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서열잡이 (5)
미궁이 흔들리며 하늘에서 검은 번개가 사정없이 내리쳤다.
이번에는 아무리 발 빠른 임가륜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놈은 떨어지는 벼락들을 온몸으로 받아 내며 이를 갈았다.
어째서 놈이 진중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가.
그런 건 지금 중요한 의문이 아니었다.
임가륜의 머릿속은 온통 분노로 가득 차 굽이쳤다.
“네놈……!”
“뢰(雷).”
하지만 놈의 분노는 곧 무수한 벼락에 묻혀 버렸다.
“뢰.”
“뢰.”
“뢰.”
번쩍!
콰과과과광!
콰르르르르릉!
계속해서 떨어지는 벼락이 임가륜의 육신을 좀먹고, 피와 살을 태웠다.
재생 능력이 뛰어나다는 <늑대인간>답게 놈의 상처는 조금씩 수복됐지만, 연달아 몸을 태우는 낙뢰를 전부 견뎌 내기에는 무리였다.
마력과 마력의 싸움.
누구의 마력이 더 먼저 동나느냐 싸움이었으나, 임가륜은 곧 패배를 직감했다.
강우가 지닌 마력은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니까.
왜 알지 못했을까.
놈이 석철의 변태적인 고문을 견뎌 낸 순간부터, 손쉽게 <마력 골렘>과 진중을 처치했을 때부터 이미 승패는 정해져 있었음을 말이다.
곧 임가륜의 몸을 보호하던 마력이 바닥났다.
콰직!
제일 먼저 잘려 나간 건 오른팔이었다.
벼락에 어깨가 찢겨 나가자, 하늘을 막아서던 검과 팔이 허무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검이 새카맣게 타고, 팔이 불타올랐다.
이어서 왼쪽 허벅지가 녹아내렸으며, 꼬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을린 이마로 두개골이 훤히 드러났다.
피는 미처 흘러나오기도 전에 공중으로 불타 증발해 버렸다.
곧 반쪽짜리 시야를 반대편으로 아득한 어둠과 공포가 밀려들었다.
한쪽 눈마저 녹아내린 것이다.
“제기랄!”
결국 임가륜이 최후에 선택한 건 도주였다.
강우와 <미궁>의 입구를 등진 줄행랑.
사도가 꽁무니를 빼다니… 그분이 아시면 혀를 찰 일이었으나, 이제 자신에게 남은 임무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사도를 죽일 무위를 지닌 존재.
사도의 목숨을 거둘 수 있는 존재.
그 사신(死神)의 존재를 그분께 알려야만 했다.
하다못해 석철에게만이라도.
그는 자신의 이명처럼 네 다리로 바닥을 박차 달아났다.
가죽이 탄 등 뒤로 빨갛게 달아오른 생살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놈의 분에 찬 목소리가 온 통로에 울려 퍼졌다.
“네놈은 결코 쉽게 죽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입구 반대편으로 달아나는 임가륜의 앞에는 다시 일어선 <변종 노움>과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풀 병사, 그리고 석상 근위대가 있었다.
고얀… 고양이!
거기에 분노한 <정예 변종 노움>까지.
“꺼져!”
임가륜이 사력을 다해 놈들에게 남은 마력을 퍼부었으나, 남아 있는 마력으로 그 수를 뚫기는 힘들어 보였다.
수많은 마물 속에서 분투하던 놈은 곧 노움들에게 둘러싸여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무리했군.’
뒤쫓아 처리하기에는 자신도 이미 마력을 많이 소진한 상태였다.
<사이트 스톤>에서의 수련 이후로 처음 느껴 보는 마력의 고갈.
강우는 한 차례 더 반월의 마력을 퍼붓는 것으로 승부를 마무리 지었다.
“사, 살려 줘!”
그런데 그때였다.
공격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쪽으로 허둥지둥 달려오는 조릭이 보였다.
놈이 어깨에 들쳐 멘 건 다름 아닌 투움바였다.
피투성이가 된 투움바의 양 팔목에는 조릭이 두른 것으로 보이는 천이 자리해 있었다.
달려온 놈이 강우에게 매달려 애원했다.
“오늘 본 건 전부 잊을게! 평생을 입 다물고 살게! 절대 발설하지 않을게!”
조릭은 무릎까지 꿇고 손을 싹싹 빌었다.
하지만 강우는 놈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이곳에서의 일은 석철을 죽이기 전까지 계속 비밀로 남아 있어야만 했으니까.
그런데 강우가 막 <피바라기>를 내려치려던 찰나.
기겁한 조릭이 허겁지겁 소리쳤다.
“내가 석철의 비밀 금고를 알아!”
강우의 손길이 멈췄다.
“금고?”
그러자 희망을 얻은 조릭이 부랴부랴 이야기를 꺼냈다.
어찌나 다급한지 온몸과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저, 저번에 남궁민이 한국 금고를 여는 걸 봤어!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금고야! 내, 내가 그때 호위로 갔거든!”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지, 진짜야! 남궁민한테 대리 권한이 있으니까… 놈만 데려가면 충분히 열 수 있어! 금고에 뭐가 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엄청난 게 숨겨져 있는 건 분명해! 그 안에 있는 것들이면 나라도 살 수 있을 거라고!”
석철의 금고라…….
진짜라면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그 안에 석탈해와 호공에 관한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고.
“석철이 해외로 간 지금이 기회야! 남궁민만 불러내서 털면 그만이라고! 내가 놈을 불러낼 수 있어! 놈은 겁도 많고 허약해서, 다리 하나만 부러트려도 술술 불걸?! 내, 내가 다 할게! 넌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면 돼!”
“…….”
강우는 잠시 고민했다.
그는 지금 금고의 값어치와 조릭의 위험성을 저울질하는 중이었다.
‘놈들이 말한 사도가 모두 비슷한 실력이라면, 석철을 상대하기도 어렵진 않다.’
강우가 고문까지 참아 가며 석철의 휘하에 들어간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석철의 현재 실력을 알아내는 것.
다른 하나는 석철을 통해 호공과 석탈해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
하지만 돌연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석탈해에겐 석철과 호공뿐만 아니라 일곱의 수하가 더 있었다.’
아홉 사도.
놈에겐 그간 몰랐던 비밀 조직이 존재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진중은 죽었고, 임가륜도 곧 죽을 예정이니, 남은 사도는 모두 일곱.
에르난데스라는 자를 제외하면 남은 숫자는 여섯뿐이었다.
‘그 에르난데스라는 자를 만나봐야겠군.’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던가.
지금쯤 이미 석철의 손에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사도의 힘이 서로 비슷하다면 아직 살아 있을 법도 했다.
만약 놈을 만날 수 있다면?
굉장한 정보처를 얻게 되는 걸 수도 있다.
‘그나저나 만약 석철과 호공도 마물이라면… 그건 좀 충격이로군.’
사도인 진중과 임가륜이 마물이었으니, 그 둘도 마물일 확률이 존재했다.
‘기가 차는군.’
고민을 마친 강우가 조릭을 내려다봤다.
“제발…….”
놈은 애처로운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입 밖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가 그 생사를 결정할 터였다.
곧 강우의 입이 열렸다.
“받아들이지.”
“고, 고마워! 정말 고마워! 진짜 최선을 다할게!”
조릭은 눈물까지 흘려 가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강우는 그 모습을 보며 <피바라기>를 거두었다.
‘금고를 확인할 때까지 잠깐의 연명이겠지만.’
이전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석철 용병단에 어울리지 않은 놈을 굳이 뽑으라면, 그건 바로 조릭이 될 듯했다.
핸더슨도 그런 감이 있었지만, 조릭은 그보다 훨씬 더 감정적인 인물이었으니까.
‘그래도 석철이 자신의 뒤에 둘 정도로 신임하던 놈이다. 쓸모는 있겠지.’
석철은 조릭을 공항에서부터 뒤에 남겨 두었다.
거기에 실제로 비밀 금고를 방문한 남궁민의 호위까지 맡겼다면, 석철은 조릭의 솔직함을 높이 샀을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계속 석철을 속일 수 있을지도.’
곧 강우는 <미궁>을 나섰다.
* * *
<미궁> 밖으로 나온 강우는 곧장 검계에 연락을 취했다.
아무리 <균열>에 임가륜을 가둬 놓았다지만, 확실히 닫힐 때까지 그 앞을 지켜 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확인하는 게 확실하겠으나… <미궁 균열> 특성상 소멸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었다.
그 귀중한 시간을 그렇게 낭비할 순 없는 노릇이다.
“이 섬은 뭐예요?”
약 한 시간 뒤.
헬기를 타고 섬에 도착한 건 황한수였다.
<검계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아직 마력을 다루는 게 미숙한 탓에 마력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를 마주한 강우가 말했다.
“쓸 만한 자를 보내 달라고 했을 텐데.”
“…저만 온 거 아니에요.”
황한수가 돌아보자, <검계의 가면>을 쓴 다른 두 남녀가 보였다.
체구가 좋은 근육질 남자와 오랜 수련 과정이 엿보이는 탄탄한 체격의 여자.
비록 얼굴은 다르나, 그 둘이 일전에 의왕 IC에서 만난 단원이라는 걸 알아채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리더격이던 A와 제일 먼저 청익의 시신을 향해 달려간 저돌적 성격의 D.
남자 D가 자신의 턱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휴가 중이었는데 말이지.”
“괜히 아닌 척하지 마. 불도저 F의 의뢰라는 말에 흥미가 일어서 온 거잖아.”
“크흠.”
A의 지적에 D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생각보단 평범한 얼굴이로군. 상상에는 콧등에 칼자국이라도 하나 새겨져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반갑다. 난 드렉슬러라고 한다.”
“본명은 도봉팔이지.”
“…시끄러워, 도봉순.”
“닥쳐라, 봉팔아.”
…도봉팔, 도봉순?
같은 성씨로 미루어 남매인가 싶었지만, 강우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한강우다.”
“한강우… 멋진 이름이네.”
“부럽다.”
“…….”
강우는 두 사람과 간단히 악수를 나눈 뒤, 즉각 본론을 꺼냈다.
“이 균열이 소멸할 때까지 앞을 지켜 주길 바란다. 안에서 반인반수의 마물이 튀어 나올 수도 있다.”
“반인반수? 무슨 마물이지?”
“늑대인간 같더군.”
그러자 <균열> 쪽을 이상하게 바라보던 드렉슬러, 아니, 도봉팔이 물었다.
“여긴 보스가 이미 죽은 것 같은데… 마물이 어떻게 튀어나온다는 거야?”
“그런 마물도 있다는 걸 나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죽이려고 했지만, 몸놀림이 좋아. 작정하고 달아나면 붙잡기 힘들다.”
“그래서 가뒀다, 이거군. 균열이랑 같이 사라지라고.”
“그래.”
뒤늦게 조릭과 투움바를 발견한 도봉팔이 다시 물었다.
“저놈들은 뭐지?”
“미끼다. 혼절한 놈은 데리고 있다가 균열이 닫히면 잠시 맡아 둬. 만약 내가 한 시간 이상 연락이 없거든 베라.”
“…쉽네.”
“부탁하지.”
둘 다 3차 각성자이므로 힘이 다한 임가륜이나 양손을 잃은 투움바를 상대하기에는 큰 문제가 없을 터였다.
대화를 마친 강우는 그 즉시 황한수가 가져온 헬기에 몸을 실었다.
한껏 주눅이 든 조릭도 함께.
마지막으로 헬기에 오른 황한수가 말했다.
“이번 의뢰 비용은 비싸요. 못 해도 억은 주셔야 해요. 이 헬기도 간신히 구한 거거든요. 아무리 우리라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의뢰를 수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알겠다.”
“근데 정말 무슨 일이에요? 저 균열은 입찰에도 안 올라온 건데…….”
“그 질문은 얼마짜리지?”
그 질문도 의뢰냐는 물음이었다.
그러자 작게 신음한 황한수가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안 들은 걸로 해 주세요. 아, 그리고 이거.”
이어서 황한수가 건넨 건 새로운 가면이었다.
이전의 가면이 반쪽짜리였다면, 이번에 받은 건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진, 완전한 가면이었다.
“이번에 왕린 님이 새로 개발한 가면이에요. 3차 각성자의 눈도 속일 수 있는 가면이죠. 특별히 한강우 씨 것은 검은색으로 칠했다고 했어요. 스페셜 에디션 2호라나.”
언제 나오나 싶었는데, 드디어 완성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황한수의 말에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든 강우가 물었다.
“에디션 1호는 뭐지?”
“그건 한선화 씨 거라던데요?”
뒤늦게 생각하니 당연한 걸 물어본 셈이 되었다.
왕린이 스페셜함을 선물할 사람은 당연히 그 딸이 1순위일 테니까.
“출발하지.”
그렇게 헬기는 석철의 비밀 금고를 향해 출발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