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헌터-63화 (64/186)

[63화] 서열잡이 (2)

저 멀리 갈라진 벽 사이로 <균열>의 입구가 보였다.

묘하게 일렁이는 거대한 녹색 포탈.

저것만 넘으면 이번 <균열>도 무사 귀환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큭!”

아까부터 불안하게 절뚝거리던 타이슨이 결국 더 달리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징검다리 관문에서 입은 화상이 문제인 모양이었다.

“타이슨!”

“괜찮습니까?!”

강우와 용병단이 멈춰 선 사이, 서둘러 달려간 조릭과 임가륜이 그의 두 다리를 살폈다.

하지만 다리의 상태를 확인한 그들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

“…제길.”

물에서 빠져나온 뒤에도 살이 계속 녹아내렸는지, 타이슨의 두 정강이뼈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심지어 왼쪽 다리는 뼈가 간신히 모양새만 유지하고 있는 수준.

여기까지 달려온 게 기적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조릭이 입술을 깨물었다.

“너…….”

“괜찮다. 어차피 석철 님이라면 충분히 고쳐 주실 수 있어.”

“일단 제게 업히십시오.”

임가륜이 조릭의 도움을 받아 서둘러 타이슨을 등에 업는 사이, 강우는 그런 그들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당연히 안타까워서는 아니었다.

그는 조금 전 타이슨이 한 말을 곱씹는 중이었다.

‘저 정도 상처를 충분히 고칠 수 있다고?’

괜한 오기일까 싶었지만, 타이슨의 표정은 분명 진지했다.

굳은 믿음과 진한 진심이 담긴 표정.

하지만 아무리 봐도 놈의 상처는 전설 속 화타가 각성한다 해도 회생 불가능해 보였다.

석철에게 그런 의술이 존재할 리도 없는데…….

자신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건가?

그러나 의문은 그리 길지 않았다.

거기… 서!

여전히 뒤에선 <정예 변종 노움>과 무수한 숫자의 마물들이 계속해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눈앞의 탈출이 우선이었다.

게다가 아직 강우에게는…….

― 상황이 바뀌었다. 핸더슨과 이반이 합류하거든, 그때는 때를 봐서…….

석철이 <전음>으로 남긴 일거리가 더 남아 있었다.

“가자!”

타이슨에 대한 수습이 끝나자, 그들은 다시 미궁의 입구를 향해 달렸다.

마침 진중이 마지막 수풀 벽을 부수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뻥 뚫린 공터를 사이로 입구까지 남은 거리는 약 200미터 남짓.

이제 남은 문제는 그 입구를 막고 있는 <변종 노움>들뿐이었다.

팟!

입구에 도착한 진중은 <변종 노움>들을 향해 들고 있던 뿌리 세 개를 미련 없이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놈들의 머리 위로 재빠르게 제비를 넘어 용병들 쪽으로 가뿐히 착지했다.

실제 제비라고 해도 믿을 만큼 민첩하고도 유연한 동작.

‘생긴 것처럼 정말 도깨비 같은 움직임이로군.’

강우가 보기에 놈이 뛰어넘은 거리만 해도 20미터를 훌쩍 넘겼다.

‘곧 진짜 실력을 볼 수 있을지도.’

잡았다잡았다잡았다잡았다

쭈겨쭈겨쭈겨쭈겨쭈겨쭈겨

그사이, 몸을 돌린 <변종 노움>들이 용병들의 앞을 가로막고, 뒤로는 <정예 변종 노움>과 수백의 풀 병사들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 다가오는 수천의 석상 근위대도 보였다.

타이슨을 업고 있던 임가륜이 말했다.

“이젠 저 빌어먹을 노움들만 처리하면 끝이군요.”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진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 간단할 것 같진 않군.”

“어째서입니까?”

대답은 굳이 필요 없었다.

이쪽을 노려보는 <변종 노움>들의 표정이 변한다 싶던 찰나, 뒤편에서 벼락같은 고함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끼아아아아―!

“큭!”

엄청난 고성(高聲)에 이반이 귀를 틀어막으며 신음을 흘렸다.

마치 공간이 찢겨 나가는 듯한 비명.

그 부름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앞서 있던 <변종 노움> 쪽에서도 굉음이 들려왔다.

콰드드드드득!

“저게 뭐야!”

기겁한 투움바가 소리를 지르는 사이, 어느새 미궁의 천장으로 거대한 갈색 무언가가 치솟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건 식물이었다.

만드라고라.

처음 <정예 변종 노움>과 함께 마주한 그 초대형 만드라고라가 어느새 미궁의 입구에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씨앗은 바로 <변종 노움>들이었다.

바닥에 배를 드러낸 채 죽은 수십 마리의 <변종 노움>을 양분 삼아 자라난 만드라고라는 아까보다도 더욱 기괴한 모습이었다.

툭, 툭.

다 자라난 만드라고라가 울고 있었다.

아니, 그건 울음이 아니었다.

출산(出産)이었다.

자라난 만드라고라의 줄기와 잎사귀에서 크고 작은 <변종 노움>들이 열매처럼 하나둘씩 떨어지는 것이다.

조릭이 완전히 구겨진 얼굴로 중얼댔다.

“시불, 이건 또 뭔…….”

사각사각사각사각.

스걱스걱스걱스걱.

이어서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

그건 다시 태어난 <변종 노움>들이 자신의 손발톱을 스스로 갉아 먹는 소리였다.

놈들이 왜 제 손발톱을 배 속에 처넣는가 하는 이유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을 삼킨 놈들의 색이 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임가륜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떼었다.

“놈들의 피부색이 달라졌습니다.”

붉은색.

인간의 살색이던 놈들의 피부가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마치 분노를 대변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게다가 문제는 <변종 노움>뿐만이 아니었다.

푹!

“컥!”

갑작스럽게 신음을 흘린 이반을 모두가 이상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그 뒤로 선 남자가 보였다.

허리를 단검에 찔린 이반의 몸이 스르르 무너져 내리자, 조릭이 멍하니 살인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핸더슨……?”

그랬다.

이반을 죽인 자의 이름은 다름 아닌 핸더슨이었다.

훅, 훅.

어느새 손에 단검을 쥔 놈이 이따금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놈의 단검에서 이반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가운데, 어느새 그의 몸도 <변종 노움>처럼 붉어져 있었다.

“무, 무슨 짓이야!”

“너 미쳤어?!”

하지만 동료들의 부름에도 핸더슨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강우가 보기에 놈은 아까 궁전에서 걸린 <트라우마 최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분명했다.

어쩐지 계속 말이 없는 모습이 이상하다 싶던 참이었다.

‘그 상태로 계속 따라온 모양이로군.’

“정신 차려요, 핸더슨!”

임가륜도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이미 핸더슨은 눈마저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놈이 노려보는 대상은 단 하나.

강우였다.

휙!

콰과과과과!

“제기랄!”

핸더슨이 다짜고짜 마력을 퍼붓자, 당황한 용병들이 황급히 마력을 끌어 올려 방어했다.

하지만 상대는 강우가 오기 전까지 용병단의 서열 2위를 차지하던 자.

그 공격이 결코 가벼울 리 없었다.

“이 미친 새끼가!”

이마에 상처를 입은 조릭이 이를 갈고, 양팔로 임가륜을 보호한 투움바의 소매가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투움바의 희생이 무력하게도 어느새 임가륜의 등에서 내려온 타이슨의 시신은 걸레짝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방비로 공격을 받은 탓이었다.

위기의 순간에 타이슨을 버린 임가륜이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 누구도 임가륜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쭈겨쭈겨쭈겨쭈겨쭈겨쭈겨!

삼켜삼켜삼켜삼켜삼켜삼켜!

앞쪽에선 <변종 노움>이, 뒤쪽에선 <정예 변종 노움>을 비롯한 수천의 마물들이 파도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마력으로 주변을 감싼 투움바가 말했다.

“내가 또 미궁에 들어오면 사람이 아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뒤쪽의 파괴된 녹림 벽이 서서히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의 시간 벌이에 불과할 뿐.

붉은빛으로 각성한 <변종 노움>도, 벽에서 태어난 숲 병사도 하나같이 녹림의 벽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하고 있었다.

조릭과 투움바가 간신히 핸더슨을 막아 내는 사이, 진중이 말했다.

“답은 입구뿐이다.”

전면전을 펼쳐서는 희망이 없다.

그들이 마력을 퍼부으면 퍼부을수록 이 저주받은 미궁은 더 많은 적을 토해 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살아 나갈 방법은 단 하나.

이 모든 시련을 뒤로한 채 미궁 밖으로 달아나는 것뿐.

하지만 그마저도 상당히 희박한 확률처럼 보였다.

콰과과과과!

그때, 상황 판단을 마친 강우가 <변종 노움> 쪽으로 마력을 퍼부었다.

곧 길게 난 노움의 시체 길을 보며 그가 말했다.

“만드라고라를 친다.”

“뭐?”

“최소한 저 만드라고라를 처리하지 않고는 이곳에서 나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입구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조릭의 질문에 이어 진중이 연달아 물었다.

“저 입구가 가짜라고 생각하는 건가?”

“어쩌면. 우린 최면에 걸리지 않았지만, 골렘이나 궁전을 미리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우리의 기감보다 이 미궁의 최면과 환술이 더 뛰어나다는 뜻이겠지.”

진중이 듣기에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확실히 저 입구가 정말 가짜라면… 좋지는 않겠군.”

임가륜이 짐짓 짜증 섞인 말투로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뭘 해야 한다는 겁니까?!”

“나는 저 만드라고라를 부수러 가겠다. 너희는 저 정예 노움을 상대해라.”

“주변에 이 좀비 같은 새끼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건 어떡하고?!”

“그런 건 알아서 해라.”

“뭐? 야?! 야! 자기야!”

조릭이 애타게 강우를 불러 세웠으나, 그는 할 말만 한 뒤 초대형 만드라고라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건방진 인간! 쭈겨!

시야가 시시각각 변했다.

앞을 막는 <변종 노움>이 많았으나, 강우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콰득!

강우는 제일 먼저 달려드는 두 마리의 이마를 쪼갠 뒤, 이어서 양옆으로 도약해 오는 다섯 마리의 숨통을 끊어 버렸다.

곧 그마저도 귀찮아지자, 강우는 마력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츠츠츠츠츳!

카아아아아악!

아, 아파! 아파!

검은 마력이 강우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가까이 다가오던 <변종 노움>들은 강우의 농도 짙은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피부가 갈가리 찢겨 나갔다.

그사이, 마침내 초대형 만드라고라가 강우의 눈앞에 그 위용을 드러냈다.

그, 그그그그!

그것은 지금도 계속해서 그 영역을 넓혀 가는 중이었다.

천장으로, 허공으로, 바닥으로.

가지와 줄기와 뿌리가 거머리처럼 <변종 노움>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연신 자라나고 있었다.

강우는 그 기이한 식물을 향해 지체 없이 <피바라기>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쐐기였다.

순식간에 제 모습을 갖춘 수십 개의 검은 송곳이 일제히 만드라고라를 향해 쇄도하자, 곧 몸뚱아리에 말뚝처럼 박혔다.

푹! 푹! 푹!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끼아아아아아!

상처 입은 만드라고라가 크게 울부짖은 것이다.

마치 인간의 것과 흡사한 그 비명은 아까 <정예 변종 노움>이 낸 굉음과는 비교도 안 될 만치 엄청났다.

돌바닥이 흔들리고, 수풀이 몸을 떨었으며, 소리를 견디지 못한 몇몇 <변종 노움>들이 벌러덩 자빠져 몸을 떨었다.

쿠구구구궁!

또한 석상의 절반이 그대로 깨져 나가고, 수풀 병사들의 몸이 무너졌다.

마치 만드라고라의 비명에 미궁 전체가 뒤집히는 듯했다.

“시불, 이건 악몽이야!”

그 비명은 3차 각성자의 정신마저 흔들 지경.

멀쩡한 건 강우와 진중, 그리고 <정예 변종 노움>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모두 귀나 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때, 간신히 정신을 유지하던 투움바가 외쳤다.

“놈이 간다!”

강우가 뒤돌아보자, <변종 노움>들이 주춤한 틈을 타 이곳으로 달려오는 핸더슨이 보였다.

놈의 뒤로 아까 <마력 골렘> 사냥 때 본 마력의 오로라가 넘실대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기술.

눈앞에서 빛이 일렁이나 싶더니, 곧 강우의 발밑으로 마력의 줄기가 내리쳐졌다.

콰과과광!

가까이서 보니, 그건 번개보다는 마력 기둥에 가까웠다.

바닥을 내리친 마력의 줄기가 몇몇 노움의 몸을 부수고, 남은 마력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시체들을 밟고 도약한 핸더슨이 강우를 노려보며 크게 외쳤다.

“한강우!”

어느새 붉어진 놈의 얼굴은 점차 <노움>으로 변해 가는 중이었다.

그 지독한 악의를 마주한 강우는 나직이 숨을 고르며 <피바라기>를 옆구리 옆으로 가져다 댔다.

마치 발검을 앞둔 기사의 자세와도 같았다.

그리고 핸더슨이 막 달려드는 그 찰나의 순간.

슥!

단 한 번의 휘두름이 있었다.

옆구리를 벗어난 <피바라기>가 사선으로 그어지고.

푸우우!

목에서 시뻘건 피 분수가 치솟는 것을 끝으로 핸더슨의 몸이 허무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작 한 번.

두 사람의 서열 다툼을 끝내기엔 전혀 부족함 없는 일격이었다.

검은 헌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