 그 친구… 저도 보여 줄 수 있어요? 외계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거든요. 진짜 비밀로 할게요!”
천진난만한 수영의 표정에 유아라는 슬며시 웃었다.
“그래. 다음에 외계인 친구한테 물어보고 꼭 보여 줄게.”
“정말요?! 약속한 거예요! 꼭이요!”
신나게 소리친 박수영은 새끼손가락을 건 뒤, 발도 닿지 않던 벤치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가요, 언니! 얼른 산책 끝내고 아이스크림 먹어야죠!”
그러고는 혼자 폴짝폴짝 앞으로 뛰어나갔다.
“…….”
유아라도 곧 벤치에서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어린이집을 고소하려던 생각은 정정이다.
요즘 어린이집을 아이들을 참 잘 가르치는 듯하니까.
복잡하던 머릿속이 구름이 모두 걷힌 하늘처럼 맑아졌다.
어쩌면 오늘 밤은 유독 포근한 밤이 될 것 같았다.
* * *
유아라가 달라졌다.
강우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일말의 혼란조차 사라진 아주 평범한 눈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감정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왜 그렇게 보지?”
“제가 어떻게 보는데요?”
“어딘가… 아니다.”
늦은 밤.
물을 마시러 잠시 거실로 나온 강우는 그대로 유아라를 지나쳐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물을 마시고 거실로 다시 나올 때까지도 그녀는 줄곧 그곳에 서 있었다.
그 시선에 참다못한 강우가 다시 물었다.
“…왜 그렇게 보지? 서열 정리라도 하고 싶은 건가?”
이번 대답은 달랐다.
“고마워요.”
“…무슨 뜻이지?”
“오늘, 당신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다고요.”
“…실없군. 고마워하라고 들려준 이야기가 아니다. 도망치라고 들려준 이야기지.”
“그게 아니라는 걸 어린이집 선생님이 알려 줬거든요.”
“…어린이집 선생님?”
“그런 게 있답니다. 그럼 잘 자요.”
할 말을 마친 유아라가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데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에서 작은 흥얼거림이 들려왔다.
“고슴도치 같은 사람.”
“……?”
하지만 곧 발소리는 사라졌다.
거실에 남겨진 강우는 멍하니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뭐지?’
유아라의 행동에서 어쩐지 한선화가 떠오른 강우였다.
어째서 유아라가 한선화와 비슷해진 거지?
― 명심해. 나 말고 다른 여자는 모두 여우야. 아주 매력적이지만, 육식동물이지.
언젠가 혜진이가 들려준 말은 이런 의미였나.
‘위험하다.’
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방으로 향했다.
* * *
<사이트 스톤>의 세상.
콰르르릉!
석철은 죽음이 200번이 넘어갈 때부터, 헤아리기를 포기했다.
잠에서 깨어나면 어김없이 검은 쐐기가 날아들고, 벼락이 떨어지고, 하늘에서 페스카즈가 내려쳐진다.
처음에는 공략법을 찾아내려 애썼으나,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도무지 빠져나갈 방도가 없던 것이다.
게다가 석철은 모르고 있지만, 그가 죽음을 되풀이할수록 강우는 강해졌다.
그가 죽음을 거듭할수록 이 무한적인 처형도 난이도가 상승하는 것이다.
첫째는 이 <사이트 스톤>의 세상이 마물의 마력을 흡수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둘째로는 <피바라기>가 석철의 피를 흡혈했다는 점에서 그랬다.
‘어째서… 어째서 금제가 풀리지 않는 거냐!’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도무지 금제(禁制)가 풀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도들에게 건 금제는 절대적이나, 그 권한도 철저히 석탈해에게 있었다.
‘벌써 사라진 사도만 셋이다. 그분이 그걸 모를 리 없으실 텐데……!’
분명 그의 주군도 사도들의 부재를 깨달았을 터.
그렇다면 금제를 푸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석탈해와 사도들의 관계는 석철과 조릭의 관계처럼 가볍지 않으니까.
‘분명 뭔가 있다. 이 사이트 스톤은 보통 스톤이 아니야……!’
분명 석탈해가 금제를 풀었을 텐데도 자신은 여전히 구속에서 풀려나지 않았다.
그건 이곳에 주군의 신통력을 차단할 만큼 강력한 차단 주문이 걸려 있다는 뜻.
대체 이곳의 주인이 누구이길래…….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결국 남은 건 죽음뿐인가.’
석철은 좌절했다.
금제가 풀리지 않는 이상, 도무지 이곳을 빠져나갈 방도는 없어 보였다.
그리하여 그는 어느 순간부터 검은 쐐기를 피하지 않았다.
벼락으로부터 달아나지 않았다.
역(力)의 힘에 저항하지 않았다.
매일 찾아와 조롱하는 조릭에게 분통을 터뜨리지 않았다.
기계처럼 꽂는 <피바라기>에 신음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마치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이놈, 완전 정신을 놨는데?”
여느 때처럼 칼을 찌르러 온 조릭은 멍한 석철을 보며 고개를 갸웃댔다.
그러자 옆에 있던 투움바가 말했다.
“한강우… 그놈도 석철만큼이나 미친놈이다.”
“그러니까. 대체 둘이 무슨 관계이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알고 싶지도 않다.”
투움바는 두려운 듯 몸을 떨었다.
겁 없기로 소문난 그가 떠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본 조릭이 물었다.
“움바야… 우리 괜찮은 걸까?”
“글쎄, 이제 우리에게 안전한 곳은 없다. 바깥에는 석철의 동료인 사도라는 놈들이 있고, 이곳에는 미친 인간 하나와 수준을 알 수 없는 데스 나이트가 있다.”
“시불,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조릭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해.”
석철을 팔아 겨우 살아남았으나, 이제는 다시 새로운 살길을 찾아야 할 둘이었다.
강우도 언제까지나 이 짓을 되풀이하진 않을 테니까.
이 일이 끝나면 그들의 쓰임도 끝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조릭이 물었다.
“손은 괜찮아?”
“그럭저럭. 이제 한쪽도 곧 완성될 테니, 그땐 더 나아지겠지.”
양손을 잃은 투움바는 한쪽에 갈고리 모양의 의수를 달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변종 오크>를 처치하고 얻은 창을 개조해 만든 것이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쓰임이다.”
“…새로운 쓰임?”
“그래.”
“우리한테 무슨 쓰임이 있는데?”
하지만 투움바는 대답 대신 화강암이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사실 투움바는 이 신비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한 상태였다.
어쩌면… 그것이 자신들이 괴물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최후의 수단이 될지도 몰랐다.
‘만약 내 예상이 맞는다면…….’
투움바는 여전히 굳건한 탑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곳에서 나갈 방법이 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