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헌터-58화 (59/186)

[58화] 녹림의 벽 (5)

“…….”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변종 노움>이 낯선 마물이기도 하거니와, 열심히 식사 중인 놈의 모습이 어딘가 께름칙했기 때문이다.

조릭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저거… 사람은 안 먹겠지?”

하지만 놈의 바람과 달리 진중의 대답은 비관적이었다.

“모르지. 오랜 채식 생활에 지쳐 인간 고기가 먹고 싶어졌을지.”

“…저건 꼭 말을 해도.”

진중의 말 탓인지 침묵은 한동안 계속됐다.

결국 앞으로 나선 건 강우였다.

“내가 가지.”

“뭐?”

그러자 핸더슨이 미간을 꿈틀댔지만, 스스로 나서지는 않았다.

아무리 심기가 불편하다 해도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침착하자.’

핸더슨은 애써 끓어오르는 승부욕을 억제했다.

생각해 보면, 강우가 나타난 뒤부터 자신은 페이스를 잃어버린 듯했다.

아마도 자부심 때문이리라.

석철 용병단의 2인자라는 자부심.

어쩌면 자신은 그것에 너무 오랫동안 취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갑자기 나타난 새 단원에게 휘둘리고 있는 건지도.

‘다시 올라가면 된다.’

핸더슨은 비로소 이성을 되찾았다.

지금은 강우를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혹시 아는가.

놈이 저 괴물을 상대하게 될지.

그렇게 되면 강우의 실력을 파악함은 물론, 운이 좋다면 괴물에게 놈이 죽을 수도 있다.

자신에겐 어느 쪽이든 나쁠 게 없는 상황.

‘괜한 자존심에 좋은 기회를 놓칠 필요는 없다.’

핸더슨이 스스로를 다독이는 사이, 강우가 물었다.

“할 말 없으면 출발하겠다.”

“…그래.”

담담하다 못해 메마른 시선이 핸더슨의 자존심을 한 차례 더 건드렸으나, 그는 애써 그것을 견뎌 냈다.

터벅터벅.

곧 강우가 <변종 노움>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겉보기엔 그가 아무런 방비도 없이 걸어가는 듯했으나, 3차 각성자인 강우가 아무 대비도 없이 행동할 리는 없었다.

꿀꺽.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강우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와 <변종 노움>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용병들은 마른침을 삼키고, 주먹을 쥐었다 폈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놈까지 남은 거리는 불과 열 걸음 남짓.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힐끔.

<변종 노움>이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식사에 집중하던 놈이 강우 쪽으로 눈동자를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뿐.

놈은 여전히 손으로 만드라고라의 뿌리를 쥔 채 게걸스러운 식사를 계속했다.

‘이 모습을 뭐라고 해야 좋을까…….’

가까이서 본 놈의 모습은 흉측했다.

꼭 ‘왕눈이 고블린’ 같다고 해야 할까.

듬성듬성 두피가 훤히 드러난 긴 머리카락 아래, 얼굴을 절반 가까이 차지할 정도로 커다란 눈이 자리했다.

코는 당근처럼 길고, 입은 귀에 닿을 듯 길게 찢어져 있었다.

꼭 호러 영화 속 괴물 같은 모습.

한때 유행하던 방 탈출 게임 속 괴물 같기도 했다.

강우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눈앞에 놓인 길이 30센티짜리 구리 열쇠를 향해.

“…….”

진중을 제외한 석철 용병단 모두가 숨죽여 그 모습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강우가 발밑에 다다를 때까지도 <변종 노움>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식사가 끊기는 게 극도로 싫은 것처럼.

“아……!”

비로소 강우의 손에 열쇠가 닿자 용병들이 탄성을 흘렸다.

꼭 복권의 마지막 번호를 확인한 듯한 반응이었다.

조릭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빠, 빨리 와!”

하지만 조릭의 바람과 달리, 강우는 바로 용병들 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잠시 노움 쪽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바닥에 있던 만드라고라 뿌리 조각 하나를 주워 들었다.

그럼에도 <변종 노움>의 반응이 없자, 연달아 두 개의 뿌리 파편을 더 들었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오라니까!”

용병들이 그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봤지만, 강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뿌리 조각을 계속 주워 들었다.

이윽고 옆구리에 낀 뿌리가 한 다발이 된 뒤에야 그가 용병들 쪽으로 돌아왔다.

“자기, 진짜 간댕이가 부었구나?”

조릭이 혀를 차는 사이, 임가륜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건 왜 챙긴 겁니까? 가지고 나가려고요?”

대답은 간단했다.

“저런 괴물이 또 나타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제야 임가륜이 감탄한 듯 입을 벌렸다.

“과연 그렇군요. 그땐 이게 미끼기 되어 줄지도 모르겠네요.”

강우는 뿌리 세 개만 챙긴 뒤, 나머지는 모두 임가륜에게 건넸다.

그가 또다시 의아하게 물었다.

“근데 이걸 어째서 저에게……?”

“이 중에서 이걸 들 만한 건 너밖에 없는 것 같은데.”

“아아…….”

임가륜은 용병단에서 서열 꼴찌였다.

포터를 맡아야 한다면, 그건 분명한 자신의 몫.

곧 제 역할을 깨달은 임가륜이 황급히 만드라고라의 뿌리를 안아 들자, 용병 몇몇이 부랴부랴 다가가 하나씩 달라고 성화를 부렸다.

강우는 그런 놈들을 뒤로한 채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줄곧 출구 앞에 서 있던 진중이 물었다.

“노움이 공격하지 않는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그랬다면 네가 말렸겠지. 넌 마력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

진중은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근거는 단순했다.

강우가 자신을 믿을 리 없으니까.

‘자신도 마력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는 뜻인가.’

속으로 강우의 실력을 짐작한 진중이 다시 물었다.

“마력흔을 봤나?”

강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줄이었지?”

“네 줄이더군.”

“……!”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강우의 대답에 진중은 이번에도 작은 충격을 받았다.

<마력흔>이 네 줄이라니…….

그건 적이 최소 상급 마물이라는 뜻.

‘그런 걸 코앞에 두고도 그렇게 담담했단 말이지.’

진중의 예상보다도 강우는 더 대담한 인간인 듯했다.

“어이, 서두르지!”

만드라고라의 뿌리를 배분하는 잠깐의 소란을 끝으로, 용병들은 공터를 벗어났다.

그들의 뒤를 쫓는 건 남겨진 어둠과 <변종 노움>의 시선뿐이었다.

* * *

“지금부턴 달라질 거다.”

진중이 말했다.

“관문 하나를 지났으니, 환경도 달라지겠지.”

“관문이 모두 몇이지?”

핸더슨의 질문에 진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까진 모른다. 하나일 수도, 수십 개일 수도 있지. 균열은 일정하지 않아.”

이후로는 또다시 지루한 행군의 반복이었다.

그들은 이 침묵의 정원을 계속해서 걸었다.

풀은 아까보다 더 무성하고, 어둠과 정적은 아까보다 더 짙었으나, 이미 두 번이나 미궁의 신비를 마주한 탓인지 행군 속도는 오히려 더 빨라졌다.

진중은 계속해서 앞서 걷는 중이었다.

그는 누군가가 묻기 전엔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20분쯤 걸었을 무렵.

드르륵―!

“뭐, 뭐야?!”

“벽이 움직인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진동과 함께 <미궁>의 미로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풀 병사가 나왔을 때처럼 벽이 꿈틀대더니, 이내 무언가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그들의 오른쪽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갈라지며 새 길을 내놓았다.

진중이 말했다.

“모두 움직이지 마라.”

구구구구―

마치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광경.

한동안 계속되던 미궁의 재구성은 약 3분이 더 흐른 뒤에야 멈췄다.

조심스럽게 멈춰 선 벽을 살피던 조릭이 물었다.

“갑자기 왜 이런 거야?”

“아무래도 보스가 깨어난 모양이다. 더 서둘러야겠다.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군.”

진중은 잠시 주변을 훑어보더니, 곧 새로 난 길로 그들을 이끌었다.

공기 중에 흘러온 보스의 마력을 읽는 건가?

시야를 알 수 없으니, 맞는 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단은 믿어 보는 수밖에.’

강우는 과거 석철에게 들은 <녹색 미궁>의 이야기를 계속 상기하며 진중을 따라 걸었다.

‘두 번째 관문은…….’

“공터다!”

예상대로 곧 두 번째 관문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드넓은 정원이었다.

잘 가꿔진 정원 안에 들어선 조각상들.

모두 다섯 개인 석상이 각각의 단상 위에 올라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수상한 냄새를 풀풀 풍겼다.

조릭이 웃으며 말했다.

“빤하네. 저거, 움직이겠네.”

드르르륵.

아니나 다를까, 다섯 석상 중 가장 앞에 있던 석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다란 창을 든, 근위병의 외양을 한 석상이었다.

쿵!

자세를 잡은 근위병 석상이 창을 바닥에 내려치자, 주변에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마력이라기보다는 아까 느낀 마기에 더 가까웠다.

투움바가 투덜댔다.

“또 풀떼기들이냐?”

“이곳 보스의 상상력이 아쉽구만.”

어느새 정원 곳곳에서 풀 병사들이 일어서고 있었다.

모두 서른에 가까운 병사들.

각자의 무기를 든 병사들이 용병들을 향해 살기를 내비쳤다.

“근데 저건 또 뭐냐?”

아까와 비슷한 상황이지만, 한 가지 다른 점도 있었다.

바로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낸 다섯의 풀 병사.

놈들의 손에 들린 건…….

슉!

“제기랄!”

곧 날아든 화살이 조릭의 머리 위를 스쳤다.

가까스로 고개 숙여 피한 놈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니미럴! 이번엔 활이냐!”

놈들이 든 건 쇠뇌였다.

무기를 든 풀 병사들이 느릿느릿 다가오는 가운데, 다섯 궁수의 화살이 쉴 틈 없이 날아들었다.

슉! 슉!

마력을 끌어 올려 화살을 쳐 낸 임가륜이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이거 완전 똥개 훈련이네요. 뭐, 이런 수련도 나쁘진 않을지도.”

“완전 변태 새끼네, 이거.”

곧 전투가 벌어졌다.

이번에도 멀찍이 떨어진 진중이 전투를 지켜보는 가운데, 투움바와 타이슨, 조릭이 전방에 있던 풀 병사를 냅다 베어 버렸다.

핸더슨이 외쳤다.

“쇠뇌 든 놈들부터 빨리 처리해!”

역시나 수많은 <균열>을 경험한 용병단답게 그들은 역할 분담이 확실했다.

엄호를 맡은 핸더슨과 이산이 날아드는 화살을 견제하고, 행동이 재빠른 임가륜과 이반이 서둘러 쇠뇌병 쪽으로 달려 나갔다.

다만, 강우는 화살을 피하며 석상 쪽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그는 과거 석철이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군.’

놈이 떠들어 댄 이야기의 신빙성을 확인할 좋은 기회였다.

강우는 그 즉시 용병들의 곁을 떠나 근위병 석상 쪽으로 달려 나갔다.

“적은 그쪽이 아니다!”

“정신 나간 놈! 엄호 밖으로 나가면 어떡하냐?!”

당황한 투움바와 이산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계속했다.

콰과과과!

곧 마력이 맺힌 <피바라기>가 석상을 때리자, 작은 폭발과 함께 석상이 무너져 내렸다.

깨진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가운데, 변화가 일어났다.

“놈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죽었어!”

한창 전투를 벌이던 풀 병사들이 그대로 말라비틀어지더니, 소멸해 버린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열심히 단검을 휘두르던 조릭도 허탈하게 웃었다.

“니미, 저런 쉬운 방법이 있었네.”

그다음도 마찬가지였다.

소환된 풀 병사들은 석상을 부수는 족족 힘을 잃고 소멸해 버렸다.

덕분에 두 번째 관문은 처음보다도 더 쉽게 처리됐다.

“헉, 헉… 탁기 때문에 숨이 좀 찬 걸 빼면, 충분히 할 만한데?”

“이거, 막상 와 보니까 미궁도 별거 없네. 오히려 개꿀이야.”

팔자 좋은 용병들의 대화에 진중은 속으로 쓰게 웃었지만, 굳이 표 내진 않았다.

<미궁>의 진짜 무서움은 보스를 처치하고 난 뒤니까.

대신 그는 강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연달아 석상 다섯 개를 부숴 버린 그는 묵묵히 <피바라기>를 점검하는 중이었다.

별일 없었다는 듯이.

‘…여러모로 쓸 만한 놈이 들어왔군.’

그제야 진중은 석철의 파격적인 인사가 이해되는 듯했다.

‘석철, 목 위로는 비어 있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안목이 있었나?’

드드드드―!

“또 움직인다!”

그 순간, 벽이 두 번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놀란 용병들이 웅성댔으나, 진중은 흥미로운 듯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재구성된 벽이 멀찍이 물러서고 있었다.

겹겹이 밀려난 벽들 너머로 드러난 건 단 하나의 다리.

한없이 펼쳐진 어둠의 강 위로 돌로 이루어진 다리가 길게 뻗어 있었다.

수풀 벽이 움직임이 멈추자, 핸더슨이 진중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 다리는 뭐지?”

그간 일곱 번의 <미궁>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런 경우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곧 진중의 입이 열렸다.

“지름길이다.”

“지름길?”

“그래. 보스가 더 이상의 관문은 필요 없다고 여긴 모양이군.”

“…….”

핸더슨은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입 밖에 내놓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대신 눈치 없는 조릭과 임가륜만 떠들어 댔다.

“꽤 똘똘한 보스네.”

“이게 다 강우 공 때문인가 보군요.”

하지만 강우는 별 반응 없이 다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끝이 보이지 않는 다리 건너에 보스가 있다.

<녹색 미궁>의 보스를 아는 그로서는 그리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때, 진중이 가장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놈의 생각이 바뀌기 전에 가는 게 좋을 거다.”

“…….”

곧 모두가 다리 위로 올라섰다.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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