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녹림의 벽 (3)
<녹색(綠色) 미궁>.
앞으로 나타날 무수한 미궁(迷宮) 중 하나이자, 그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복잡한 <균열>.
일반적으로 보스를 사냥해야 종료되는 <균열>과 달리, 미궁은 거기에 한 가지 조건이 더해진다.
바로 미궁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
보스를 처치해도 미궁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대로 <균열>과 함께 소멸하는 것이다.
종종 보스를 살려 미궁을 빠져나오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단 한 번도 성공한 사례는 없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미궁의 통제권을 보스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전부든, 일부분이든.
보스를 죽이지 않는 한, 미궁은 가변적이었다.
‘녹색 미궁이라… 소호 미궁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은 미궁이다.’
애초에 강우가 목표로 삼은 건 <소호 미궁>이라 불리는 일반 <균열>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석철의 입국으로 그건 과감히 포기해 버렸다.
<소호 미궁>의 목적은 마석이었는데, <사이트 스톤>이라는 기연으로 인해 마석의 효용이 다소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데스 나이트>와 고리를 업그레이드하는 편이 더 이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녹색 미궁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과거, 강우는 소문만 무성한 <녹색 균열>을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 게, 이번처럼 석철이 비밀리에 처리했기 때문이다.
먼 훗날 놈이 무용담처럼 이야기한 걸 들었을 뿐.
‘아주 잘도 떠들어 댔지.’
아마 그 미궁 이야기만 수십 번도 더 했을 거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분명 놈은 녹색 미궁이 6레벨 에 필적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그러면 아무리 못해도 3차 각성자가 열은 있어야 할 텐데…….’
조릭 바타르는 3차 각성자이지만, 임가륜은 명백한 2차 각성자다.
후에 합류한다는 나머지를 포함해도 3차 각성자는 강우까지 모두 넷.
아무리 놈이 자만한다 해도 그들끼리 6레벨에 근접한 <균열>, 그것도 미궁에 들어가라는 건 죽으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앞선 전언을 고려한다 해도 강우 자신까지?
‘이상하군.’
하지만 곧 그 의문은 쉽사리 해결되었다.
* * *
“반갑다. 석철 님께서 파견한 진중이다.”
머리를 회색빛으로 물들인 진중이라는 사내는 작은 체구의 아시아인이었다.
하지만 미미한 체구와 달리, 휘둥그런 도깨비 같은 눈은 어딘가 섬뜩함을 자아냈다.
인상만 봐서는 쉽사리 다가가기 힘들어 보였다.
이마를 감싼 검은 띠 아래로 두 개의 백안(白眼)이 희번덕거렸다.
“석철 님이 내게 길잡이를 맡기셨다. 내겐 미궁을 파훼할 방도가 있다.”
“어, 어… 반갑다.”
진중을 처음 본 조릭 바타르도 꺼림칙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가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찾아보는 사이, 멀찍이 선 조릭 바타르가 중얼거렸다.
“묘하게 기분 나쁜 놈이네…….”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막내 임가륜도 그 말에 거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느끼는 건 비단 인상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상당한 마력이군.’
강우는 진중이 감춘 마력을 엿보았다.
놈 안에 내재한 마력은 자신처럼 <사이트 스톤>의 세상에서 수련이라도 한 듯 엄청난 양이었다.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듯한 마력이 통제선 아래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조금만 건드려도 터져 버릴 것처럼.
‘단순한 길잡이는 아닌가.’
― 핸더슨과 이반이 합류하거든, 그때는 때를 봐서…….
비로소 강우는 석철이 남긴 말을 이해했다.
파이트(Fight)를 좋아하는 놈은 이미 눈이 아주 높아져 있었다.
웬만한 각성자는 성에 차지 않을 정도로.
강우는 진중의 소속을 알 것도 같았다.
“이게 전부인가?”
이윽고 핸더슨과 이반까지 합류하자, 모든 멤버가 모였다.
레인저이자 길잡이를 맡은 진중과 조릭 바타르를 비롯한 일곱 명의 석철 용병단.
그리고 강우까지.
모두 아홉 명으로 이루어진 조촐한 원정대였다.
그들을 확인한 진중이 말했다.
“출발하지.”
처음 남궁민이 기다리는 비행장으로 향한 그들은 그곳에서 호출을 받고 온 대형 헬기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목적지는 서해안의 한 섬.
이윽고 헬기가 이름 불명의 섬에 착륙하자, 멀지 않은 곳에 드러난 <균열>이 보였다.
멀리까지 은은한 초록빛을 내비치는 이계의 땅.
저것이 바로 <녹색 미궁>이었다.
“유색 균열이었군.”
“그래.”
강우의 말에 진중이 호응했다.
유색(有色) 균열이란, 말 그대로 색을 가진 균열을 뜻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여러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반적인 <균열>보다 더 예측불허한 <균열>이라는 데에는 뜻이 같았다.
<균열>이 가진 불확실성에 불확실성을 더한 곳.
각성자들이 말하는 <유색 균열>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다다른 미궁 앞에서 진중이 말했다.
“예상 소요 시간은 삼일이다. 쉽지 않은 난이도인 만큼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어차피 다 아는 바다. 필요 없는 소린 그만하고 어서 앞장서라. 석철 님이 오시기 전에 클리어하려면 이럴 시간이 없어.”
진중의 말을 자른 건 핸더슨이었다.
아까부터 놈은 진중을 견제하는 듯한 모습을 종종 보였는데, 아마도 이번 레이드의 주도권을 잡고 싶은 듯했다.
원래라면 이곳의 리더였을 핸더슨이다.
놈은 강우가 잠자코 있자, 계속해서 목소리를 냈다.
“…….”
진중은 그런 핸더슨을 잠시 바라봤다.
무슨 감정인지 모를 담담한 시선이나, 심기가 좋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석철이 직접 파견했다지만, 그는 이곳에서 외부인이다.
다른 용병들이 은연중에 배척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곧 일자로 닫혀 있던 진중의 입이 열렸다.
“그럼 각설하고, 들어가겠다.”
언뜻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시선이 닿은 건 착각이었을까?
강우는 짐짓 그것을 모른 척하며 허리춤에 달린 <피바라기>를 확인했다.
* * *
처음 그들을 맞이한 건 습한 녹림의 공기였다.
광원을 밝히자, 오래된 풀 냄새와 함께 눈앞으로 장대한 녹색 벽이 펼쳐졌다.
양옆으로 올라선 벽은 장대한 미로의 입구.
노련한 정원사의 손길이 닿은 듯, 정교하게 다듬어진 수풀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을 본 조릭 바타르가 짧은 감상평을 내뱉었다.
“식물로 만든 벽이라니… 이름답게 너무 빤하잖아?”
스르륵.
놈이 벽에 손을 대자 넝쿨처럼 얽혀 있던 식물들이 작게 몸을 떨더니,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벽 자체가 살아 있는 생명체 같았다.
풀은 상대를 파악하는 곤충의 더듬이처럼 조릭의 손을 조심스럽게 만지작댔다.
그 모습을 신비롭게 바라보던 조릭이 감탄했다.
“오옷, 존나 신기한데?! 꼭 닥터 피시 같아!”
“어디, 나도!”
“난 다리!”
그러자 투움바와 이반도 부랴부랴 제 신체를 벽에 가져다 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놈들의 몸을 더듬는 식물들.
“오오! 나도 된다!”
“잡견아! 너도 해 봐라! 시원해!”
“…정말입니까? 위험해 보이는데요.”
“마력은 안 느껴져! 설마 풀에 죽기라도 하겠냐?”
이어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만큼 자신만만한 걸까.
놈들은 자신들이 들어선 곳이 5레벨 <균열>이라는 걸 망각한 듯 보였다.
“…얼빠진 놈들.”
핸더슨은 익숙한 듯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더니, 이내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는 거라곤 양옆을 꽉 막아선 수풀 벽뿐.
강우가 보기에도 그랬다.
‘주변에 마물은 없군.’
그런데 그때였다.
벽에 달라붙은 놈들이 신나서 떠드는 가운데,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진중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벽과 너무 오래 접촉하면 다칠 수도 있다.”
파앗!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돌연 벽에서 줄기가 튀어나와 조릭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할 만큼 잽싼 움직임이었다.
“컥!”
그리고 곧 드릴처럼 말린 줄기 하나가 뻗어 나왔다.
초록 니들이 조릭의 목에 닿기 직전.
스각!
강우의 <피바라기>가 초록 니들과 조릭을 붙잡은 수풀을 잘라 버렸다.
조금 얼빠져 보이긴 해도 조릭은 3차 각성자.
쉽사리 죽진 않겠지만, 만약 니들에 당했다면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놈이 연신 콜록대며 성질을 부렸다.
“켁켁… 그런 건 빨리 말해 줘야지, 새꺄!”
“…정확하지도 않은 걸 미리 말해 줄 순 없는 일이다.”
“…니미럴.”
어느새 용병들 모두가 벽에서 떨어져 있었다.
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제모습을 되찾아 있었다.
꼭 백귀의 숲에서 본 호수 같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의 벽은 마력이 느껴지지 않으며, 분명한 살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
훨씬 더 은밀하고, 까다로운 상대였다.
잠시 진중을 노려보던 핸더슨이 말했다.
“결국 벽을 타고 올라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군.”
“그래. 미궁은 정해진 길과 수단만 이용하는 게 규칙이지.”
화르르륵!
진중의 말에 핸더슨은 마력을 방출했다.
놈의 마력은 불 같았다.
단검에서 흘러나온 보랏빛 마력이 화려하게 눈앞을 수놓으며 녹림의 벽을 녹였다.
언뜻 봐도 비교적 정교하고 숙련된 기술.
스르르르.
하지만 그 대단한 솜씨에도 갈라진 벽은 금세 복구됐다.
녹은 자리에 새로운 식물이 꾸역꾸역 자라 그 자리를 메웠다.
언뜻 그 찰나를 틈타 넘나들 수도 있어 보였으나, 괜히 벽에 붙잡혀 더 한 위험에 처할 수도 있고, 결정적으로 벽 너머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부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잠자코 핸더슨을 지켜보던 진중이 이야기했다.
“분명히 말하는데, 미궁을 빠져나가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건 오직 오감뿐, 요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말을 하며 석철 용병단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건 명백한 ‘나무람’이었다.
“그러니 괜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이번 미궁 특성상 독충이나 예상치 못한 독수(毒手)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 너흰 가만히 내 뒤만…….”
“뭐야?!”
그런데 진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벽 쪽에서 느껴지지 않던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꾸물꾸물.
거대한 수풀이 파도치듯 꿈틀대고 있었다.
바닥으로 뻗어 나온 넝쿨이 다리가 되고, 얽힌 가지가 몸통이 됐으며, 여러 겹 뭉친 이파리들이 어깨와 손, 머리를 이루었다.
녹림(綠林)의 병사들.
가장 앞으로 걸어 나온 ‘풀 병사’가 팔을 허공에 뻗자…….
촤르르륵!
빈손에서 식물 줄기로 이루어진 검이 튀어나왔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마기(魔氣).
어찌나 탁한지,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그에 물드는 듯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수풀 벽에서 하나둘 걸어 나오는 녹색 병사들을 보며 조릭 바타르가 진중을 향해 말했다.
“시불… 자기야, 넌 이제 말하지 마.”
“…….”
어느새 십여 명의 풀 인간들이 각자의 무기를 쥔 채 용병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없어 그 표정을 알 순 없지만, 적의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핸더슨이 무기를 고쳐 쥐는 사이, 그 앞에 선 강우가 <피바라기>를 꺼내며 말했다.
“전원, 전력을 다해라.”
강우는 적어도 보스를 만나기 전까진 놈들을 살려 둘 생각이었다.
미궁에 관한 정보를 100% 확신하기 전까진 말이다.
‘어느 틈에…….’
한편, 핸더슨은 다른 의미로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전투를 앞두고 강우의 뒤에 선 게 자존심 상한 것이다.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더 이상의 추락은 안 된다.
핸더슨이 급히 그 옆에 서며 소리쳤다.
“공격해!”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