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헌터-61화 (62/186)

[61화] 조우 (3)

홍련(紅蓮).

붉은 연꽃.

눈앞의 여인은 자신을 연꽃이라 칭했다.

곧 두 개의 붉은 꽃잎이 열렸다.

[받아라.]

여인이 양팔을 벌리자, 그 품속에서 붉은빛이 도는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스르르르.

그건 다름 아닌, 봉오리가 미처 피지 않은 연꽃이었다.

연꽃은 어둠을 타고 강우에게로 천천히 날아들었다.

마력으로 빚은 것으로 보이는 그 꽃에는 적의가 담겨 있지 않았다.

간간이 붉은 속살이 드러난 연꽃 봉오리.

그 안에 중요한 무언가를 숨겨 두기라도 한 듯, 큼지막한 이파리와 꽃잎이 주위를 꽁꽁 싸매고 있었다.

강우가 지척에서 멈춰 선 연꽃 봉오리를 보며 물었다.

“이게 무엇이지?”

[남은 욕심이라고 해야 할까……. 안타깝구나. 간신히 맺어진 인연임에도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눌 수 없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뿐이었다.

대뜸 나타난 것으로도 모자라 아리송한 선문답이라니.

홍련은 꼭 누군가가 둘의 만남을 주선한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물론, 이 또한 엄청난 기적. 이보다 더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

강우가 더 묻기 전에 홍련이 말했다.

[살아라. 살아서 그것을 꽃피워 보아라. 넌 분명 그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내게 이런 걸 주는 거지?”

[너는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무슨 근거로?”

잠시 침묵하던 홍련이 말했다.

[너도 한때지만 누군가와 애절한 사랑을 나눈 적이 있으니까. 너도 한때지만 아비였던 적이 있으니까 말이다.]

“…….”

홍련은 단순히 혜진이의 모습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과거까지도 알고 있었다.

혹시 <최면>을 통해 기억도 읽을 수 있는 건가?

회귀한 사실까지도?

하지만 그 모든 걸 물어볼 새도 없이 홍련은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어둠 속으로 점차 사라져 갔다.

[곧 모든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홍련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렇게 모습을 감췄다.

남은 건 주위의 어둠뿐.

그 어디에서도 그녀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강우?”

그리고 강우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어느새 자신은 아까의 그 장소로 돌아와 있었다.

“괜찮나?”

자신을 부르고 있던 건 바로 진중이었다.

놈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조금 전까지의 모든 일이 꿈같이 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놈에게 그 이야기를 할 순 없는 노릇.

강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

진중도 더 묻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전패의 전적… 더 이상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난 물에 못 들어… 무서…….”

주변은 소란스러웠다.

역시나 강우가 알던 대로 트라우마를 이용한 <최면>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타릭―!”

조릭은 괴성을 지르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짖었고, 타이슨은 허공에 주먹질을, 이반은 바닥에 엎드려 허우적대고 있었다.

나머지도 상황은 비슷했는데, 핸더슨만은 이상하게도 검을 쥔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유일하게 멀쩡한 건 잡견, 임가륜뿐.

트라우마 공격 같다는 진중의 의견에 놈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제 트라우마는 잡견이라는 이명을 받은 것뿐이었나 봅니다. 별로 타격도 없었군요. 너무 속 편히 살았나요?”

트라우마 소란은 강우와 진중, 임가륜이 용병들을 흔들어 깨움으로써 모두 끝이 났다.

남은 사람은 이제 핸더슨뿐.

그러나 놈은 도무지 최면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놈을 지켜보던 진중이 강우에게 말했다.

“잠시 물러나 있는 게 좋겠군. 놈의 트라우마가 너에게 닿아 있을 수도 있으니.”

“…….”

강우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기에 놈의 말대로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핸더슨이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약 2~3분 뒤였다.

“…미안하군.”

그가 <최면>에서 무엇을 봤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으나, 대충 짐작은 갔다.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사이, 임가륜이 말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졌네요. 하지만 우리가 보스를 잡았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린 보물 창고를 털 계획 아니었습니까?”

“아, 맞지.”

아까부터 약간 침울해하던 조릭도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어서 이 빌어먹을 궁전을 털어먹자고! 입구에 이런 함정을 숨겨 두었으니, 분명 엄청난 보물이 있을 거야!”

하지만 곧 벌어질 사태를 떠올린 강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돌아가지.”

“뭐? 왜?!”

조릭이 항의하듯 소리쳤지만, 강우는 단호했다.

“내 말을 따르기로 하지 않았던가? 피곤해졌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칫.”

다행히 조릭은 더 반대하지 않았고, 나머지 용병들도 섣불리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심지어 핸더슨까지도.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임가륜이 중얼거렸다.

“어디서 자작나무 탄내가 나지 않습니까?”

“…….”

그의 말대로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탄내가 나기 시작했다.

냄새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열린 궁전.

‘시작인가.’

이미 예견한 상황에 강우는 담담했으나, 진중은 그답지 않게 소리를 질렀다.

“모두 달려라!”

쿵! 쿵!

끼아아악!

소름 끼치는 비명과 함께 궁전 안에서 경쾌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야?!”

곧 사태를 깨달은 용병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본 조릭이 경악한 얼굴로 외쳤다.

“시불! 저게 왜 저기서 나와!”

궁전에서 쏟아져 나오는 건 다름 아닌 <변종 노움>이었다.

머리가 깡마른 몸의 두 배는 돼 보이는 가분수의 마물들.

크고 작은 <변종 노움>들이 아가리를 쩍 벌린 채 하얀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당장에라도 인간의 고기가 씹고 싶은 모양이었다.

“뭐가 저렇게 많아?!”

한눈에 봐도 <변종 노움>은 100마리가 넘었다.

아니, 그렇게 말하는 이 순간에도 수십의 <노움>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앞장선 진중이 용병들을 이끄는 가운데, 그 방향을 살피던 핸더슨이 외쳤다.

“다리는 그쪽이 아니다!”

“다리는 안 돼!”

진중이 버럭 소리쳤다.

“저 정도 숫자라면 다리가 무너질 수도 있다! 만약 앞에서라도 놈들이 나타나면 앞뒤가 막혀!”

“제기랄!”

“어쩐지 운이 좋다 싶었습니다!”

사방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용병들이 혼비백산 달리는 사이, 뒤쪽에선 누더기를 걸친 <변종 노움>의 비명 같은 포효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통! 통!

끼아아아!

인간! 쭈겨!

맛있는 꼬기!

“아니, 자기야! 저것들, 사람 말도 하잖아?!”

“입 놀릴 시간 있으면 달리십시오!”

가볍게 튀어 오르는 발소리와 놈들의 새된 목소리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정원을 벗어난 용병들이 막 미로로 들어섰을 무렵.

새로운 공간과 함께 그곳을 채운 석상들이 보였다.

모두 무기를 든 아홉 개의 석상.

척!

이쪽을 발견한 놈들이 일제히 각자의 무기를 겨누었다.

이번엔 병사를 소환하는 것이 아닌,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모양이었다.

미간을 좁힌 진중이 말했다.

“우리가 무시하고 넘어온 관문이다.”

“젠장!”

“계속 가! 이런 놈들 따위!”

콰직!

그러자 타이슨이 냅다 도끼로 근위병 석상의 머리통을 부쉈다.

문제는 놈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진 순간부터였다.

부서진 머리가 곧장 몸집을 키우더니, 또 다른 근위병으로 태어났다.

석상 하나가 둘이 되어 다시 태어난 것이다.

“…시발!”

콰직!

타이슨이 욕지거리를 뱉는 것과 동시에 두 개의 할버드가 쏜살같이 떨어져 내렸다.

간신히 피한 놈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끼아아아!

그사이, <변종 노움>들의 비명이 바로 뒤쪽에서 들려왔다.

조릭이 비명을 지르듯 욕을 뱉었다.

“니미! 다 죽는다!”

“저, 저깁니다!”

그때, 기지를 발휘한 건 바로 임가륜이었다.

석상들 사이를 날렵하게 빠져나간 놈이 정원 바닥에 숨겨져 있던 열쇠 꾸러미를 주워 들었다.

<마력 골렘> 때도 그렇고, 놈은 발재간 하나는 발군이었다.

“나이스, 잡견! 냄새 하난 잘 맡는다니까!”

모두는 느릿느릿 다가오는 석상들을 뿌리치며 부랴부랴 입구라 추정되는 곳으로 달려갔다.

“부수면 안 돼! 막기만 해!”

몇몇 용병들이 석상을 막아서는 사이, 열쇠 꾸러미를 든 임가륜이 서둘러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열쇠의 개수는 모두 20개.

그중에서 맞는 열쇠를 찾아야 했다.

“아, 아직 멀었냐?!”

“서둘러!”

끼에에엑!

쭈겨! 인간! 쭈겨!

꼬기! 꼬기! 맛있는 꼬기!

“시발!”

설상가상, 반대편 입구로 <변종 노움>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서로 먼저 들어오려는 노움들이 통로에 몸이 끼어 낑낑댔다.

강우도 이미 석상과의 전투에 참가한 상태였다.

“빨리해!”

“안 되면 마력으로 부숴 버려!”

“그러다 풀떼기들 더 튀어나오면?!”

“차라리 풀떼기한테 죽는 게 낫지, 저 징그러운 괴물 새끼들 먹이가 되긴 싫어!”

“기, 기다리십시오! 지금 하고 있습니다!”

허겁지겁 열쇠를 끼우는 임가륜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오, 온다!”

꼬기! 꼬기! 인간 꼬기!

끼아아아아!

“미친! 이거 완전 호러잖아!”

“무, 무서워!”

들어선 <변종 노움>들이 통통 튀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콰직!

요란한 피 분수와 함께, 한 근위병의 할버드가 <변종 노움> 하나의 이마를 둘로 쪼개는 모습이 용병들의 눈에 들어왔다.

“뭐, 뭐냐?! 왜 지들끼리 싸워?”

하지만 공격을 가한 건 한 놈뿐만이 나이었다.

석상 근위대 전부가 가까이 다가온 <변종 노움>들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마도 둘은 같은 편이 아닌 듯했다.

얼떨결에 동족 둘을 잃은 <변종 노움>들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건방진… 돌! 쭈겨!

돌! 돌! 맛없다!

돌! 부숴!

콰득! 콰득!

<변종 노움>의 무자비한 손길에 석상들이 허무하게 부서지고, 부서진 석상의 파편은 또 다른 석상 병사가 되어 태어났다.

삽시간에 늘어난 병사가 수십.

공터 안은 순식간에 불어난 석상들로 가득했다.

“마, 망할!”

“빨리 해!”

덜컥!

그 순간,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열네 번째 열쇠를 끼운 임가륜이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돼, 됐습니다!”

“빨리 열어!”

“이야아아아!”

드르르르륵!

문을 붙잡은 용병들이 힘을 주자, 굳게 닫혀 있던 수풀 문이 옆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미닫이 형식의 문.

그토록 고대하던 탈출이었다.

그런데 막 문이 열린 그 순간.

출구에 가장 가까이 있던 이산이 멈칫했다.

“…제기랄.”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두 개의 눈.

미역 줄기 같은 머리카락.

지저분한 이빨 사이로 줄줄 흐르는 타액과 만드라고라 뿌리 즙.

뱃살을 축 늘어뜨린 500킬로그램급 거구의 마물이 눈앞의 인간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첫 번째 관문에서 본 그 <변종 노움>이었다.

“…….”

하나같이 경직된 용병들이 마른침을 삼키는 사이.

만드라고라 뿌리를 질겅질겅 씹던 <변종 노움>이 고개를 갸웃댔다.

놈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오므렸다 펴기를 반복했는데, 그때마다 턱 아래로 무언가가 질질 흘러내렸다.

곧 새소리 같은 앳된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어눌한 발음이지만, 그 단어만은 명백하게 들렸다.

“…까꿍?”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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