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역(力)의 사도 (3)
인천광역시 연수구.
‘저게 뭐야?’
대학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남수는 저 멀리 선명하게 보이는 검은 구름을 바라봤다.
꼭 임의로 만든 것처럼 검은 뭉게구름 하나가 하늘에 둥둥 떠 있었다.
“뭐, 뭐야? 균열인가?!”
“야! 사진 찍어!”
기이한 검은 구름을 발견한 건 비단 남수뿐만은 아니었다.
어느새 삼삼오오 모여 선 사람들이 저 멀리 드러난 한 덩이의 먹구름을 신기한 듯 구경하고 있었다.
해안가에 있던 사람들도 사진과 영상을 찍느라 바빴다.
하늘에 뜬 둥근 먹구름과 간간이 번뜩이는 천둥 번개들.
마치 저 바다 위에만 저승의 차사가 강림한 듯했다.
SNS는 순식간에 인천 바닷가에서 목격된 검은 구름 이야기로 떠들썩해졌다.
이미 <균열>은 누리꾼들에게 있어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인천 시민들이 찍은 사진은 누리꾼들의 양념이 더해져 점차 크기를 더해 퍼져 나갔다.
* * *
“석철이… 벌써 귀국했다고?”
“그렇습니다. 네 시간 전쯤 그가 인천공항에 들어온 걸 확인했습니다.”
비서의 보고에 이승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석철이 멕시코로 간 게 불과 나흘 전.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사실상 하루 이틀 만에 모든 일을 끝내고 돌아왔다고 봐도 무방했다.
‘미국 헌터부 정보처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기관이 아닌데…….’
그런 곳에 속한 에르난데스를 그 시간 만에 처리했다고?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에르난데스는? 잡혔대?”
“그… 행방이 묘연합니다. 석철의 손에 죽은 건지, 아니면 달아난 건지… 중요한 건 그곳에 파견된 미국 정보처 직원들이 전부 죽었다는 겁니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3차 각성자도 넷이나 죽었다고 합니다.”
“허… 석철, 그놈이 그 정도였단 말이야? 그냥 목에 힘 주고 다니는 양아치 새끼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자는 4차 각성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젠장.”
이승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명회의 말만 듣고 너무 쉽게 일을 저질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 이사는?”
“지금 미헌터부와 연락 중입니다. 아무래도 그쪽에서 에르난데스와 저희의 관계를 알고 책임을 물으려는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일이 커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만약 석철을 그쪽으로 보낸 게 이카루스라는 사실을 들킨다면, 자신의 처지가 꽤 난처해질 터였다.
“무조건 시치미 떼. 우리는 에르난데스한테 일방적인 연락을 받은 거라고. 자기네 직원들이랑 연락한 것부터 마음에 안 들어 할 거야. 일 복잡해지기 전에 처리해. 서둘러.”
“알겠습니다, 마스터.”
비서가 나가고, 홀로 남은 이승우는 고민에 잠겨 턱을 만지작댔다.
선택의 시간이었다.
석철인가, 미국인가.
이렇게 된 이상 석철과 연을 끊는 게 가장 손쉬워 보이지만, 그러기엔 허의 사절 쪽이 신경 쓰였다.
석철을 버린다는 건 자신들과 거래하던 ‘허’ 쪽과도 척을 지는 걸 의미했으니까.
‘허’라는 자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그는 확실히 쓸 만한 존재였다.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이승우도 난생처음 보는 마법과 물건을 지닌 사람이었다.
― 제 도움이라면 당신이 아시아를 손에 쥐는 것도 그리 먼 미래는 아닐 겁니다.
허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그가 이한을 통해 재배한 어린 각성자들은 일반적인 각성자와 수준부터 달랐다.
이한은 아이들을 각각의 인물들이 데려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자신과 ‘허’가 반반씩 나눠 가졌다.
지금 남몰래 감추고 있는 그 아이들만 풀어도 한국 정도는 손쉽게 제압할 터였다.
3차 각성자를 상회하는 각성자 부대라니.
그런 건 미국이나 중국을 제외하면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군대였다.
“슬슬 일을 벌일 때가 되었어.”
이승우는 결심했다.
언제까지고 허와 관계를 유지할 순 없었다.
자신이 가진 각성자 부대를 놈들도 똑같이 가지고 있을 테니까.
아니. 놈들이 거래하는 게 꼭 자신뿐일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 놈들은 사실상 이카루스보다 훨씬 더 많은 각성자 부대를 양성 중일 터였다.
훗날을 위해서라도 그냥 넘어갈 순 없는 노릇.
‘일단 국내부터 정리한 뒤, 일본과 손을 잡고 중국을 친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일본을 먹으면 돼. 그 뒤로는 유럽을 거쳐 세계로 가는 거다.’
이승우는 장대한 꿈을 꾸었다.
‘기원전에 카이사르가, 13세기에 칭기즈칸이 있었다면, 21세기에는 바로 나 이승우가 있다.’
그는 자신이 인류의 역사에 새로운 영웅으로 기록되길 원했다.
<균열>이 발생한 지 어언 8년.
하지만 아직 세상에는 이렇다 할 영웅은 나타나지 않았다.
춘추전국시대라고 해야 할까.
지금은 이제 막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고위 각성자들이 조금씩 명성을 떨치는 시기였다.
지금까지가 마물 대 각성자의 싸움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각성자 대 각성자의 싸움이 도래할 시기다.
누가 진정한 세계의 패자가 될 것인가.
이미 4차 각성자의 반열에 오른 자신은 확실히 다른 자들보다 앞서 있었다.
‘일단은 김인표부터.’
이승우는 즉각 첫 목표를 정했다.
안 그래도 그간 계속해서 심기를 불편하게 하던 김인표였다.
그는 가장 먼저 놈의 독종 길드부터 삼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똑똑.
한명회에게 간다던 비서가 무슨 일인지 다시 돌아왔다.
“뭐야?”
“마스터, 지금 석철의 행방을 찾았답니다.”
“어디야?”
“그게… 이것 좀 보십시오.”
“……?”
비서가 내민 건 태블릿 PC였다.
이승우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거기엔 기이한 먹구름이 낀 바다 사진이 있었다.
* * *
콰득!
강우의 <피바라기>가 석철의 뺨을 스치고, 놈의 도끼가 강우의 발끝을 스쳤다.
“전부터 느꼈다만, 확실히 쓸 만한 놈이로구나!”
콰과과과과!
일순간 쇄도한 청록색 마력이 주변의 바닥을 갉아먹었다.
거대한 크레이터를 벗어나기 무섭게 석철의 주먹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쾅!
주먹과 어깨가 부딪쳤는데 대포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간신히 삼각근을 방패 삼아 주먹을 막아 낸 강우가 뒤로 크게 밀려났다.
그러자 밀려난 거리만큼 바닥이 파괴되며 뱀처럼 큰길이 생겨났다.
‘…완전히 괴물이로군.’
강우는 방어하는 데 쓴 왼팔 전체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놈의 주먹질은 한 방, 한 방이 뼈가 아릴 지경이었다.
과거로 돌아온 뒤로 처음 느껴 보는 감각.
단순히 힘만으로 따진다면, 석철은 <데스 나이트>보다도 몇 곱절은 더 강했다.
그때, 그를 지켜보던 석철이 고개를 갸웃대며 물었다.
“이게 네놈의 전부냐? 대단하기는 하다만… 진중과 가륜이 당했다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데?”
아직 석철도, 강우도 둘 다 <죽음의 고리>를 꺼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탐색전도 끝이었다.
강우가 내내 침묵하자, 석철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계속 입을 다물고 있겠다면… 더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군.”
놈이 비어 있던 왼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잘 보아라. 이게 숫자 나누기 좋아하는 너희가 말하는 4차 각성의 경지이니까.”
츠츠츠츳―!
돌연 석철의 빈손에서 청록빛 스파크가 튀며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했다.
김은 곧 놈의 전신으로 번져 나갔다.
그것을 본 강우도 다시금 마력을 끌어 올렸다.
‘드디어 나오는가.’
3차 각성이 마력을 방출하는 경지라면, 4차 각성은 마력을 자유자재로 형상화할 수 있는 단계였다.
예를 들면…….
척.
석철의 손에서 흘러나온 마력들이 놈의 몸을 감싸며 점차 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갑주였다.
짐승의 것과 같던 놈의 가슴 위로 단단한 철판이 생겨나고, 곧 아래로도 각반이 제 모습을 갖추었다.
뿐만 아니라 어느새 손에는 새로운 무기가 들려 있었다.
바로 적색으로 물든 핏빛 철퇴.
온전히 석철의 마력으로 빚은 무기였다.
그 흉측한 외양의 철퇴를 보며 석철은 감회가 새로운 듯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꺼내 보는군.”
그건 과거에도 놈이 사용하던 <철혈의 추>였다.
본래는 놈의 마력답게 청록색이었으나, 이제는 피를 먹고 붉게 변해 버린 철퇴.
그곳에서 물처럼 흘러내리는 붉은 마력이 마치 핏빛 폭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석철이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광인 줄 알아라. 이 석철 님이 철혈의 추를 꺼내는 건 실로 백 년 만이니까.”
이미 수십 번도 더 본 무기였으나, 석철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강우는 낯익은 그 철퇴를 보자 새로운 투지가 이는 것을 느꼈다.
한때는 그 방향을 함께하던 철퇴.
하지만 이제 그 철퇴가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끝내자. 네놈을 붙잡아다 힘줄을 하나하나 끊어 주마. 아무리 고문에 강하다 한들, 정신이 버텨 내지 못할 거다. 혹시라도 자결할 생각이라면 지금 하도록 해. 언데드로 영겁의 세월을 살게 해 줄 테니. 그렇게 된다면 수하로 삼아도 좋겠군. 네놈이 제법 쓸 만한 건 사실이니까 말이야.”
무슨 상상을 했는지, 석철이 음흉한 표정으로 흐흐, 웃음을 흘렸다.
그 표정마저도 예전의 놈과 똑같았다.
“아, 그리고 저 머저리 놈도 함께 말이지.”
‘윽!’
석철과 눈이 마주친 조릭은 몸을 떨었다.
선장을 끌어안고 간신히 섬에 다다른 차였다.
범람하는 파도 속에서 기를 쓰고 헤엄쳐 온 탓에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불! 저 새끼도 인간이 아니었다니… 제발… 제발 이겨라, 사신아!’
조릭은 간절히 강우를 응원했다.
만약 그가 패한다면 석철에게 끌려가 온 피부가 벗겨질 터였다.
멕시코에서도 그렇게 죽은 놈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놈은 예술을 보여 주겠다며 직접 등가죽을 벗겨 나무에 매단 적도 있었다.
‘석철은 한다면 진짜로 하는 놈이야. 제발…….’
조릭이 속으로 비는 사이, 강우는 석철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놈이 <철혈의 추>를 꺼내 들었으니,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었다.
강우는 <피바라기>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단단히 고쳐 쥐었다.
‘기회는 이번뿐이다.’
최대한 고리를 사용하지 않고 놈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여차하면 고리를 꺼내겠지만, 놈이 먼저 꺼내지 않는 이상 굳이 사도들의 관심을 끌 필요는 없었다.
놈도 <균열> 밖에서 <죽음의 고리>를 꺼내는 건 부담스러운지 사용하지 않고 있고.
놈이 방심한 지금이 허를 찌르기 가장 좋은 시점이었다.
“크크큭, 어디 한번 받아 봐라!”
그때, 석철이 광대를 씰룩이는 것과 동시에 빠른 속도로 달려오가 시작했다.
갑주로 인해 덩치가 더 커진 놈은 정말로 거대한 곰처럼 보일 정도였다.
석철이 <철혈의 추>를 허공으로 치켜드는 사이, 강우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앞으로 집어 던졌다.
“응?!”
갑작스러운 강우의 행동에 석철이 멈칫했으나, 연둣빛의 무언가는 이미 석철을 스쳐 지나간 뒤였다.
“크크, 마지막 발악이냐?!”
하지만 석철은 그것을 무시한 채 곧장 강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지금 뒤를 확인하기에는 강우의 실력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놈을 제압하면 모든 게 끝나는 일.
별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이상, 석철은 하찮은 일에 굳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변화가 일어난 건 그때였다.
콰드드드득!
<피바라기>와 <철혈의 추>가 격돌하는 것과 동시에 석철의 뒤쪽에서 새로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대번에 불어난 강력한 마력에 석철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또? 설마 함정인가? 어느 틈에?’
황급히 강우를 밀쳐 낸 석철이 빠르게 몸을 틀었다.
자신이 바로 뒤까지 접근한 마력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건 여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설마 조릭 놈이?!’
하지만 석철의 눈앞에 들이닥친 건 조릭이 아니었다.
정체불명의 거대한 보랏빛 무언가가 순식간에 놈을 덮쳤다.
콰과과과과―!
강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확실히 상대도 만만하진 않았다.
간신히 막아 낸 석철이 뒤로 물러서는 사이, 세미 정장을 입은 상대의 공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콰과과!
이제 보니 자신을 공격한 건 부풀어 오른 남자의 손이었다.
곧 그 정체를 깨달은 석철의 동공이 커졌다.
‘변이자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해하기도 전.
어느새 석철의 뒤로 강우의 기척이 느껴졌다.
‘아……!’
그와 동시에 전해져 오는, 싸늘한 음성.
“아직 할 말이 남았나?”
‘젠장!’
콰득!
발끝부터 올라오는 전율과 함께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감각은 그 뒤였다.
화끈거리는 느낌과 함께 석철은 자신의 배를 뒤에서 꿰뚫은 검은 쐐기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