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역사 (2)
콰르르르르!
오랜만에 고리 수련을 마치고 탑 밖으로 나온 강우는 저 멀리 내리치는 <뇌(雷)>의 폭풍을 잠시 지켜보았다.
수없이 내리치는 검은 벼락 속에서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달아나는 검은 인형(人形).
석철이었다.
“키키킥! 움바야, 석철의 특기는 뜀뛰기였어! 그래도 곰치고는 제법 잘 뛰는데?!”
조릭은 그 모습이 우습다며 낄낄 웃었으나, 강우는 그러지 않았다.
저건 일종의 조련이었다.
곰을 길들이기 위한 조련.
강우는 석철이 진심으로 굴복할 때까지 계속해서 쥐고 흔들 생각이었다.
그러다 놈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았을 때, 강우는 비로소 선물할 것이다.
‘좌절 뒤에도 남아 있는 진정한 절망을.’
그것이 강우가 생각하는 진짜 복수였다.
하지만 아직 그 복수를 이루기 위해선 준비가 더 필요했다.
이내 잠깐의 휴식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다시 탑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틀하고도 약 여덟 시간 뒤, 마침내 강우는 세 번째 <검은 고리>를 완성했다.
* * *
[비로소 쓸 만해졌군.]
팔짱을 낀 <데스 나이트>가 강우의 어깨에 걸린 고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쓸 만’해지다니.
그간 들인 노력에 비하면 변변찮은 평가였으나, 강우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그의 말투는 평소에도 저랬으니까.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현재의 감각이었다.
‘이건 뭐랄까…….’
<검은 고리>가 세 개가 되면서 강우는 새로운 감각에 눈을 뜨게 되었다.
형언하기 힘든 초월적인 인지 능력.
굳이 설명하자면, 그건 감각의 확장이었다.
그동안 인지하지 못한 자극들이 강우의 오감을 넘어 육감(六感)을 통해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여 보며 물었다.
“신기한 기분이로군. 마물들은 모두 이런 감각을 가지는 것인가?”
[그랬다면 너희 인간은 첫 균열 때 모두 이승과 작별했을 것이다. 고리를 세 개까지 운용할 수 있는 마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그런 고리를 더 사용할 수 있는 <데스 나이트>란… 새삼 그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떡할 테냐?]
“…….”
<데스 나이트>의 질문에 강우는 잠시 묵묵히 서 있었다.
본래 자신의 목표는 석탈해와 호공, 석철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도라는 새로운 적들이 등장했다.
놈들에게 가진 악의는 없으나, 놈들은 석탈해의 수족.
“모두 없애야겠지.”
석탈해의 행동에 동참했다는 것만으로도 놈들은 처단 대상이었다.
게다가 마물들이 세상을 활개 치게 놔둘 순 없는 일이다.
이제 강우의 세상에는 검계도, 박도진도, 유아라와 박수영도…… 어느 순간부터 꽤 여럿이 살고 있었으니까.
짧은 고민을 마친 강우가 고개를 들어 <데스 나이트>를 응시했다.
“몇 가지 물을 게 있다.”
그건 줄곧 타이밍을 기다리던 질문이었다.
이 탑과 죽음의 기사.
그들의 정체는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으나, 한 가지 떠오른 가설이 있었다.
“넌 사도인가?”
혹시 홍련처럼 사도 중에서도 그들의 뜻에 반하는 자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강우였다.
그렇다면 <데스 나이트>도 그런 존재가 아닐까.
한때 사도였으나 이제는 아닌 존재.
하지만 잠시 침묵하던 죽음의 기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그런가.”
아니었나.
그렇다면 <데스 나이트>의 정체는 더 베일에 가려졌다.
사도가 아니라면서 사도와 대등한 힘을 갖고 싸우는 그는 대체 누구인가.
하지만 고민도 잠시.
강우는 다음 질문을 꺼냈다.
“다른 질문이다. 녹색 미궁 때 홍련이라는 자를 만났다.”
[…….]
두 번째 질문에는 <데스 나이트>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사뭇 긴장한 것 같기도, 어딘가 굳어진 것 같기도 했다.
“넌 이곳에서도 내 행적을 볼 수 있다고 했지. 하지만 그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어째서지?”
그러자 후, 하고 검은 투구 속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말하고 싶지 않아서다.]
“어째서?”
이번 침묵은 길었다.
한참의 고민 끝에 <데스 나이트>가 입을 열었다.
[…홍련은 꽤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다. 그녀가 사도가 되기 전부터 알고 지냈지.]
“사도가 되기 전부터라고?”
그렇다는 건 홍련이 일반 마물일 때 만났다는 뜻이었다.
같은 마물들끼리 벌이는 친목회라도 있는 건가?
잠시 시시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을 함께했고, 같은 곳을 보고 싸웠다.]
“…연인이었나?”
[…….]
죽음의 기사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홍련이 네게 남긴 메시지를 보았다. 마력으로 빚은 연꽃은 그녀가 종종 쓰던 전서구였으니까.]
“…그랬군.”
생각건대, 아마도 <데스 나이트>와 홍련은 연인 관계였을 확률이 높았다.
그의 목소리에서 묘한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건 자신이 혜진이를 떠올릴 때 드는 감정이기도 했다.
‘마물에게도 그런 감정이 있을 줄은 몰랐군.’
하지만 강우는 굳이 더 캐묻진 않았다.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 하나쯤은 있는 법이니까.
박수영의 끊임없는 질문에 답을 해 주면서도 빨간 밥통의 정체만은 입을 다문 강우다.
그는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이해하는 존재였다.
“그럼 연꽃의 주인은 너인 것 같은데.”
[…아니. 그건 네가 풀어야 할 것이다. 내 몫은 네가 묻혀 온 꽃의 그림자까지가 전부였다.]
“…….”
― 살아라. 살아서 그것을 꽃피워 보아라.
강우는 홍련이 연꽃을 건네며 남긴 말을 떠올렸다.
그 안에 담긴 것이 무엇인진 알 수 없으나, 그것을 풀면 많은 비밀이 해결될 듯싶었다.
“그럼 다녀오겠다.”
[그래, 건투를 빌지.]
― 네가 이곳에 들어오게 된 건 우연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뒤늦게 홍련의 말이 하나 더 떠올랐지만, 이미 탑을 나온 뒤였다.
강우는 탑으로 돌아가지 않고 저 멀리 드리운 먹구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사이트 스톤은 그저 평범한 용암지대가 아니다.’
이곳은 하나의 세계이자 프로그램 같은 곳이었다.
하나의 삶이 영원히 반복되는 곳.
모든 것이 죽음 이전으로 돌아가는 곳.
‘여러모로 쓸모가 많겠어.”
석철의 경우만 해도 그랬다.
<데스 나이트>는 석철이 다시 깨어나는 순간, 준비된 마법들이 반복되게 도와주었다.
그가 이 공간의 진짜 주인이기 때문일까?
그 권한의 출처에 대해선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확실한 도움이 되고 있었다.
굳이 자신이나 박도진이 아니더라도 석철을 계속해서 죽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무한히 반복되는 세상이라…….’
처음에는 단순히 탑을 위한 장소로만 생각했으나, 꼭 <사이트 스톤>의 세상을 탑과 그 주변으로만 한정을 지을 필요도 없었다.
이 정체불명의 용암지대는 광활했으며, 무궁무진했다.
강우는 문득 이 용암지대의 밖이 궁금해졌다.
‘…확인할 날이 오겠지.’
<데스 나이트>가 말하길, 임가륜이 가진 쾌(快)의 능력은 속도를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준다고 했다.
그때가 되면 이곳의 끝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이윽고 먹구름 아래에 다다르자, 여느 때처럼 역(力)에 당해 바닥에 처박힌 석철이 보였다.
“으윽……!”
벌써 백 번 가까이 자행된 굴욕.
하지만 여전히 석철의 눈빛에는 살기와 분노가 역력했다.
최상위 마물답게 백여 차례의 죽음의 기억에도 정신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두 눈이 시뻘게진 놈이 이를 부득 갈았다.
“너, 이 새끼… 금제(禁制)만 사라지면……!”
“그 금제라는 거, 대체 언제 풀려나는 거지?”
“…뭐?”
예상치 못한 강우의 물음에 석철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금제가 풀리길 바라고 있는 듯한 물음.
순간, 석철은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너… 설마 금제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냐?”
“네놈들의 진짜 힘이 보고 싶을 따름이다.”
“큭… 크큭, 크크, 크하하핫!”
결국 참다 못한 석철이 폭소했다.
“네놈이 실성해도 단단히 실성했구나! 네놈이 어떤 잔재주를 쓰든 금제가 풀려나는 순간, 네놈은 한낱 미물에 불과해!”
“…….”
터벅터벅.
그러자 강우는 석철에게로 다가갔다.
본래라면 놈은 역(力)의 힘에 당해 서서히 압사당해야 했으나, 이제부터는 달라질 터였다.
곧 석철의 앞에 선 강우가 말했다.
“그 금제가 풀려날 때까지 너는 서서히 죽어 갈 것이다. 그전보다 점점 더 고통스럽게, 더 오랫동안 죽어 갈 것이다.”
“이 또라이 새끼……!”
푹!
“윽!”
강우가 <피바라기>를 석철의 종아리에 꽂자, 검이 게걸스럽게 피를 빨았다.
강우는 <피바라기>를 꼭 주사기처럼 둔 채 몸을 돌렸다.
“또 보지.”
“이 개새끼야! 대체 우리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 이러는 거냐?! 엉?!”
<피바라기>는 석철의 피를 단번에 전부 삼키지 않았다.
흡사 흡혈귀처럼 천천히, 그 맛을 음미하듯 느리게 마셨다.
그렇게 모든 피를 빨고 나면 석철은 죽는다.
그리고 다시 깨어나면 어김없이 같은 상황이 반복될 터였다.
“이건 좀 께름칙한데…….”
그걸 담당하는 건 조릭이었다.
조릭은 <피바라기>로 석철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살려면 해야겠지……”
“조릭! 넌 날 도와야 한다! 한강우, 그놈이 결국엔 너도 죽일 거야!”
하지만 석철의 호통에도 조릭은 콧방귀만 뀌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새꺄! 너도 풀려나면 날 죽일 거지? 그렇잖아?!”
푹!
“큭……!”
되레 석철의 말은 조릭을 흥분시킨 듯했다.
그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네놈한테 피부가 벗겨지느니, 차라리 저 용암에 빠져 죽지!”
푹!
“조릭, 이 개새끼가……!”
“닥쳐!”
푹! 푹!
“이것은 단죄의 칼이야! 나는 그 집행인이다!”
“이 미친놈이……!”
푹! 푹! 푹!
“크학!”
조릭의 죄책감이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 뒤로 석철에겐 인간을 위해 피를 뽑히는 투구게 같은 나날이 시작되었다.
* * *
조릭에게 석철을 맡긴 강우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집.
강우가 그 광경을 천천히 둘러보는 사이, 기척을 느낀 박도진이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
“오셨습니까?”
“…집에 있었나.”
“예. 그간 집을 오래 비워 뒀더니… 할 일이 많아서요.”
“…….”
강우가 양팔에 낀 고무장갑을 바라보자, 박도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장갑을 벗었다.
“화장실 청소를 하던 참이라…….”
“…….”
여전히 변이 때와는 매치되지 않는 모습이다.
“어? 왔네요?”
“아저씨!”
그리고 그날 저녁.
박도진이 대청소를 하는 동안 극장을 다녀온 유아라와 박수영도 집으로 돌아왔다.
“…계속 이곳에서 지낸 건가?”
“네. 멕시코에서 돌아왔더니, 박도진 씨가 집에 들어왔다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왔어요. 그래도 괜찮죠?”
“…….”
어차피 나가라고 해도 나가지 않을 태도였다.
“가자, 수영아! 언니랑 목욕해야지~”
“네, 언니!”
박수영은 유아라의 손을 잡고 욕실로 향했다.
“…….”
그날 밤.
저택에서는 작은 파티가 열렸다.
“오랜만이네, 전우!”
대뜸 찾아온 청익을 비롯해 박도진, 유아라, 박수영, 네 사람이 비로소 되찾은 집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박수영이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물었다.
“아저씨, 우리 여기서 계속 살아도 되는 거죠?”
“…….”
강우가 박도진을 바라봤으나, 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청익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이 주변은 아저씨들이 지킬 테니까, 수영이는 노는 것만 열심히 해!”
“야호!“
“…….”
황한수가 왜 그 모양인가 싶었더니, 아무래도 청익의 역할이 컸던 모양이다.
수영이를 제외한 모두가 청익이 가져온 샴페인을 마시는 가운데, 아까부터 묵묵히 있던 강우가 입을 열었다.
“잠시… 할 말이 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