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석철의 금고 (2)
강우는 남궁민의 차로 돌아와 석철의 보관물을 확인했다.
물건은 간소했다.
수억 원대 어음 몇 장과 녹음기 하나, 그리고 USB 두 개와 전자시계 하나가 내용물의 전부였다.
강우의 눈치를 살피던 남궁민이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제, 제가 아까 은행에 들어가기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대단한 보물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고……. 그래도 USB에 담긴 내용은 쓸 만한 게 꽤 많을 겁니다. 이카루스의 비리라든가, 국가 기밀 사업이라든가… 충분히 대한민국을 흔들 수 있을 정도로요.”
하지만 강우는 묵묵히 석철의 물건을 살폈다.
자신은 이카루스의 도덕성 따위엔 관심이 없었으니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강우는 결론을 내렸다.
‘여긴 비밀 금고가 아니었군.’
손톱만큼이나마 품은 기대가 사그라드는 순간이었다.
과거, 석철이 남궁민을 시켜 금고 속 물건을 가져왔다고 한 순간부터 조금의 의심이 든 강우였다.
아마도 이 USB와 녹음기에 담긴 것은 한국에 한정된 내용일 확률이 높았다.
아홉 사도나 석철해에 관한 이야기를 이곳에 담아 둘 리 없지.
다만, 강우는 석철의 물건들에서 약간의 기시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어음을 제외하면…….’
금고 속 물건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녹음기, USB, 전자시계.’
모두 전자기기였다.
‘왠지 이런 비슷한 상황을 겪은 것 같은데…….’
그러나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곧장 떠오르지 않았다.
“아차!”
그런데 그 순간.
옆에서 은근슬쩍 물건들을 엿보던 조릭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
강우가 이상하게 바라보자, 그 시선에 주눅 든 놈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미안… 갑자기 잊고 온 보물이 생각나서.”
여전히 상황을 가리지 못하는, 실없는 놈이었다.
“출발해라.”
강우는 황한수에게 연락을 넣고 곧장 종로로 향했다.
남궁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종로에 도착하자 이미 황한수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말씀하시니 준비하긴 했는데… 누구예요?”
강우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보낸 뒤에 알려 주겠다.”
“…알겠어요.”
황한수는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으나, 일단은 입을 열지 않고 남궁민 쪽으로 다가갔다.
“가족들은 어디 계시죠?”
“일단 공항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남궁민은 그제야 모든 게 실감 나기 시작하는지 손을 벌벌 떨었다.
불과 오늘 아침, 아니, 조릭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겠지.
“여기 준비한 돈이에요.”
돈 가방과 구형 가면 세 개를 건넨 황한수가 말했다.
“공항에 도착하면, 왕린 씨가 보낸 수하가 있을 거예요. 그곳에서 우리와 관련된 대부분의 기억은 지워질 거고요. 당신은 자신을 새로운 신분으로 기억하게 될 겁니다.”
“그, 그렇군요.”
1차 각성자인 남궁민의 기억을 지울 환술사는 굳이 왕린이 아니어도 많았다.
그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표정이지만, 이미 가면을 쓴 얼굴은 달라져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신분을 얻은 남궁민은 공항으로 떠났다.
‘이 정도면 됐겠지.’
강우가 남궁민을 살려 둔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로, 처음부터 그에겐 별다른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까면 깔수록 석탈해는 수많은 비밀을 꼼꼼히 감춰 두고 있었다.
그런 놈이 고작 남궁민 같은 일반인에게 중요한 비밀을 남겨 뒀을 리 없지.
어쩌면 이미 그의 기억도 상당수 조작된 것일 수도 있다.
역시나 그는 서산 길드의 김무송이라는 남자를 주인으로 임무를 수행해 왔다고 했지만, 태산 빌딩에 그런 길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도 석탈해에게 이용당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반짝반짝.
강우는 아까부터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조릭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조릭은 쓸데가 남았다.
놈을 더 써먹기 위해선 그만큼 신뢰라는 당근이 필요한데, 남궁민의 존재가 그 당근이 되어 줄 터였다.
그때, 다가온 황한수가 물었다.
“오늘 돈 많이 쓰시네요.”
그는 갑작스럽게 의뢰를 쏟아 내는 강우가 의아한 눈치였다.
“어쩌다 보니. 저자의 행방은 계속해서 추적해 줘. 생사만 알려 줘도 충분하다.”
“그 정도야… 알겠어요.”
“그리고 의뢰가 몇 개 더 있다.”
“…또요?”
“오늘 석철이 멕시코로 출국했다. 놈의 행적을 쫓을 수 있나?”
“그자가 멕시코로…….”
“그래. 그리고 놈이 만나러 간 에르난데스라는 자에 대해서도 알고 싶다. 둘이 언제부터 알던 사이인지, 어떤 관계였는지. 그자가 호공과 접촉이 있었는지도.”
“알겠어요. 그런데 지금 바로 맡기에는 너무 많아요. 오늘 온종일 당신 의뢰를 수행하느라고 일이 좀 밀렸거든요.”
슬쩍 강우의 눈치를 살핀 황한수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의뢰를 맡을 단원도 충분하지 않고요. 새 단원이 들어온다면 모를까……. 그래도 최대한 서두를게요.”
하긴, 그간 강우가 막무가내식으로 맡긴 의뢰가 꽤 되었다.
황 노인과 청익이 편의를 봐주지 않았다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
이미 자신의 행보에 검계의 도움이 상당수 작용했음을 강우는 잘 알고 있었다.
비록 그때마다 의뢰비를 지불했다지만, 자신이 받은 도움은 항상 그것을 웃돌았다.
다른 단원들이 알면 편애라고 느낄 만치 전폭적인 지원.
황 노인이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기대를 떠나서 그의 성의가 모두 진심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런데도 여기서 더 우길 순 없지.
“…알겠다.”
“그런데 말이에요. 아까 그 남궁민이라는 사람, 그 남자도 석철과 관련이 있는 거죠?”
강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숨겨 봐야 금방 알아낼 수 있는 대답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러자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던 황한수가 곧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이걸 지금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요, 요즘 할아버지는 이카루스에 관심을 두고 있어요.”
황 노인이 관심을 둔다.
단순하게 들으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그는 무려 검계의 수장.
그의 관심은 곧 검계의 주시를 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황 노인이 이카루스에게서 무언가 냄새를 맡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무슨 뜻이지?”
후, 작은 한숨을 내쉰 황한수가 말했다.
“강우 씨도 알고 있잖아요, 석철이 이카루스와 관련이 있다는 걸. 일부러 미행하려고 한 건 아니고, 이카루스를 조사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거예요. 얼마 전까지 석철과 함께 지냈죠? 그들과 같이 이카루스 빌딩에서 하룻밤 묵었고요.”
“…….”
몰래 찾아올 정도로 조심스럽던 이승우와 달리 석철은 이카루스를 만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대놓고 빌딩의 숙소까지 이용하는데, 그 인연을 검계가 눈치채지 못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카루스는 석철과 관련이 있고, 석철은 다시 이한과 관련이 있어요.”
“…이한이라고?”
예기치 못한 이야기에 강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여기서 갑자기 이한이 왜 나온단 말인가.
“일단은 바쁘니까 결론만 말씀드릴게요. 이한이 아이들을 강제로 각성시킨 일 있죠? 아무래도 이카루스도 그 고객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당연히 이카루스가 직접 데려가진 않고 운반책을 썼는데, 그게 바로 남궁민이었어요. 해릭이라는 자도 한 번 왔고요.”
해릭.
그는 석철의 임시 용병단 중 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놈과 함께 멕시코에 간.
“역에서의 흔적을 어떻게 그리도 깨끗하게 지웠는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지만… 하여튼, 이카루스는 석철뿐만 아니라 해외 용병 여기저기에 손을 뻗고 있어요. 무슨 꿍꿍이인지 국내 균열을 그들에게 몰래 건네주면서까지요.”
이카루스가 해외 용병을 모은다.
강우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게 석철과 관련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용병을 모으는 건 그렇다고 쳐도, 몰래 <균열>까지 줘 가면서 모집하는 건 확실히 이상하군.’
불법적으로 모인 용병들은 불법적으로 쓰일 요지가 컸다.
황한수가 말을 계속했다.
“지금 이카루스는 한국의 모든 길드를 통합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어요. 일본의 키리 길드처럼요.”
일본은 단일 길드가 활동하는 유일한 국가였다.
짧은 <균열> 역사상 단일 길드를 추구한 나라가 셋 있는데, 바로 중국과 독일, 일본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성공한 건 일본뿐.
중국은 자존심 센 수많은 강자로 인해 사분오열했고, 독일은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할 수도 있다는 자국 각성자들의 반발로 단일 길드 추진이 무산됐다.
“하지만 그간 이카루스는 그 야망을 섣불리 드러내지 못했어요. 김인표도 그렇고, 서유리를 중심으로 한 스톰 길드도 그렇고, 쟁쟁한 경쟁자들이 있기 때문이죠. 한국이 하나의 길드로 통합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카루스로서 가장 중요한 건 그 통합의 중심에 자신들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당연한 일이다.
죽 쒀서 남 주고 싶진 않을 테니까.
이카루스는 자신의 이름 아래 한국의 모든 길드를 두고 싶어 할 터였다.
“결국 지금 이카루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명분이로군.”
“…맞아요.”
멋있어 보일 기회를 놓친 탓인지, 황한수가 작게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분명 이카루스는 무슨 꿍꿍이가 있어요. 우리는 이카루스가 용병을 몰래 모아 가면서까지 하려는 게 뭔지 알아보는 중이에요. 단순히 생각하면 간단해요. 명분이 필요한 사람이 힘을 모은다. 그건 그 힘을 쓸 타이밍을 노리는 거죠.”
“만약 그 타이밍이 찾아오지 않으면?”
“스스로 만들어 내겠죠.”
“확실히 수상하긴 하군.”
황한수가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우선은 여기까지만 말씀드릴게요. 굳이 지금 먼저 말씀드리는 건, 이카루스에 대해 알게 된 게 석철 때문이라 그래요. 강우 씨가 맡긴 석철에 대해 조사하다가 이카루스의 수상한 점을 알게 된 거거든요. 그러니까 바쁜 일 끝나면 한 번 양복점으로 오세요. 할아버지와 대화하실 게 많을 거예요. 괜히 우리와 동선이 겹칠 수도 있고요.”
“…알겠다.”
“그리고…….”
잠시 머뭇대던 황한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이건 개인적인 거라… 나중에 봬요.”
뭘 말하려다 말았는지는 몰라도, 황한수는 골목으로 도망치다시피 사라졌다.
잠시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강우는 곧 고민에 빠졌다.
‘석탈해… 대체 무슨 꿍꿍이지?’
과거, 석탈해는 <백귀 균열>을 통해 명성을 얻은 뒤, 일약 스타 반열에 올라 한국의 톱 길드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현재는 강우의 활약으로 백귀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아직 신라가 세계적인 명성을 떨칠 기회도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놈은 <백귀 균열>의 대체재를 찾는 데 혈안이 돼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카루스가 그 대체인 건가?’
이카루스, 이한, 석철, 호공.
지금까지 얻은 단서에 분명 그 힌트가 담겨 있을 것 같았다.
‘조사할 가치가 있겠군.’
몸을 돌린 강우는 조릭이 기다리는 차로 향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