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석철의 금고 (4)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간단한 질문이었다.
과거, 한국은 <백귀 균열> 레이드에 번번이 실패하고, 마침내 백귀들이 이 땅에 나오기까지에 이르렀다.
초기 <균열> 때의 악몽이 다시금 재현되려던 것이다.
한반도에 등장한 불멸(不滅)의 언데드들.
그렇게 전 세계의 관심이 백귀에게 쏠리기 시작할 때, 석탈해가 나섰다.
신라는 백귀들의 본거지에 들어가 적을 모두 처리해 버렸고, 이후 신라는 이카루스도 무시 못 할 대형 길드로 성장했다.
석탈해는 <백귀 균열>을 통해 명성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게 사라졌으니…….’
결국 제2의 <백귀 균열>을 만들면 될 일이었다.
고의적으로 <균열 브레이크>를 발생시킨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발상이지만, 석탈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놈은 무려 아홉 마리의 마물을 거느리는 존재이니까.
설사 마물들이 이 세상을 점령한다 해도 놈에겐 3차 각성자의 수준을 상회하는 마물 수하들이 있다.
일반인이 마물을 바라보는 것과 관점부터 다른 것이다.
‘녹색 미궁의 경우를 보면, 마물이라고 서로 간에 무조건 우호적인 것 같지는 않다만.’
어쨌든 석탈해가 <균열 브레이크>를 원한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
“하…….”
비로소 모든 걸 깨달은 강우는 허탈하게 웃었다.
동시에 석탈해가 바벨탑에서 각성자들을 배신한 이유도 깨닫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사도가 마물이라는 걸 마주한 순간부터 알았는지도 몰랐다.
석탈해는 인간이 아니거나, 인간의 편이 아니다.
오히려 놈은 마물 쪽에 더 가까운 존재.
당연히 이 <균열>이 끝나길 원하지 않을 터였다.
‘설마 네놈은 마물의 세상을 원하는 거냐?’
석탈해를 죽여야 할 수천 가지 이유에 하나가 더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생각을 마친 강우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데스 나이트>를 바라봤다.
‘임가륜 또한 죽음의 고리를 사용하고 있었지.’
언젠가 <데스 나이트>는 경고했다.
<죽음의 고리>를 될 수 있으면 <균열>밖에서 사용하지 말라고.
그건 아마도 사도들의 표적이 될 것을 우려한 말이었을 터다.
그렇다는 건, <데스 나이트>는 꽤 오래전부터 놈들의 존재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놈들을 만나기도 전부터.
‘데스 나이트와 이 탑은 날 수련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역시 사도에 반(反)하는 자들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죽음의 순간에 자신을 과거로 데려온 것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탑의 존재들은 모종의 이유로 사도들과 반(反)하게 되었고, 모종의 이유로 이 <사이트 스톤>의 세상에 숨어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럴 순 없는 노릇.
그들은 강우를 통해 사도와 맞서려는 것이다.
어째서 자신들이 직접 상대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남지만, 우선은 이 정도 수준으로 정보를 모으고 가설을 세운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머릿속이 복잡하군.’
불과 하루였다.
오늘 하루 만에 알게 된 수많은 진실이 장마를 맞은 하천처럼 뇌 속을 범람하고 있었다.
모든 걸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사도에 대해 더 알아낸 뒤, 다시 오겠다.”
[아니.]
그러자 침묵하던 <데스 나이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넌 지금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
“…어째서지?”
<데스 나이트>는 단호했다.
[할 일만 마치고 오겠다고 한 게 벌써 두 번째다. 또 속아 줄 정도로 내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다.]
“…….”
[또한…….]
잠시 말끝을 흐린 그가 말했다.
[넌 지금 힘이 필요하다.]
휙.
<데스 나이트>가 팔을 휘젓자, 순간적으로 공간이 일렁이며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엇?! 으아아아악! 자기야아아―!”
조릭이 강제로 밀려나며 비명을 질러 댔다.
순식간에 탑 밖으로 내보내진 놈이 사라지고, <데스 나이트>가 천천히 강우의 앞으로 걸어왔다.
[사도에 대해 물었나?]
비로소 그가 사도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도란 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놈들이다. 특히 네가 지금 상대하려는 석철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지. 놈은 사도 중에서도 두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다.]
두 손가락이라…….
석철이 강한 것은 사실이나, 강우가 느끼기엔 진중과 임가륜도 충분히 그에 못지않았다.
그런데 석철이 그토록 압도적이라고?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진중이나 임가륜을 생각하고 대했다간, 목숨을 잃기 십상이지. 넌 그 두 놈조차 진짜 힘을 마주하지 못했다.]
<데스 나이트>는 밖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전부 보고 있었군.”
[그래.]
어느 정도 예상하던 바라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그는 지난번 <백귀 균열> 이후에도, 석철을 만나고 찾아왔을 때도 강우가 말하지 않은 몇몇 정보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놈들이 보여 준 실력이 진짜가 아니었다니.
그건 그것대로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죽어 가면서까지 실력을 숨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물어야 할 질문은 따로 있었다.
“넌 누구지?”
바로 <데스 나이트>의 정체.
이곳에서 사도와 맞서려는 기사.
사도가 마물이라면, 그 또한 마물이었다.
하지만 죽음의 기사는 좌우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해 줄 수 없는 질문이로군.]
“여기까지 와서 감추려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군. 도대체 언제쯤 속 시원히 말을 들을 수 있는 거지?”
잠시 침묵하던 그가 대답했다.
[이 탑을 진정으로 마주했을 때쯤.]
여느 때와 같은 대답이라 답답하거나 화가 치밀지는 않았다.
대신 강우는 <데스 나이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언젠가 네가 말한 적이 있지, 너희와 나의 목적은 같은 방향일거라고.”
[그래.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럼 그 끝에 있는 건 무엇이지? 석탈해인가?”
[…그 또한 말해 줄 수 없는 부분이군. 이건 감추려거나 숨기려는 의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내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네가 기억하던 석탈해와 지금의 석탈해가 다르듯이, 우리 또한 우리가 기억하는 바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지. 너도 주술로 같은 인간의 기억을 제멋대로 통제하지 않았던가? 기억이란 그리 믿을 만한 것이던가?]
“…….”
어딘가 알 것 같으면서도 아리송한 말이었다.
[복잡해 할 것 없다.]
죽음의 기사가 자신의 검을 말아 쥐었다.
[애초에 넌 놈을 죽이기 위해 그 무엇도 버리겠다 말했지. 설사 네가 불행해질지라도. 어떤가, 그 맹세는 아직 유효한가? 아니면 다시 살아 보니 생각이 바뀌었나?]
“…유효하다.”
[다행이군. 그렇지 않다면 당장 네 사지를 갈랐을 테니. 결심이 여전하다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뿐이다.]
순간, <데스 나이트>에게서 묘한 투기가 일었다.
[고리를 완성시키고 탑을 마주해라. 그래야 네가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 *
“빌어먹을, 여긴 대체 어디야?”
대뜸 탑 밖으로 쫓겨난 조릭은 어리둥절해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도무지 정신을 차리려야 차릴 수 없는 하루였다.
난생처음 <미궁>에 들어가고, 성에서 눈깔 귀신 같은 괴물들이 튀어나오고, 풀 병사에, 석상 병사, 돌연 마물이 된 잡견 임가륜까지.
가장 믿기지 않는 건 자신이 석철을 배신했다는 점이었다.
‘이대로라면… 난 죽어. 사지가 찢기는 걸로도 모자라서 소금에 절여질 거야.’
석철이 자신을 배신한 걸 그냥 넘어갈 리 없다.
조릭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사이코라든가, 정신병자라든가.
여러 안 좋은 소리를 들어오며 용병 짓을 해 왔지만, 자신은 강자였다.
한강우나 석철이 괴물인 거지, 자신도 어디 가서 절대 꿀릴 실력은 아니었다.
자신은 무려 3차 각성자가 아니던가.
‘살아남아야 해. 그러려면… 이곳에 계속 있어야 한다!’
결국 조릭은 한강우의 곁이 자신이 살길임을 알았다.
이 기괴한 세상은 두렵긴 해도, 여기라면 석철도 찾지 못할 듯싶었다.
‘한강우는 석철을 죽이겠다고 했어. 그렇다면 믿어 보는 수밖에.’
한강우는 이상하게도 신뢰가 가는 타입이었다.
자신처럼 입이 가볍지도 않거니와, 석철처럼 잔인하지도, 한때 알던 이반처럼 약속을 밥 먹듯이 어기지도 않았다.
그렇게 조릭이 한참 동안 머리를 굴리던 때였다.
비로소 탑의 문이 열리며 강우가 밖으로 나왔다.
조릭은 황급히 달려가 그를 맞이했다.
“나왔어?! 그 검은 깡통 놈은 뭐야? 그놈이 날 내쫓은 거야?”
“그보다 할 말이 있다.”
“하, 할 말?”
조릭이 두려움이 담긴 시선으로 강우를 바라봤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지금쯤 네 동료가 집에 도착했을 거다. 그놈을 데리고 떠나라.”
“떠, 떠나라고?!”
이곳에 숨어 있으려던 계획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다급하게 무릎을 꿇은 조릭이 강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자기야! 우린 나가면 바로 죽어! 석철, 그놈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놈인데!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올 놈이라고!”
“그런 것까진 내 알 바가 아니다. 내 조건은 너와 그놈을 살려 두는 것뿐이었지.”
“아, 아니면 아까 남궁민한테 해 준 것처럼 가면이라도 줘!”
“그럴 이유도 없다.”
그러자 조릭의 표정이 변했다.
“그럼 나도 못 가! 여기서 절대 안 나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조릭은 마치 장난감을 사 달라고 떼를 쓰는 아이처럼 팔다리를 이리저리 흔들어 댔다.
“일을 여기까지 끌고 왔으면 책임을 져야지!”
“보내 줄 때 나가라. 자꾸 생떼를 쓰면 죽이겠다.”
“그럼 차라리 죽여! 어차피 여기서 죽으나, 나가서 죽으나 똑같잖아!”
조릭은 확신했다.
강우는 금고를 연 남궁민을 신분까지 보장해 주며 살려 주었고, 금고를 연 뒤에도 자신을 살려 주려 하고 있다.
과연 그게 강우의 성정이 너그러워서일까?
마물이라면 눈 하나 깜짝 않고 죽여 버리는 놈이?
아니, 이렇게 보내 주는 것 또한 무슨 의도가 있을 것이다.
즉, 자신은 아직 쓸모가 있는 것이다.
석철을 유인하기 위해서든, 다른 까닭이든, 강우는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 쓸모가 다하기 전까지는.
“…그렇다면 하는 수 없군.”
그런데 조릭의 예상과 달리 강우는 천천히 <피바라기>를 꺼내 들었다.
“어, 어?!”
<피바라기>에 맺힌 마력이 선명했다.
3차 각성자의 피부도 간단히 뚫어 버릴 만큼 강력한 마력이었다.
“자, 자기야……?”
당황한 조릭이 무릎으로 뒷걸음질 치는 사이, 강우가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왜? 원하는 바가 아니었나?”
“그, 그게 아니고… 자기야?!’
조릭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이게 아닌데?!’
하지만 놈의 예상과 달리 강우의 손길엔 손톱만큼의 망설임도 없었다.
푹!
“컥!”
곧 강우의 <피바라기>가 조릭의 목을 꿰뚫었다.
두 눈을 부릅뜬 조릭의 입가로 붉은 선혈이 흐르고, 목을 찌른 검을 부여잡은 두 손이 벌벌 떨렸다.
‘이 개……!’
“끅… 끅……!”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이미 입안 가득 피가 차올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곧 조릭은 절명했다.
“……”
강우는 눈앞에 쓰러진 조릭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스스로 나가진 못하는군.’
예상대로였다.
<데스 나이트>의 말대로 조릭은 이 공간을 스스로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리고……
스르륵.
조릭의 시신이 땅으로 스며들며 소멸했다.
잠시 뒤.
“이 개자식…! 응?!”
다시 태어난 조릭은 눈앞에 서 있는 강우를 멍하니 바라봤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