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역(力)의 사도 (1)
멕시코와 미국을 연결하는 여덟 번째 횡단 도로.
격렬한 전투의 흔적으로 가득한 이곳에 거구의 사내, 석철만이 홀로 서 있었다.
“제길, 또 놓치다니.”
이를 간 석철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각성자의 시신이 수십 구에 달하지만, 그가 원하는 ‘단 하나’의 시신은 없었다.
“베론, 에르난데스.”
벌써 두 번째 가짜 이름을 가진 놈의 진명(眞名)은 신홍이었다.
네 번째 사도이자, 화(火)의 권능을 다루는 존재.
여전히 주변에는 놈이 달아나면서 남긴 ‘화(火)’의 기운이 자욱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륜을 데려오는 건데 말이지.”
가륜.
여섯 번째 사도이자 ‘쾌(快)’의 권능을 다루는 자.
임가륜이란 이름으로 용병단에 들어와 장난질을 쳤지만, 놈의 실력은 진짜였다.
자신들에게 걸린 금제(禁制)만 아니라면, 하루에도 이 지구라는 행성을 수십 번도 더 돌 수 있을 놈이었다.
사도 중 ‘추격’에 가장 적합한 존재.
다만, 가륜은 신홍과 상성이 좋지 못했다.
심지어 놈을 두려워하는 기색까지 있기에, 영영 가륜은 신홍을 잡는 데 쓸 순 없을 터였다.
‘불을 무서워하다니… 늑대 새끼라 그런가?’
석철은 곧 잡생각을 거두었다.
신홍을 계속 추격해야 하나 싶었지만, 한 번 위기를 느끼고 달아난 이상, 놈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려면 한참 걸릴 듯싶었다.
지금은 사도들에게도 중요한 시기.
더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하는 수 없지.”
석철이 중얼대던 그때였다.
부릉―!
저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무소 같은 차가 보였다.
유일하게 멕시코에 데려온 해릭이었다.
평소 용병단에서 골치 아픈 일거리를 수행하는 건 핸더슨과 해릭이 유일했다.
나머지는 숙박 예약, 공항 절차 등 일상적인 업무에는 젬병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차에서 내린 해릭을 향해 석철이 물었다.
“다 처리했어?”
“예. 전부 끝났습니다. 남궁민에게도 연락을 넣었고요. 그런데 놈이 아직 답신이 없습니다.”
“어디 가서 술이라도 처먹나 보지. 어차피 비행기 타고 가는 시간이 있으니 상관없어. 표는?”
“여기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아냐. 이리 줘.”
석철은 해릭이 건네는 여권과 표 따위를 받아 들었다.
한때 고블린과 같던 해릭의 한쪽 팔은 몇 번의 교정을 거쳐 비로소 인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호공, 그놈이 이런 건 확실히 쓸 만하단 말이지.’
“아, 그리고 허의 사절이 있었습니다.”
“사절이?”
“예. 아무래도 전투 중인 이곳으로 오지 못하고 저에게 온 듯합니다.”
“그래?”
허의 사절이란 호공의 메시지를 뜻하는 은어였다.
놈의 전령은 항상 새카만 까마귀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개인의 취향이라나.
굳이 그렇게 눈에 띄는 전령을 취하는 이유를 석철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어디 보자…….”
석철은 해릭이 건넨 <발화 종이>를 펼쳤다.
그곳에는 단 두 마디가 적혀 있었다.
『며칠 전, 자네 별자리가 빛을 잃고 흉(凶)했네. 당분간 몸 사리는 게 좋을 거야.』
꿈틀.
“이 쳐 죽일 놈이 또 이런 걸 보냈어?”
석철은 <발화 종이>가 스스로 불타기도 전에 북북 찢어 버렸다.
호공은 본래부터 미신에 빠진 놈이었다.
가끔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로.
특히 놈이 종종 보내는 별자리 점은 시답잖은 내용이 많았는데, 한 번은 머리를 조심하래서 온종일 잔뜩 굳어 있다가 그리핀(Griffin) 놈들의 똥을 맞았다.
그뿐인가.
진중은 언젠가 심심풀이로 별자리 점을 봤다가, 벼락을 조심하라는 결과가 나와서 실소했었지.
말이 되는가.
뢰(雷)의 사도한테 벼락을 조심하라니…….
석철이 콧방귀를 뀌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음에 만나면 손모가지를 부러뜨려 버릴라.”
기분만 상한 석철은 몸을 돌렸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비록 신홍이라는 배신자는 잡지 못했지만, 한국에는 이카루스라는 다른 배신자도 있었다.
놈들은 반드시 잡아야지.
“호박씨 까는 배신자 놈들은 사지를 찢어 죽여야지. 어차피 균열이 터지면 자연스럽게 망할 놈들이지만.”
석철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차로 향했다.
그런데 해릭이 서둘러 따르던 찰나.
갑자기 석철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해릭.”
“예?”
퍽!
“억!”
우악스러운 주먹질에 해릭이 바닥에 처박혔다.
“어째서……?”
두개골이 반쯤 뭉개진 해릭이 황망하게 바라봤지만, 석철의 손속은 거침이 없었다.
콰득!
곧 발뒤꿈치에 짓밟힌 해릭의 머리가 그대로 터져 나갔다.
한 차례 꿈틀거린 것으로 삶을 마친 그를 향해 석철을 단 한 마디로 명복을 빌어 주었다.
“그간 고생했다.”
발에 묻은 피를 바닥에 슥슥, 문지른 석철은 차에 올랐다.
아무 생각 없이 조수석에 앉았을 무렵, 뒤늦게 그는 한 가지 실수를 떠올렸다.
“아… 운전을 깜빡했네.”
하지만 이미 운전을 할 해릭은 죽어 버린 뒤였다.
결국 석철은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았다.
“그나저나, 사신 놈은 진중의 마음에 들었으려나?”
부웅―!
이윽고 석철이 모는 차량이 모래 위를 거칠게 가르며 출발했다.
* * *
인천 공항.
“시불, 이건 미친 짓이야. 분명 죽는다고…….”
공항으로 온 조릭은 고개를 떨군 채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가 기다리는 건 석철의 귀국이었다.
석철은 강우에게 용병단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이 살아서 나타난다면?
석철은 일이 잘못됐음을 곧장 인지할 터였다.
“차라리 석철 놈한테 죽는 게 나은 걸까? 시불! 나한테 왜 이런 시련이……!”
주변 행인들이 홀로 중얼대는 조릭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놈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이를 수행하지 않으면 그 지옥에 갇힌 투움바는 영영 살아 숨 쉬지 못할 터였다.
‘은혜를 모르는 인간은 할머니가 평생 저주에 시달릴 거랬어…….’
어릴 적부터 조부모가 들려준 미신들.
밤이 긴 몽골 초원에는 별의별 미신들이 많았다.
귀에 건 커다란 링 귀걸이도 귀신을 막아 준다며 어릴 적 할머니가 선물한 물건.
은근히 조부모의 말은 잘 듣는 조릭이었다.
띠링.
그때였다.
발신인을 알 수 없는 문자에 핸드폰이 울렸다.
조릭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확인했다.
『석철, 들어온다.』
‘시불!’
다급히 핸드폰 문자를 삭제한 조릭은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살폈다.
석철이 탔다는 멕시코 비행기가 곧 도착하려 하고 있었다.
그를 보자 심장이 더 방망이질 치며 도무지 진정되질 않았다.
‘나대지 마, 심장아!’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게이트로 걸어 나오는 석철이 보였다.
여느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걸어 나오던 석철이 곧 조릭을 발견했다.
“응?”
석철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사이, 조릭이 다급히 그에게로 달려갔다.
“서, 석철 님, 큰일 났습니다!”
‘뭐야? 이 새끼가 왜 아직도 살아 있는 거지?’
“미궁이! 미궁이 닫혀 버렸습니다!”
“…뭐?”
“미처 빠져나오기도 전에 미궁이 닫혀 버렸다고요!”
“그게 무슨 개소리야?”
석철은 인상을 팍 구겼다.
그 살벌한 반응에 조릭의 심장이 철렁했으나, 그는 애써 말을 이어 나갔다.
“그게 다 그 길잡이 놈이 죽은 탓입니다! 놈이 보스한테 죽으면서부터 일이 다 틀어졌어요!”
“진중이… 죽었다고?”
석철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진중이 죽었다고?
아무리 <녹색 미궁>의 수준이 높다 한들 진중과 임가륜이 클리어하지 못할 <균열>은 없었다.
잠시 조릭을 바라보던 석철이 곧 손을 뻗었다.
“켁!”
단번에 목을 붙잡힌 조릭이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사이, 석철이 물었다.
“무슨 개수작이야? 그럼 네가 살아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테냐?”
“켁, 켁! 이, 이것 좀… 노, 놓고……!”
웅성웅성.
둘의 소란에 주변의 이목이 쏠렸다.
“…….”
이를 간 석철은 어쩔 수 없이 조릭을 풀어 주었다.
“따라와라.”
* * *
<녹색 미궁>이 발생한 섬으로 향하는 길.
뒷좌석에 앉아 운전 중인 조릭을 노려보던 석철이 물었다.
“그러니까, 임가륜이 널 살려 보냈다고?”
“그, 그렇습니다. 혹시 석철 님은 놈이 늑대였단 걸 알고 계셨습니까?! 놈이 갑자기 늑대로 변하더니, 저를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니까요?! 너무 놀라서 눈알이 빠질 뻔했습니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게, 아무래도 심장병에라도 걸린 것 같습니다.”
“…….”
조릭이 가륜의 정체를 안다는 건, 진짜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한강우는?”
“그놈도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만…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일단 섬에 눕혀 놓고 나왔는데… 이미 죽은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병원이라도 데려갔어야지, 이 머저리 새끼야!”
“죄, 죄송합니다! 저 하나도 겨우겨우 헤엄쳐서 나온 탓에…….”
석철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평소 가륜은 조릭을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도로 삼겠다는 말이 진심인 줄은 몰랐는데… 어차피 <균열>에 닫혔다고 해도 가륜이 죽을 리는 없다.
놈은 마물이니까.
이른 시일 내로 그곳에서 다시 나올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때까지 석철은 진실을 알 방도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석철의 성정상 복잡한 건 딱 질색이었다.
그는 수수께끼 같은 현 상황에 짜증만 치솟았다.
“이 새끼는 대체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벌써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건만, 남궁민은 여전히 연락 두절이었다.
‘당분간 태산으로는 오지 말라는 명이었는데…….’
브레이크가 발생하기 전까지 태산 쪽과의 접근은 피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래서 중간 다리로 남궁민을 둔 건데, 그게 오히려 족쇄가 되고 있었다.
그 순간.
석철은 불현듯 호공이 보낸 점괘가 떠올랐다.
“야, 진중이 보스한테 죽었다고 했지? 봤어?”
“너, 너무 경황이 없어서…….”
“떠올려. 혹시 번개였냐?”
번개라는 말에 조릭은 뜨끔했지만, 어쩐지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자,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너무 겁이 나서…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이 쓸모없는 새끼!”
“죄, 죄송합니다!”
석철은 하마터면 주먹으로 조릭을 후려칠 뻔했지만, 간신히 그것을 참아 냈다.
‘해릭 새끼도 죽여 버렸는데.’
그간 귀찮은 일을 수행하던 핸더슨과 해릭마저 죽어 버렸으니, 이제 그걸 수행할 건 조릭뿐이었다.
하지만 놈은 석철이 생각하기에 ‘바보’보다도 못한 존재.
그래서 남궁민과 동행까지 종종 보내곤 했는데…….
지금은 의지할 게 놈뿐이라니, 속으로 열불이 났다.
‘그래,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그런 개소리에 휘둘릴 석철이 아니다.’
그렇게 석철이 마음을 다스리는 사이, 차가 항구에서 멈췄다.
조릭이 눈치를 보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차, 차로는 여기까지가 끝입니다.”
“시발…….”
현재 섬까지 들어갈 방도는 오직 배뿐이었다.
“배, 배를 구해 오겠습니다.”
“서둘러.”
“예!”
부랴부랴 차를 나선 조릭이 간신히 선장 하나를 구해 왔다.
“섬이 한둘도 아니고, 좌표는 정확히 아쇼?”
“이거면 되겠지?”
석철은 투덜대는 선장에게 가지고 있던 오만 원권과 수표를 잔뜩 내밀었다.
그러자 두 눈이 휘둥그레진 선장이 황급히 그것을 받아 들며 말했다.
“다, 당장 출발하죠! 기다려요!”
곧 어선을 탄 석철과 조릭이 섬으로 출발했다.
탈, 탈, 탈, 탈…….
어딘가 께름칙한 엔진 소리와 함께 배가 바다를 가르기 시작했다.
석철은 쉴 새 없이 부서지는 파도들을 보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진중이 죽었을 린 없다. 그렇다면 놈들이 진짜 미궁에 갇혔다는 건데… 그곳 보스가 그렇게나 강했나? 제기랄, 계획이 다 틀어지겠군.’
한국에 일제히 <균열 브레이크>를 일으키고, 신라가 그것을 섬멸한다.
그게 석철이 모시는 주인의 계획이었다.
여전히 석철은 수많은 권능을 지닌 주인이 이런 귀찮은 연극을 벌이는지 알지 못했다.
스스로 금제(禁制)까지 걸어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분은 자신보다 한 차원, 아니, 더 많은 차원 위의 존재.
자신이 그를 이해하기란 절대 불가능할 터였다.
“저기, 섬이 보입니다!”
그때, 뱃머리에 서 있던 조릭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비로소 <녹색 균열>이 있던 섬이 그들의 시야에 보이기 시작했다.
석철은 서둘러 뱃머리로 달려가 섰다.
“이 개새끼들… 일을 망친 거라면 가만두지 않겠다.”
하지만 그때까지 석철은 알지 못했다.
호공의 점괘는 항상 정확했다는 것을 말이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