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서열잡이 (3)
“해, 핸더슨!”
한때 서열 2위였던 핸더슨의 허무한 죽음.
그를 놓쳤던 투움바가 두 눈을 부릅뜬 채 소리를 질렀다.
이산과 타이슨에 이어 이반, 핸더슨까지.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멕시코에서 더할 나위 없는 위용을 떨치던 용병단이 절반 이상 사망해 버렸다.
어쩌자고 석철은 이런 지옥에 자신들을 밀어 넣은 걸까.
순간, 어지러움을 느낀 투움바가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그들이 위기에 처했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정신 차려, 덩치 새꺄!”
투움바를 깨운 건 조릭이었다.
어느새 달려온 조릭이 그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리며 소리를 빽! 질렀다.
“뒈지기 싫으면 달려!”
뒤늦게 정신을 수습한 투움바가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핸더슨의 목숨을 거둔 강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초대형 만드라고라를 향해 <피바라기>를 휘두르는 중이었고…….
끼아아아아아!
그때마다 만드라고라는 계속해서 비명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 비명 소리에 마물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지금이 마지막으로 달아날 절호의 찬스였다.
아까부터 두 손으로 양 귀를 감싸고 있던 임가륜이 외쳤다.
“어서 갑시다!”
“씨발!”
이미 진중은 저 멀리 사라진 뒤.
그제야 사태를 깨달은 투움바도 자신의 도끼를 손에 꼭 쥔 채 달리기 시작했다.
몇몇 <변종 노움>들이 앞을 가로막았으나, 3차 각성자인 조릭과 투움바에게 있어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들은 울분을 참지 않고 적에게 분출했다.
조릭의 단검이 <변종 노움>의 목에 구멍을 내고, 투움바의 도끼가 그 배때기를 갈랐다.
마침내 그들이 만드라고라에 다다르자, 강우의 손속도 멈췄다.
그 잠깐의 틈을 타 투움바가 소리를 질렀다.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됐다! 너라면 충분히 핸더슨을 제압할 수 있었어!”
그러나 강우의 대답은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내게 그럴 이유가 있나?”
“뭐?!”
아무리 강우를 적대시했다 한들, 평소의 핸더슨이라면 그토록 성급한 싸움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기회를 엿보고 엿보다 정식 대결을 신청했겠지.
이를 부드득 간 투움바가 다시 소리쳤다.
“이 미궁을 나가면 해결될 문제였다!”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마라.”
“너, 이 새끼……!”
하지만 투움바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뢰(雷).
일순간 빛이 번뜩이나 싶더니, 광활한 마력의 흐름이 그들의 뒤를 덮쳤기 때문이다.
그건 번개였다.
콰과과과과!
단번에 내리친 수십 개의 하얀 번개가 백여 마리의 <변종 노움>을 일순간에 불태워 버렸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멈출 줄 모르고 달려오던 <정예 변종 노움>조차도 순간 멈칫할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번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초대형 만드라고라에까지 내리쳤다.
콰과과과광!
마치 폭탄 수천 개가 동시에 폭발하는 듯한 굉음 뒤로…….
백색 벼락에 두 쪽 난 거대 식물이 반으로 갈라져 축 늘어지고 있었다.
어찌나 그 소리가 강했는지, 일대의 모든 마물이 기절한 듯 고꾸라져 미동조차 없었다.
심지어 <정예 변종 노움>조차도.
이어서 선명하게 날아드는 탄내.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투움바가 중얼거렸다.
“…핸더슨?”
그러나 자신들 중 가장 강하던 핸더슨이라도 저런 수준의 파괴력은 무리였다.
곧 번개의 주인을 알아챈 투움바의 얼굴이 빠르게 일그러졌다.
“네놈… 이런 실력을 갖췄으면서 어째서!”
하얀 번개로 <변종 노움>을 단번에 쓸어버린 건 다름 아닌 진중이었다.
처음으로 전투에 개입한 진중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도깨비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이를 간 투움바가 그 앞으로 다가가 놈을 똑바로 노려보며 물었다.
“왜 이제야 나섰냐고 물었다.”
“내 역할은 길잡이니까.”
“개소리! 대체 네놈들은 무슨 생각이냐! 이걸 석철 님이 그냥 넘어갈 것 같아?!”
분을 견디지 못한 투움바가 도끼까지 내던진 채 진중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각!
“……?!”
진중의 손이 움직이나 싶던 찰나, 멱살을 움켜쥔 투움바의 양손이 그대로 절단돼 바닥으로 떨어졌다.
투움바도, 멍하니 지켜보던 조릭도 그게 무슨 상황인지 즉각 인지하지 못했다.
투움바가 신음을 흘린 건 약 2~3초가 흐른 뒤였다.
“크학!”
양손을 잃은 투움바가 뒤로 비틀비틀 물러섰다.
“이 개새끼들!”
놈의 얼굴이 참을 수 없는 울분과 분노로 잔뜩 구겨졌으나, 양손을 잃은 놈이 더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진중이 그 모습을 담담히 바라보는 가운데, 조릭과 임가륜이 서둘러 무기를 겨누었다.
조릭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뭐야?! 갑자기 왜 이래?!”
그러나 강우도, 진중도…….
이미 이 상황을 예견하고 있던 둘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강우는 석철의 말을 떠올렸다.
― 상황이 바뀌었다. 핸더슨과 이반이 합류하거든, 그때는 때를 봐서… 모조리 죽여라.
아마도 멕시코에서 활동한 이놈들은 석철에게 있어 그저 ‘용병단’이라는 활동의 구실을 만들어 주는 겉치레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놈이 바뀌었다는 ‘상황’이 무엇인지까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그것만은 확실했다.
‘놈에게 이제 이 용병단은 쓸모없어졌다는 것.’
아마도 놈의 진짜 패는 눈앞에 있는 진중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한 명 더.
“가륜, 언제까지 장난질을 계속할 생각이냐?”
“하핫, 테스트는 이제 끝입니까?”
진중의 말에 임가륜이 웃음을 흘리며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시불, 이게 대체…….”
긴장한 조릭이 현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는 사이, 검을 거둔 임가륜이 천천히 진중 쪽으로 걸어왔다.
“역시나 건질 건 없었군요. 아니, 하나는 제대로 건졌다고 해야 할까요?”
임가륜은 강우 쪽을 슬쩍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 시선에 강우가 진중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아야겠군.”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강우 공.”
어느새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임가륜이 입을 열었다.
“사실 이 자리는 새 멤버를 뽑는 자리였습니다. 원래 있던 한 친구가 갑자기 우리를 배반해 버렸거든요. 음, 아마도 그 친구는 지금쯤 멕시코 국경에서 머리만 굴러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배반자는 에르난데스란 자를 뜻하는 건가.
강우는 잠자코 임가륜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원래는 이번 용병단 중에서 쓸 만한 자를 새 멤버로 영입하려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아무래도 영 마음에 차는 자가 없었나 봅니다. 그런데 때마침 강우 공이 우리 눈앞에 딱 나타난 거지요!”
임가륜은 어딘가 신이 난 기색이었다.
“사실 저는 조릭 공이 조금 탐나긴 했는데… 다들 반대해서요.”
“이 빌어먹을 잡견 새끼!”
“미안하게 됐습니다, 조릭 공. 우린 더 이상 함께할 수 없겠군요.”
임가륜은 조릭을 향해 공손히 고개 숙여 사과를 건넸다.
조릭이 놈에게 온갖 쌍욕을 퍼붓는 사이, 강우가 다시 물었다.
“그럼 너희 둘이 석철의 진짜 수하인가? 모두 몇이지?”
임가륜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석철의 수하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동등한 위치이지요. 서로 좀 무시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놈이 제 뺨을 긁적였다.
“서로에게 명령하거나 그 권한을 침해할 순 없습니다. 우리는 한 주군을 섬기는 사이이니까요.”
‘한 주군…….’
그게 누구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석탈해에게 석철과 호공 말고도 다른 직속 수하들이 있었다니.
놈은 강우의 예상보다도 더 엄청난 세력을 숨겨 둔 듯했다.
진중이나 임가륜이나, 전생에서는 그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모두 여덟입니다. 이번에 강우 공이 들어왔으니 다시 아홉이 되는군요. 축하합니다, 사신(死神). 당신은 아홉 번째 사도로 우리와 함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예기치 못한 상황에 강우는 꼭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이유는 알지 못했다.
이 상황이 어이없이 때문인가.
아니면 벨 상대가 더 늘어났기 때문인가.
어느 쪽이든 우스운 건 마찬가지였다.
“사신. 이제 취임식을 마무리해야 할 때입니다.”
임가륜이 조릭과 투움바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이 두 사람을 죽이십시오. 그리 어렵지는 않으시겠군요. 정이 들기엔 짧은 시간이었으니까요.”
석철이 사신이라는 이명에 좋아하던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리라.
놈은 오늘 일이 이렇게 될 걸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강우를 용병으로 받아들인 순간부터 놈은 이 용병단을 버릴 생각이었을 테니까.
“후…….”
긴숨을 내쉰 강우가 서서히 <피바라기>를 들어 올리자, 조릭의 낯빛이 굳어졌다.
양손을 잃은 투움바가 도움이 될 리는 만무하고.
아무리 자신이 전력을 다한들 강우를 절대 당해 내지 못할 거란 걸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놈에게 남은 선택지는 애원뿐이었다.
“자기, 진짜로 우릴 벨 건 아니지? 저 사이코패스들 말을 들을 거야? 절대 아니지?!”
“…….”
그러나 놈의 바람과 달리 강우는 대답이 없었다.
다만, 묵묵히 조릭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자기야?! 이 미친 새꺄! 너도 저 새끼들 같은 쓰레기가 될 테냐?! 엉?! 이 쓰레기 새꺄!”
당황한 조릭이 발작적으로 외치며 뒷걸음질 쳤다.
홀로 남겨진 투움바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듯 멍하니 서 있을 뿐.
그런데 막 강우가 투움바에게 다다랐을 무렵.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강우 공.”
“그 여덟이라는 자 중에 혹시 호공이라는 이름도 있나?”
“…….”
임가륜은 잠시 말이 없었다.
둘의 대화를 줄곧 지켜보던 진중도 처음으로 미간을 꿈틀댔다.
“…그건 어떻게 안 겁니까? 혹시 석철이 말해 주었나요?”
그러나 강우는 대답 대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더. 석철이 내게 말하길…….”
<피바라기>에서 검은 불길이 일었다.
“모조리 죽이라 말했다. 그건 네놈들도 포함이 아닌가?”
“호. 그건 그리 좋은 판단이 아닌 것 같은데요.”
콰과과과과!
단번에 휘두른 <피바라기>에서 검은 마력 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임가륜과 진중이 서둘러 물러나는 가운데, 임가륜이 외쳤다.
“하핫! 이토록 도발적인 상대는 석철 이후로 처음이군요! 역시 인간은 보기보다 ‘의외성’이 넘칩니다! 즐겁군요!”
“가륜, 집중해라. 범상치 않은 놈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콰드드드득!
부딪친 세 개의 마력이 세상을 찢을 듯 폭발했다.
“강우 공은 강합니다! 하지만 제가 천외천(天外天)이 있다는 걸 이번 기회에 알려 드리지요! 그리고 오늘부터 막내는 당신이라는 것도! 쾌(快)!”
푸른 마력을 두른 임가륜이 연달아 쾌검을 찔러 오는 가운데, 하늘에선 진중의 백색 번개가 강우의 머리맡으로 내리쳤다.
“시불!”
그 해괴한 광경에 조릭은 황급히 투움바를 붙잡고 입구를 향해 내달렸다.
쿠구구구궁!
하지만 그의 도주는 곧 밀려든 풍압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크학!”
둘이 바닥을 구르는 가운데, 바람을 일으킨 임가륜이 말했다.
“거기서 잠자코 차례를 기다리시지요!”
“저 망할 잡견 새끼!”
뢰(雷).
콰르르르르!
그사이, 진중과 강우의 전투는 현란하다 못해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벼락을 단번에 떨쳐 낸 강우가 검은 마력으로 진중을 견제하더니, 이내 쏜살같이 임가륜에게로 쇄도했다.
“이크!”
슥! 슥!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살초들.
강우의 검격에 기겁한 임가륜이 황급히 물러서는 사이, 강우의 옆으로 달려온 진중이 팔을 휘저었다.
“뇌격(雷激).”
파지지지직!
그건 수십 갈래로 뻗어 나오는 전격의 창이었다.
사람 팔뚝만 한 굵기의 하얀 창들이 모두 제각각의 궤도를 그리며 강우의 사방을 틀어막고 날아들었다.
그야말로 물샐틈없는 공격을 펼친 진중이 중얼거렸다.
“무모함에도 정도(程度)라는 게 있는 거다.”
그런데 위기의 순간, 강우의 마력 흐름이 바뀌었다.
증폭(增幅).
대번에 늘어난 마력이 사나운 기세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하얀 마력의 창들이 강우의 몸에 닿기도 전에 소멸하는 게 보였다.
“……?!”
당황한 진중이 멈칫하는 찰나, 삽시간에 스킬을 파훼한 강우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큭!”
결국 진중은 피를 보고야 말았다.
강우의 <피바라기>가 그의 가슴을 베자, 임가륜이 경악한 눈으로 소리를 질렀다.
“죽음의 고리?! 어째서 저게 저기에……!”
어느새 강우의 오른쪽 어깨에 둘러진 <검은 고리> 하나.
호흡을 고르는 강우는 더욱 강력해진 마력을 흘리고 있었다.
임가륜의 눈에 비친 강우는 한없이 고고해 보였다.
“생각이 바뀌었다.”
강우의 입이 열렸다.
“굳이 연극을 할 필요가 없어졌어. 너흰…….”
<피바라기>가 번뜩였다.
“오늘 여기서 죽는다. 모조리.”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