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역사 (3)
강우의 말에 모두가 식사를 멈췄다.
그 분위기를 읽었는지, 주스를 마시던 박수영도 손을 멈춘 채 강우를 바라보았다.
“…….”
소녀의 시선.
그것을 알아차린 강우가 잠시 멈칫하는 사이, 청익이 눈치 빠르게 입을 열었다.
“수영아, 잠깐 아저씨랑 거실로 갈까?”
“음… 알겠어요.”
역시나 지혜로운 아이는 군말 없이 청익을 따라 거실로 향했다.
비로소 자리가 정리되자, 강우가 박도진과 유아라를 바라보았다.
탑에서 <검은 고리>를 수련하는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한 이야기들.
그것을 꺼낼 시간이었으나, 쉽사리 입이 떨어지진 않았다.
마침내 결심이 선 강우가 입을 열었다.
“우선은 이 집에 대한 것이다. 이곳에 사는 건 너희의 자유다. 난 딱히 이 집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도 없고, 이 집이 좋다면 비워 줄 의향도 있다. 단, 한 가지…….”
강우가 얼굴을 굳혔다.
“매번 말하지만, 이곳은 위험하다. 이미 노출된 이상, 앞으로도 노출될 위험이 존재해. 아니, 정정해야겠군. 나는 위험하다.”
그의 말에 유아라와 박도진도 얼굴을 굳혔다.
강우의 말은 계속됐다.
“이미 느꼈겠지만, 내가 하는 일은 너희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다. 인정한다. 그건 확실한 내 불찰이다. 일을 벌이기 전에 너희를 먼저 내보냈어야 하는데… 내가 잠시 복수에 눈이 멀어 일을 먼저 벌였다.”
그의 말은 사과의 말이었으며…….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은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를 죽이는 일이다.”
가면 속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말이었다.
“누군가를 수천수만 번 찌르고, 베어야 하는 일이다.”
박도진과 유아라는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시선을 마주했다.
“누군가의 원망을 살 수도 있으며, 어쩌면 세상과 등진 채 살아가야 할 수도 있다. 세상을 적으로 두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잠시 뜸을 들이던 강우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더 휘말리기 싫으면 지금 말해라. 이 집은 원한다면 남겨 두고 가겠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 되레 손에 피를 묻히게 될 수도 있다.
― 감수하겠습니다. 그게 저와 아버지, 우리 수영이를 구해 준 사람들이 나아가는 길이라면.
박도진은 이미 강우와 같은 길을 걷기로 했으나, 아직까진 벗어날 기회가 남았다.
석철만 죽으면 그는 석탈해와 엮일 일이 없는 것이다.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이 여정에서 벗어날 마지막 기회.
강우는 일부러 석철의 처형을 박도진에게 맡겼다.
어차피 석철이 죽지도 않을뿐더러, 그 일을 반복하면서 박도진이 신물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수백 번 죽이는 일.
결심을 번복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일련의 과정에서도 박도진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끝난 것 아니었습니까? 이미 한 이야기를 또 하고 싶진 않군요.”
“…….”
그런가.
그 진심을 확인한 강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의 시선이 유아라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게 아닌가.
약간의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강우가 물었다.
“…왜 울지?”
“흑, 아닌데요? 흑, 저 안 우는데요?”
“…….”
유아라는 천연덕스럽게 눈가를 슥, 닦은 뒤, 대답했다.
“당신은 제가 그 이야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를 거예요.”
그녀는 대뜸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강우와 박도진이 의아하게 쳐다보는 사이, 그녀의 손에서 미세한 입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르르륵.
마력이었다.
강우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마력이 달라졌다 싶었는데… 결국 이뤄 낸 모양이군.’
유아라가 보여 주고자 하는 건 바로 마력의 ‘방출’이었다.
어느새 작은 원형의 모습을 갖춘 검푸른 마력 구슬이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쳇바퀴처럼 돌고 있었다.
아직 투박하지만 분명한 마력의 방출.
유아라도 끝내 3차 각성을 이룬 것이다.
“저도 이젠 3차 각성자라고요. 분명히 쓸 만한 인재가 될 거예요. 어때요? 이 집에 있기에 충분한 자격이죠?”
그녀는 되레 강우에게 대답을 넘겼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으니, 그 선택은 강우에게 맡긴 것이다.
어딘가 호기롭기까지 한 그 시선을 보며 마침내 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씨익.
그제야 유아라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모두의 뜻이 하나가 된 만큼 강우는 그간 망설이던 오래된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었다.
이미 박도진은 석철을 상대하면서 어렴풋하게 들은 내용이었다.
“과거, 나는 저승사자였다.”
이야기는 길었다.
“그리고 석탈해라는 자가 있었지.”
강우는 담담하게 이야기했으나, 듣는 이들은 달랐다.
어느 부분에선 유아라가 몸을 떨었고, 또 어떤 부분에선 박도진이 신음을 삼켰다.
거실에서 몰래 귀 기울이던 청익도 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 석탈해를 만난 일, 신라 길드에서 저승사자가 되기까지의 일, 석철과 호공, 바벨탑에서의 배신, 가족들의 죽음, 탑에서의 일까지.
강우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이야기를 계속해서 내뱉었다.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래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
마침내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식탁 주변은 침묵만이 가득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유아라였다.
“…기분이 묘하네요. 그래서 백귀 균열도 알 수 있던 거군요?”
“그래.”
“…여전히 믿기지 않네요.”
하지만 강우의 걱정과 달리 유아라와 박도진의 얼굴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미래에서 온 자.
당연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나, <균열>이 벌어진 것부터 이미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시공을 넘나드는 이야기도 완전히 미지의 영역도 아니리라.
그래서인지 둘의 충격도 덜했다.
‘이상하군.’
충격은 반대로 강우가 느끼는 중이었다.
막상 이야기를 꺼내니 속이 후련했던 것이다.
비록 <데스 나이트>가 있다곤 하나, 그는 인간이 아닌 마물.
그와 이 이야기를 나눌 때와 지금은 기분이 사뭇 달랐다.
묘한 동질감이라고 해야 할까.
비밀을 공유하니 그들이 조금 다르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확실히 감상적으로 변했군. 이런 기분도 느껴 보고.’
강우가 묘한 감정을 되짚는 사이, 유아라가 말했다.
“그런데 우리 뭔가… 갑자기 가까워진 것 같지 않아요?”
박도진도 한마디를 했다.
“…저도 방금 그런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은 강우 씨만 우리 이야기를 알고 있었잖아요. 당신이 당신 이야기를 제대로 들려준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
“뭔가… 가족이 된 것 같달까.”
가족.
어딘가 뭉클한 단어였다.
괜히 어색해진 강우가 말했다.
“가족이라니… 조금 과하군.”
“같은 지붕 아래서 끼니를 함께하면 식구라던데요? 지금 우리가 식구지 뭐예요?”
“과연…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박도진도 유아라를 거들자, 강우는 더 할 말이 없어졌다.
짐짓 민망해진 그가 숟가락을 들었다.
“…먹지.”
“…예.”
“…….”
후릅.
어색한 공기와 함께 식사가 시작되었다.
들리는 소리라곤 그릇에 닿는 젓가락 소리와 국을 마시는 소리뿐이었다.
그때, 뒤늦게 주방으로 수영이를 데리고 온 청익이 말했다.
“아씨! 너무하네. 기껏 기다려 줬더니! 너넨 장유유서도 없냐?!”
“…….”
그들은 둘러앉아 식사를 계속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으나, 모두는 여전히 강우가 한 말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
그 당사자 역시도.
어느 초여름 밤.
구로구의 한 저택에서 새로운 역사가 태동하려 하고 있었다.
* * *
식사가 끝난 뒤.
박도진은 설거지를 하고, 유아라는 수영이와 산책을 나갔으며, 강우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중이었다.
TV를 보던 청익이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채로 물었다.
“아주 대단히 일을 벌였네?”
“…….”
석철과 섬에서 맞붙은 날.
인천에서 찍힌 영상이 온갖 포털 사이트와 뉴스를 장식하는 중이었다.
『하늘에 뜬 초대형 철퇴, 신의 징벌인가.』
『인천 해안 상공에 뜬 새로운 균열의 시작?!』
『속보! 인천 균열 새로운 영상 확보!』
하늘에 뜬 먹구름과 그 주위로 치솟는 수십 개의 용오름.
연신 내리치는 천둥번개와 하늘에 뜬 거대한 철퇴.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사건이었다.
“네 복귀도 복귀이지만, 사실 이것 때문에 온 거야. 저거, 너 맞지?”
이미 청익도 충분히 알아보고 왔을 테니, 강우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강우와 석철의 싸움이 격렬했던 탓에 그들의 사진이 찍히지 않았다는 점?
“석철이 이카루스와 관련 있다고 했지? 이카루스도 필사적으로 이번 사건을 축소하는 중이야. 놈들도 입찰에 안 내놓은 균열을 들켜서 좋을 게 없을 테니까.”
청익의 말에 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카루스가 내놓은 입장문에는 여전히 진상 파악 중이라는 내용뿐이었다.
지금쯤 놈들도 다른 5대 길드의 추궁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터였다.
“이카루스에 대해 좀 알아낸 게 있어?”
“아마도 놈들은 균열 브레이크를 일으킬 생각이었던 것 같다.”
“…브레이크를?”
강우의 대답에 청익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곧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브레이크를 통해서 입지를 다질 생각이구나.”
“그래.”
공통의 적만큼 내부를 단합시키기 좋은 건 없다.
한국이 동시다발적인 브레이크로 혼란에 빠지면, 랭킹 1위인 이카루스의 입지가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전시 상황에 힘을 쥐는 건 강한 군인들이니까.
자연스럽게 5대 길드는 이카루스를 중심으로 뭉치게 될 터였다.
“아마 지금쯤 충분한 균열이 모였을 거다. 우린 그걸 막아야 한다.”
그곳에는 이승우뿐만 아니라 석탈해의 의도도 담겨 있었다.
<균열>에서 사도를 키워 낸 놈이라면, 이번 브레이크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보장은 없을 테니까.
즉, 이번 일은 검계뿐만 아니라 강우의 일이기도 했다.
잠시 고민하던 청익이 중얼거렸다.
“음, 이건 우리만으로는 힘들겠는데…….”
아무리 검계가 강하다 한들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브레이크를 막을 정도로 수가 많진 않았다.
또한 그렇게 된다면, 그간 음지에 숨어 활동하던 검계로서는 필연적으로 세상에 노출되게 된다.
당연히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다.
“회의를 좀 해야겠어.”
“그리 시간이 많진 않을 거다. 이카루스도 궁지에 몰렸으니, 일을 서두르겠지.”
입찰에 부치지 않은 <균열>이 있다는 걸 들킨 이상, 그 추궁을 피할 방법은 새로운 화젯거리를 만드는 것뿐이다.
이카루스는 빠르게 브레이크를 일으키고 시선을 돌릴 터였다.
“하여간 이놈의 길드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든다니까.”
청익은 그 말을 끝으로 저택을 떠났다.
그가 황 노인에게 오늘의 대화를 전달할 수도 있으나, 그것까지 감수하고 감행한 일이었다.
그걸 황 노인에게 전하고 말고는 전적으로 청익의 몫.
노인은 예언자의 눈을 가졌다고 하니…….
어쩌면 어느 정도 예상하였을지도 모를 일이지.
강우는 TV 속 영상에 집중하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더 바빠지겠군.”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