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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헌터-57화 (58/186)

[57화] 녹림의 벽 (4)

콰득!

강우가 재빨리 물러서는 사이, 풀로 만들어진 병사의 할버드가 바닥을 내리찍었다.

바닥이 형편없이 부서지며 돌 조각이 튀었다.

돌을 부수는 풀이라니.

이 무슨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싶으면서도 도끼에 걸린 마기(魔氣)를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나마 다행인 건, 놈들의 움직임이 둔하다는 점이었다.

일반인도 오랜 세월 수련을 쌓았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수준.

곧 상대의 빈틈을 잡은 강우가 재빠르게 <피바라기>를 휘둘렀다.

슥! 슥!

강우의 마력이 닿자, 풀로 이루어진 병사의 살이 녹아내리며 탄내를 풍겼다.

하지만 단지 그뿐.

병사의 몸은 칼에 찢기고, 녹아도 계속해서 재생됐다.

속에서 식물 줄기가 솟아나 그 상처를 메운 것이다.

마치 끊임없이 돋는 새살 같았다.

검을 든 풀 병사를 상대하던 조릭도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이거 언데드보다 더 하잖아! 더 성가셔! 기막혀! 코 막혀!”

당장에라도 마력을 퍼붓고 싶은 욕구가 굴뚝같지만, 이미 앞선 경험으로 벽을 훼손해선 안 된다는 걸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미궁을 이룬 돌길의 폭은 약 2.5미터.

마력을 마음껏 방출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공간이었다.

서걱!

그 순간, 탐색전을 마친 강우가 처음으로 상대의 머리를 잘라 냈다.

그러고는 연달아 <피바라기>를 휘둘러 살을 온통 헤집어 놓았다.

강우의 주변으로 잔망스러운 풀 바람이 일었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는 비틀대는 풀 병사가 있었다.

끊임없이 흩날리는 풀떼기는 병사의 살이고, 피였다.

강우는 비틀대는 상대를 그야말로 ‘갈가리’ 찢어발겼다.

곧 찢겨 나간 넝쿨과 줄기들이 떨어지자…….

파스슥.

바닥에 닿은 풀 병사의 머리와 팔이 그대로 말라비틀어졌다.

꼭 햇볕에 며칠 동안 방치된 고사리 같은 모습이었다.

거의 동시에 같은 결론을 도출해 낸 핸더슨이 외쳤다.

“이놈들 신체가 어느 정도 훼손되면 자동 소멸한다! 찢어발겨라!”

“오호라?!”

처음에는 다소 당황하는 듯 보였으나, 공략법을 찾아내자 석철 용병단은 침착하게 적들을 쓰러뜨려 나갔다.

하나씩, 하나씩.

곧 모든 풀 병사들이 말라비틀어진 고사리 신세가 되었다.

무릎을 부여잡은 조릭이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헉, 헉… 시작부터 피똥 싸네.”

지쳐 보이기는 다른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풀 병사들의 탁한 마기(魔氣) 때문인지, 주변 공기가 그들의 체력을 좀먹고 있었다.

들이마신 탁기를 정화하기 위해 몸이 계속해서 마력을 운용한 탓이었다.

그런데 그때, 뒤쪽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광은 모두 끝난 듯하군.”

진중이었다.

전투 내내 합류하지 않고 구경만 한 놈은 이번 사태에서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한 얼굴이었다.

핸더슨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관광? 네놈, 아까부터 말투가 계속 마음에 안 드는데…….”

“출발한다.”

하지만 이미 진중은 어둠 속을 앞서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 건방진 태도에 핸더슨이 이를 갈았지만, 이번 전투는 자신의 괜한 실험으로 겪은 일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석철이 이 미궁을 클리어하기 위해 보낸 길잡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놈이 꼭 필요한 존재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곧 입을 다문 핸더슨이 묵묵히 그 뒤를 따르기 시작하자, 다른 용병들도 서서히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강우도 막 발을 내디디려던 찰나.

마지막까지 뒤에 남아 있던 조릭 바타르가 갑자기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뭐지?”

강우가 무슨 일이냐는 듯 바라보자, 놈이 어딘가 쑥스럽고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 고맙다.”

“…….”

수풀에 목이 붙잡혔을 때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놈을 도운 건 딱히 호의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이 미궁을 제대로 파악할 때까지 미끼를 남겨 둘 생각에서였는데…….

‘굳이 이런 속내를 드러낼 필요는 없겠지.’

강우는 대충 둘러댔다.

“그냥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조릭 바타르에게는 다르게 들린 모양이다.

강우의 대답에 놈의 동공이 눈에 띄게 요동치더니, 앞서가는 핸더슨 쪽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자기, 생각보다 괜찮은 놈이었구나? 딴 놈들이었으면 엄청나게 생색을 냈을 텐데……. 사실 자기가 첫 만남부터 다짜고짜 팔을 꺾어서 조금 앙금이 남았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갑자기 조금 달라 보여.”

…자신은 첫 만남부터 배에 칼을 들이밀지 않았던가.

놈은 제 잘못은 곧잘 잊는 타입인 듯했다.

“전원, 전력을 다해라.”

대뜸 아까 뱉은 강우의 말투를 따라 한 놈이 말을 이었다.

“좀 터프하다고 해야 할까? 처음에도 느꼈지만, 큰 키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상당히 무게감 있어.”

“…….”

갑작스러운 치근거림에 강우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릴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놈은 굳이 걸음 속도를 맞추며 작게 속삭였다.

“같이 가! 자기야!”

아무래도 이번 <균열>도 좀 피곤해질 것만 같았다.

* * *

녹림의 미로를 걷는 길.

다른 용병들과 거리가 벌어진 가운데, 진중과 발걸음을 맞춘 강우가 물었다.

“미궁은 들어가는 것보다 나가는 길이 어렵다 들었다. 그걸 무슨 수로 찾겠다는 거지?”

“…….”

하지만 진중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걷기만 했다.

놈이 입을 연 건 그로부터 약 1분 정도 지난 뒤였다.

“나에게는 공기의 흐름을 읽는 능력이 있다.”

“공기의… 흐름을?”

“그래. 일종의 실 같은 개념이지. 공기는 바람을 따라 흐른다. 또 차가운 공기는 아래로 흐르고, 뜨거운 공기는 위로 치솟으며, 막히면 부유한다. 입구가 좁으면 빠르게 빠져나가며, 마시는 존재가 많으면 희박해지지. 내 눈에는 그 모든 게 하얀 실처럼 보인다.”

잠시 그 시야를 상상해 보았으나, 잘 떠오르진 않았다.

공기가 실처럼 보인다라…….

모르긴 해도 세상이 무척이나 복잡하게 보일 것 같았다.

“피곤하겠군.”

“뭐, 이젠 익숙하지.”

강우의 말에 진중은 어깨를 으쓱였다.

핸더슨이나 다른 용병들을 대할 때와 달리, 놈은 강우를 나름 친절하게 대했다.

이번에는 놈이 물었다.

“이번에 사신이라는 이명을 받았다 들었다.”

“…뭐, 어쩌다 보니.”

“썩 어울리는 이름이다. 오늘의 상황과도, 네 눈빛과도.”

“…….”

“품은 뜻이 많군.”

“그런 것도 보이나?”

“조금은. 꼭 공기만이 흐름을 가진 건 아니지. 마력도 흐름이 있고, 기분과 분위기가 있으며, 형상이 있다. 현재 네 마력은… 흑표범이로군. 수풀에 몸을 잔뜩 숨긴.”

흑표범.

그게 진중이 바라보는 강우였다.

놈도 강우처럼 마력으로 상대를 식별하는 능력을 가진 모양이다.

4차 각성을 이룬 게 아니라면, 그만큼 감각이 남다르다는 뜻.

“한 가지 더. 대개 인간이 실타래라면, 넌 실 뭉치다. 그 눈에 무얼 감추고 있지? 남모를 고민? 아니면 야명? 그도 아니면… 흑심?”

‘위험한 놈이로군.’

강우는 진중을 대할 땐 조금 더 신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력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면, 그를 통해 감정을 유추해 내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화가 난 사람은 저도 모르게 미세한 마력을 흘리고, 그 유동 속도가 빨라지기 마련.

강우처럼 숙련된 자들은 그런 변화까지 통제할 능력이 있지만, 24시간 내내 그런 상태를 유지하기란 사실 쉽지 않았다.

석철의 시험이 끝나고, 그가 저택에서 달콤한 단잠에 빠졌듯이 말이다.

무엇이든 한계는 존재하는 법이다.

‘어딘가 호공 놈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놈이야.’

무슨 대답을 하든 이로울 건 없는 질문이기에, 강우는 가장 차선의 대답을 택했다.

“셋 전부다.”

“…그렇군.”

그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진중도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는 다시 침묵이었다.

계속해서 진중은 용병단과 거리를 벌려 걸었고, 제자리로 돌아간 강우는 다른 용병들과 함께 끝없이 펼쳐진 녹림의 벽을 따라 돌길을 걸었다.

지루한 시간이었다.

마물도 튀어나오지 않고, 간단한 함정도 출현하지 않는, 그저 끊임없는 행진.

이 행군에는 벽에 닿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위기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삼 일을 내내 걷게 되는 겁니까?”

“난들 아냐. 보스를 만나게 되면 뭔가 달라지겠지. 그나저나 저 도깨비 같은 놈만 믿고 가려니까 영 께름칙한데.”

임가륜의 물음에 투움바가 자신의 레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투덜댔다.

하지만 다행히 지루한 여정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다.

앞서 걷던 진중이 드디어 발걸음을 멈춘 것이다.

드디어 이번 미궁의 첫 번째 관문이 등장한 듯했다.

첫 관문을 두 눈으로 마주한 조릭이 중얼댔다.

“시불… 저게 대체 뭐야?”

그건 분명 나무였다.

어둠에 가려 그 높이를 알 수 없는 초대형 나무가 이 장대한 공터에 자리하고 있었다.

모두가 나무를 멍하니 바라보는 가운데, 타이슨이 중얼댔다.

“나… 저거 본 적 있어.”

모두의 시선이 타이슨에게 닿았다.

놈이 여전히 나무에 시선을 둔 채로 입을 열었다.

“저건 만드레이크(Mandrake)다.”

“만드레이크? 만드라고라를 말함인가?”

“그래.”

핸더슨의 물음에 타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균열> 내에서의 만드라고라는 마법적인 힘을 지녔다는 신비의 식물.

하지만 실제로 마법이 깃들었는지는 증명되지 않았고, 대신 독성이 강해 환각이나 마비같이 신경계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큰 식물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주변을 살피던 임가륜이 말했다.

“잠깐, 그런데 무슨 소리 안 들려요?”

“응?”

아그작, 아그작.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작은 소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청력을 강화하자 곧 임가륜이 말한 소리가 모두에게도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질긴 무언가가 잘게 부서지는 듯한 소리.

소리의 주인공을 찾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대형 만드라고라 아래, 헐벗은 덩치 하나가 등을 보인 채 앉아있던 것이다.

목덜미를 덮은 더벅머리와 몇 겹으로 접힌 옆구리, 넓게 퍼진 엉덩이.

인간의 외양을 한 놈은 한눈에 봐도 500킬로그램은 족히 나갈 것 같았다.

아그작, 아그작.

소음의 정체는 놈이 만드라고라의 뿌리를 씹어 먹는 소리였다.

양손에 뿌리를 든 놈이 게걸스레 그것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거대한 덩치와 달리 목으로 넘어가는 건 소량이었다.

묵묵히 놈을 지켜보던 진중이 말했다.

“변종 노움이다.”

<노움>.

고블린이나 그렘린 같은 난쟁이 마물을 총칭하는 이름이었다.

핸더슨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저게 고블린이라고?”

“그러기엔 너무 큰데? 저렇게 큰 고블린은 처음이야. 설마 만드라고라를 먹어서 그렇게 커진 건가?”

“엄청나네요…….”

이산과 임가륜도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이대로 지켜만 보고 있을 순 없는 일.

강우가 짐짓 모른 척 진중에게 물었다.

“어떡하면 되지? 처치해야 하나?”

역시나 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여기까지 들어섰는데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굳이 사냥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

“설마 저런 걸 뒤에 남겨 두고 가겠다는 뜻이냐?”

딴지를 건 건 핸더슨이었다.

그 눈에 불신이 가득했다.

그러나 진중은 단호했다.

“미궁은 시간이 생명이다. 지체하면 이곳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상대의 전력을 모르는 이상, 영양가 없는 싸움은 피하는 게 상책이지. 이미 한 번 경험했을 텐데? 아니면, 한 번으로는 성이 안 차는가?”

“…….”

진중의 질책에 핸더슨은 입을 다물었다.

괜히 조급해진 탓이었다.

그래서 평소 자신답지 않게 신중하지 못했고, 그 한 번의 실수가 자신의 입지를 열악하게 만들었다.

‘제길.’

결국 핸더슨도 진중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굳게 닫힌 벽을 보며 조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이렇게 쉬울 것 같지 않더라니까.”

이 대형 공터를 나가는 벽이 막혀 있던 것이다.

대신 출구로 추정되는 문에 열쇠 구멍이 보였다.

그리고 그 열쇠는 당연하게도 변종 노움의 밑에 깔려 있었다.

모두가 열쇠의 위치를 확인한 가운데, 진중이 물었다.

“누가 가져올 테냐?”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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