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헌터-55화 (56/186)

[55화] 녹림의 벽 (2)

환영회가 끝난 다음 날.

석철은 아침부터 강우를 데리고 이카루스의 한 집무실로 향했다.

이카루스의 부길드장인 한명회의 집무실이었다.

“편하게 한 이사라고 불러 주십시오.”

60대 중반쯤?

한명회는 나이가 지긋하고 점잖아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이틀 전 급히 해외로 나갔다는 이승우를 대신해 석철과 강우를 맞이했다.

“이분이 파격적으로 뽑혔다는 새 멤버이신 모양이로군요. 반갑습니다.”

“한강우입니다.”

강우는 한명회가 건네는 악수를 받았다.

이카루스와 석철이 이토록 긴밀한 사이라니.

과거에는 알지 못한, 새로운 사실이었다.

악수를 마친 한명회는 석철과 강우를 자리에 앉혔다.

상석에 앉은 건 오히려 석철.

하지만 한명회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비서가 내온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아무래도 동해에서 중국과 일본이 계속 마찰을 빚고 있는 모양입니다. 현재 일본의 오동 길드는 이카루스의 동맹. 이승우 길드장님께서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입장이니,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카루스의 최대 전력이 이승우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반적인 기업과 달리 길드는 수장이 곧 최고 인력이자 실무자이기 때문이다.

길드장이 제일 바쁜 건 이카루스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길드나 다 똑같았다.

하지만 석철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놈이 심드렁하게 이야기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내뺀 건 아니고?”

“…그럴 리가요. 이승우 님은 이카루스의 수장이자, 대한민국의 얼굴입니다. 내빼다니, 그런 표정은 적절하지 못하군요.”

한명회는 거구의 석철에게도 그리 겁먹은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이야기했다.

“그보다 이승우 님께서는 사과의 선물로 <균열> 몇 개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제법 수익이 짭짤할 <균열>들로요.”

그 능글맞은 웃음에 석철은 심기가 불편한 듯 눈썹을 꿈틀댔지만, 의외로 놈은 한명회의 목을 움켜쥐지 않았다.

놈의 평소 성장으로는 저런 말을 견뎌 낼 리 없는데.

아무래도 이카루스와 석철 사이에는 강우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꽤 중요한 거래가 오가는 듯했다.

그런데 그때.

강우의 시선을 읽은 한명회가 석철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분은 괜찮은 겁니까? 아무리 파격 승진이라지만,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다고…….”

콰득!

이번에는 석철도 참지 않았다.

놈이 내려친 탁자가 대번에 두 쪽이 나 부서지고,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석철이 맹수와 같은 눈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다른 건 몰라도 내 수하들에 대한 실수는 안 된다.”

“…이번엔 제가 실례했군요. 죄송합니다. 부디 제 사과를 받아 주시길.”

한명회는 굳이 강우에게 고개 숙여 사과를 건넸다.

긴밀한 거래자답게 그도 석철의 성격을 알긴 아는 듯했다.

석철이 여세를 몰아 계속 이야기했다.

“이번에 부탁한 균열은 우리로서도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다. 그런데 네놈들이 다 망쳐 버렸으니, 고작 균열 몇 개로는 안 돼.”

“언데드가 필요하셨다면, 다른 언데드를 찾아드리지요.”

“아니. 그 균열 자체가 필요했던 거다.”

“…그렇군요.”

분명 <백귀 균열> 이야기다.

역시 석탈해는 백귀들을 노린 모양이다.

정확히 말하면, 강우가 왕의 침소에서 챙긴 그 파피루스를.

그런데 그때였다.

“참가자 명단은 어떻게 됐지?”

“아, 그렇지 않아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석철의 물음에 한명회가 기다렸다는 듯이 서류 뭉치 하나를 내밀었다.

<백귀 균열> 레이드 참가자 명단이었다.

서류를 받아 든 석철이 빠르게 명단을 훑었다.

‘…….’

강우도 넌지시 명단에 시선을 두었다.

놈들이 레이드 참여자를 조사할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한바.

석철이 아무리 훑어도 그곳에서 자신과 유아라를 찾을 순 없을 터였다.

참가자 명단에 남은 거라곤 가짜 이름과 가짜 나이, 가짜 주소가 전부일 테니까.

그중 진짜는 전화번호뿐.

그마저도 만일의 추격을 위해 <균열> 때마다 임시로 부여받는 번호였다.

강우와 유아라가 사용한 번호는 아마 지금쯤 왕린의 연락책들을 돌고 돌아 한국, 심지어는 세계 어딘가를 여행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송강국, 오만석. 살아 나온 3차 각성자는 이놈들뿐인가?”

“예. 그런데 포터로 다녀온 몇몇 용병들의 말을 빌리면, 그 외에도 3차 각성자가 둘이나 더 있었다고 합니다.”

“…둘씩이나? 그게 누구지?”

“하이 포터로 참가한 고아성이라는 여자와 신원 불명의 남자입니다.”

“신원 불명?”

고아성은 유아라고, 당연히 신원불명의 남자는 <검계의 가면>을 쓴 강우였다.

석철의 되물음에 한명회가 말했다.

“예. 아마 처음부터 둘 다 신원을 감추고 들어온 것 같습니다. 이름도, 나이도, 주소도 모두 거짓이더군요. 사실 포터들의 신원을 확실히 확인하는 길드는 요즘 드물죠. 만석이라는 길드도 마찬가지였고요.”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석철의 표정도 같이 일그러졌다.

게다가 <백귀 균열> 특성상 액션 캠 같은 전자 기기는 전부 무용지물.

촬영된 얼굴도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석철이 “그놈들일 확률이 높군.”이라며 중얼댔다.

“그래도 통화는 했을 테니, 번호로 한 번 추적해 봐. 오만석과 송강국이라는 놈도 혹시 수상한 변화가 있나 조사해 보고.”

“수상이라 하시면?”

“갑자기 상위 각성을 했다든가, 정신이 돌아 버렸다거나. 균열 이후로 달라진 게 있다면 전부.”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보상 건 말입니다.”

“그건 아까 말했듯이 고작 균열 몇 개로는 안 돼.”

“고작 균열 몇 개에 추가로 마음에 드실 만한 정보를 하나 얹어 드리지요.”

“…정보?”

석철이 관심을 보이자 한명회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분명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이번에도 어쭙잖은 말장난이면 재미없을 거다.”

곧 자세를 고쳐 잡은 한명회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미국 정부에 베론이라는 자가 스카웃됐다고 하더군요.”

“베론? 처음 듣는 이름인데?

한명회가 슬며시 웃었다.

“본명이라 그렇습니다. 아마 이 이름은 낯익으실 겁니다. 에르난데스. 언젠가 석철 님이 부탁했던 자의 이름이기도 하고요.”

꿈틀.

효과는 확실했다.

에르난데스라는 이름이 한명회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석철의 기세가 매서워졌기 때문이다.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듯한 분위기였다.

어느새 놈이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에르난데스?’

하지만 강우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

정보가 필요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그 에르난데스라는 사람, 누굽니까?”

다행히 석철은 순순히 이야기해 주었다.

“있어, 배신자 놈. 심부름을 보냈더니, 제 동료를 죽이고 튄 놈.”

“…그렇군요.”

석철이 개인적으로 원한을 품은 자인 듯했다.

그 반응에 한명회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멕시코에서 활동하다 지금은 미국 정부에 들어갔다는 소식입니다. 아마도 국경을 오가며 비밀 임무라도 수행하는 모양입니다. ‘베스’라는 가명으로요. 이 정도면 충분한 대가가 될는지요.”

대답은 필요 없었다.

석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또 한 번만 일 처리가 이런 식이면 우리도 다른 길드를 찾아보는 수밖에 없어. 이 좁은 나라에 네놈들 노리는 길드가 여러 개야. 알지? 그때가 되면 네놈이 내 앞에서 그렇게 건방지게 굴 수는 없을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한명회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가자.”

그 밀을 끝으로 석철은 강우를 데리고 집무실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한명회는 잠시 뒤, 전화기를 들었다.

사우나에서 피로를 풀고 있을 길드장에게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곧 수화기 너머로 이승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이야기 끝났어?]

“예. 잘 달래서 보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균열도 몇 개 내주었습니다.”

[후, 다행이군. 왜 허의 사절이 아닌 그놈이 온 거지? 쓸개에 빨대라도 꽂은 것처럼 미친 곰 같은 놈이야. 특별히 조심해서 다뤄.]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어때? 바로 갈 태세인가?]

그 말에 한명회가 작게 웃었다.

“예. 당장에라도 그곳으로 가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잘됐군. 자신 있어?]

“얼마 되진 않았지만, 에르난데스는 현재 미국 정부 소속입니다. 석철, 그자가 건든다면 가만있지는 않을 겁니다. 이미 에르난데스 쪽에도 말해 두었고요. 빈틈없이 이행하겠습니다.”

[혹시 실패라도 하면?]

“우리가 드러날 일은 없을 겁니다. 만약 실패한다 해도 상대의 실력을 파악할 좋은 기회고요. 아무리 수완이 좋다지만, 우리는 저들에 대해 너무 모릅니다.”

[그래, 한 이사만 믿지. 고생했어.]

전화는 곧 끊겼다.

한명회는 식어 버린 커피를 마저 마셨다.

“우리 이카루스가 고작 발정 난 개들한테 휘둘릴 순 없는 노릇이지. 우릴 이용한다 생각했겠지만… 과연 그럴까?”

어쩐지 커피가 아까보다 더 달아진 느낌이었다.

* * *

“빨리빨리 움직여!”

숙소로 돌아온 석철은 바빴다.

대뜸 수하들을 다그친 놈은 서둘러 해외로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수하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으나, 그의 말에 토를 달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잠시 미국에 다녀오겠다. 핸더슨과 이반은 남궁민한테 연락해서 태산에 다녀와. 타이슨과 이산, 투움바는 이카루스가 준 <균열>들 입찰하고. 미리 말해 준 이름으로 참가하는 거 잊지 마라. 해릭, 넌 날 따라온다.”

“알겠습니다.”

그 뒤로도 나머지 수하에게 마저 지시를 내린 석철이 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첫 임무다. 넌 조릭, 임가륜과 함께 균열 하나를 클리어해라.”

“어떤 균열입니까?”

“그건 남궁민이 알려 줄 거다. 핸더슨, 이반. 너희도 태산에 다녀온 뒤, 입찰 팀을 데리고 저쪽에 합류해.”

“예!”

“명 받들겠습니다.”

에르난데스라는 자가 대체 어떤 놈이길래…….

꽤 조급한 모양이었다.

그 길로 석철은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그런데 빌딩을 출발하기 직전, 마중을 나온 강우에게 석철이 몰래 말을 전했다.

[상황이 바뀌었다. 핸더슨과 이반이 합류하거든, 그때는 때를 봐서…….]

갑작스러운 <전음>.

‘…뭐라고?’

진심인가?

잠시 강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만큼 석철의 메시지는 그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것이었다.

“…….”

하지만 보는 눈이 많은 만큼 표를 내진 않았다.

곧 석철을 태운 리무진이 공항으로 떠났다.

불과 한 시간도 안 돼서 벌어진 석철의 미국행.

강우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과거, 멕시코 쪽 국경에 사건이 있었던가.’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바는 없었다.

강우는 졸지에 파트너가 된 조릭 바타르와 잡견(雜犬) 임가륜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지긋지긋하군.’

강우는 자신을 노려보는 핸더슨과 조릭 바타르의 시선을 느꼈다.

둘은 알게 모르게 강우를 향해 묘한 투지를 불태우는 중인데, 석철이 없는 틈을 타 무슨 일을 벌일 듯싶었다.

반대로 강우로서도 석철의 눈을 피해 무언가를 벌이기 딱 좋은 시점.

서로 나쁠 건 없었다.

‘생각보다 더 바쁜 한 주가 되겠군.’

곧 남궁민에게서 연락을 받은 조릭 바타르가 강우에게 <균열>의 위치를 알렸다.

그런데 짤막하게 적힌 <균열> 소개 속에서 익숙한 단어 하나가 보였다.

미궁(迷宮).

분명 그곳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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