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녹림의 벽 (1)
이틀은 금세 지나갔다.
강우는 그동안 알게 된 몇 가지 사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혹시 석철을 통해 석탈해나 호공을 만나게 될 경우도 대비해 계획을 짰다.
이제는 석철 용병단의 서열 2위, 한강우로 변신할 시간.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이미 검은 리무진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왔냐?”
그 안에서 석철이 강우를 반갑게 맞이했다.
“옷 멋진데?”
“감사합니다.”
지금 강우가 입고 있는 건 석철이 사 준 명품 정장이었다.
오랜 고문에 황 노인이 선물한 정장은 도무지 회생 불가능한 상태가 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새 옷이 필요했다.
그런 강우에게 석철은 입단 선물이라며 1억 2천만 원짜리 특제 정장을 사 주었다.
몸의 균형을 유지하고, <균열>의 마력 영향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나.
다 장사치의 입바른 소리 소리겠지만, 비싼 만큼 확실히 가볍고 태가 났다.
문득 한선화라면 이 옷을 보고 뭐라 평할지 궁금해진 강우였다.
“타.”
오늘의 운전수는 일전에 강우에게 망신을 당한 조릭 바타르였다.
놈은 직접 문을 열어 주었는데, 아마도 일종의 길들임일 확률이 높았다.
석철은 놈에게 강우의 시중을 맡김으로써, 자연스럽게 서열을 납득하게 만들 생각인 듯했다.
물론 조릭 바타르의 머릿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제기랄.’
조릭 바타르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무리 석철이 이 용병단의 우두머리이고, 그의 말이 절대적이라고 하지만, 불과 하루 만에 그 결과를 받아들이긴 힘들기 때문이다.
그는 이 순간 자체가 몹시 굴욕적이었다.
‘핸더슨은 왜 가만있는 거야.’
조릭 바타르는 서열 2위 핸더슨이라도 한마디 해 주길 원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그도 오늘의 시중을 그저 침묵했다.
그러니 일단은 참는 수밖에.
아무리 불만이라도 감히 석철 앞에서 이빨을 드러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를 악문 조릭 바타르가 운전석에 앉는 사이, 석철이 물었다.
“그래, 정리는 다 끝났냐?”
“예. 특별히 크게 정리할 것도 없었습니다.”
“다행이로군.”
그러면서 석철은 강우에게 위스키 잔을 건넸다.
‘…또 술인가.’
리무진 내부는 완전한 위스키 바(Bar)였다.
강우는 단 두 개뿐인 의자 중 하나에 앉아 위스키를 마셨다.
이곳에 오기 전, 강우가 가장 마지막까지 고민한 건 다름 아닌 집이었다.
정이 깊게 든 건 아니지만, 나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차피 박도진과 유아라, 박수영까지 함께 살게 된 이상, 이왕이면 큰 집이 좋았다.
그 결과, 강우는 확실한 안전이 보장될 때까지 주택을 청익에게 맡겼다.
그 외에 재산이라고는 밥솥과 <이무기의 비늘>, 권기한의 집무실에서 얻은 서류가 전부.
고민 끝에 밥솥을 제외한 것들은 <사이트 스톤>의 세상에 두었다.
이번에 <피바라기>를 보관했듯, 그곳에 물건을 가져다 둔 것이다.
<사이트 스톤>의 재발견이었다.
그곳은 강우에게 있어 방대한 창고.
값비싼 마력 금고보다 더 안전하고, 반영구적인 보관함이었다.
남은 문제는 마력에 취약한 밥솥뿐인데, 그건 간단하게 황한수에게 맡겼다.
어차피 하루 종일 양복점에 있는 그이기에, 할 일 많은 박도진에게 또 맡기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지금쯤 황한수는 그 밥솥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겠지만.
부웅―
석철과 강우가 각성자용 위스키를 한 잔씩 비우는 사이, 비로소 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강우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우리의 아지트. 뭐, 정확히 말하면 한국에 있는 동안 지낼 숙소다.”
이윽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강남의 한 빌딩이었다.
‘여긴…….’
강우는 낯익은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강우가 아니더라도 웬만한 각성자라면 다 알 만한 건물이었다.
『이카루스』
건물 입구와 옥상에 대문짝만 하게 그 이름이 쓰여 있었다.
― 석철과 당신이 사라진 뒤로, 이승우가 찾아왔습니다.
‘이카루스라…….’
박도진의 말대로였다.
한국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1위 길드는 석철과 일련의 관계가 있는 게 분명했다.
강우는 대놓고 물었다.
“이카루스와도 안면이 있으신 겁니까?”
그 말이 감탄으로 들렸는지, 석철이 껄껄 웃었다.
“그래. 이제 어떠냐? 이 석철 님이 어떤 급인지 좀 감이 오냐?”
“…….”
“하지만 이런 건 자랑거리도 못 돼. 이카루스 따위는 놀랄 일도 아니지.”
한국 랭킹 1위 길드를 ‘따위’로 칭한다라…….
확실히 엄청난 뒷배가 있는 모양이었다.
곧 강우와 석철, 조릭 바타르는 빌딩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정문이 아니었다.
이카루스의 지도부를 위해 따로 마련된 통로가 건물 옆 편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 올라가자, 그곳에 숨겨진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그들은 그걸 타고 건물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어서 오십시오.”
곧 네 명의 직원이 그들을 맞이했다.
이카루스의 최상층은 숙소로 운영됐는데, ‘한국에서 가장 호화롭고 안전한 숙소’라는 슬로건 아래, 정부 귀빈들만 머물 수 있는 장소였다.
석철은 이카루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눈에 봐도 산해진미가 펼쳐진 술상과 함께 저번에 봤던 석철의 패거리들이 죄다 모여 있었다.
“두 번째 보는 거지만, 다들 정식으로 인사해라. 한강우다.”
짝짝짝짝―!
석철이 강우를 소개하자, 모든 용병들이 손뼉을 쳤다.
그중에는 서열 2위였던 핸더슨도 있었다.
석철의 눈짓에 중앙으로 나선 강우가 그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한강우다. 잘 부탁한다.”
“오우, 패기!”
“환영한다!”
강우는 몰랐지만, 이미 석철 패거리 중 몇몇은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일련의 입단 심사.
그건 석철 용병단에게 있어 전설로 남은 2주였기 때문이다.
모두가 눈앞에서 전설을 지켜보았고,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했다.
그들도 인정한 것이다.
강우는 자신들을 까마득히 넘어서는 존재라는 걸.
세상 그 누구도 그런 미친 고문을 열흘이나 버텨 낼 순 없다.
그래서 그들은 진심으로 강우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묘하군.’
강우는 그들의 환호를 받으며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슬쩍 본 핸더슨은 다른 동료들을 따라 손뼉을 치고 있으나, 입을 일자로 꾹 다문 채 담담한 눈빛이었다.
모르긴 해도 놈과 조릭 바타르만은 자신에게 적대심을 품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때, 석철이 말했다.
“그럼 새로 들어왔으니, 신고식을 해 볼까?”
신고식이라는 말에 강우가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또 시험입니까?”
“크크큭, 당연히 아니지.”
강우의 말이 우스웠는지, 석철과 몇몇 용병들이 껄껄 웃었다.
곧 석철의 손짓을 받은 사내 하나가 직사각형 상자를 조심스럽게 들고 왔다.
남색 천으로 둘러싸인 정체불명의 상자.
사내가 신중히 상자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작은 붓이 들어 있었다.
강우도 뒤늦게 상자 속 물건을 알아차렸다.
‘이명(異名)의 붓인가.’
<이명(異名)의 붓>.
러시아의 한 마법계 각성자가 심심풀이로 개발했다는 신비의 붓이었다.
각성자의 기운을 감지해 그에 걸맞은 이름을 지어 준다나.
그리 신빙성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각성자들 사이에서는 종종 이명을 짓는 데 실제로 사용되는 물건이었다.
“이명의 붓이라니… 이런 장난을 믿으시는 줄은 몰랐군요.”
그러자 석철이 웃으며 말했다.
“이건 일반 붓이 아니야. 유럽 측에서 특별히 선물용으로 재개발한 붓이지. 아시아 버전으로 말이야. 이 자그마한 붓이 30억을 넘긴다면 믿겠냐? 개발하는 데에만 18억이 넘게 들어갔단다.”
“…….”
이딴 물건에 18억을 태우다니.
누군지는 몰라도 유럽의 각성자 중에도 정신 나간 놈들이 많은 모양이라고 강우는 생각했다.
“그럼 한번 볼까, 우리 신입의 이명은 뭐가 나올지?”
석철뿐만 아니라 다른 용병들도 기대하는 눈치였다.
곧 30억짜리 붓에 걸맞은 값비싼 고급 한지가 강우의 앞에 놓였다.
‘…….’
잠시 붓과 한지를 번갈아 보던 강우가 이윽고 붓을 잡았다.
혹여 또 다른 시험이거나 함정인가도 고민해 봤지만, 딱히 그런 느낌은 없었다.
강우는 천천히 소량의 마력을 붓에 불어넣었다.
그도 조금은 궁금했다.
과연 이 붓은 과거로 돌아온 자신에게 어떤 이름을 부여할까.
이내 몸을 떨던 붓이 한지에 이름을 적어 넣기 시작했다.
한 획, 한 획.
정교하고 힘 있는 필체가 눈앞에 펼쳐졌다.
붓의 필체는 곧 마력의 분위기를 나타내기도 했다.
사나운 성정을 가진 석철은 한눈에 봐도 뾰족하고 거친 필체를 보였고, 평소 침착한 핸더슨은 깔끔하고 정교한 필획을 선보였다.
“오…….”
하지만 강우의 필체는 그보다 더 미묘한 구석이 있었다.
필체가 기력 넘치고 큼지막하면서도 그 끝은 보는 이가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깔끔하게 갈무리되어 있었다.
몇몇 용병들이 감탄사를 남발하는 사이, 첫 번째 글자가 완성되었다.
<差>
처음 완성된 글자는 어긋날 차(差)였다.
붓은 계속해서 두 번째 글자를 그려 나갔다.
각이 진 듯하면서도 비틀어진, 기이한 필획이었다.
곧 두 번째 글자도 완성됐다.
강우가 자신의 이명을 묘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석철이 한자를 모르는 부하들을 위해 그 단어를 읽었다.
“차사(差使).”
“차사가 뭡니까, 대장?”
한 사내의 물음에 석철이 흥미롭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음, 저승사자라는 뜻이다. 그림 리퍼(Grim Reaper)?”
“아아, 그림 리퍼라니. 퍽 멋진 이명이군요.”
차사의 뜻을 알게 된 몇몇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러운 듯 강우를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게, 강우 이전에 들어온 임가륜이라는 중국 출신 남자는 ‘잡견(雜犬)’이라는 이명을 받았다고 했다.
잡견이라니…….
한동안 그가 동료들의 놀림감이 됐음은 물론이다.
“석철 용병단에 저승사자가 생겼군. 이거, 무서워서 잠이나 자겠어?”
석철이 목을 움츠리며 말했지만,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강우의 이명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강우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도 저승사자라는 이명을 갖게 되다니.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묘한 우연이었다.
“차사 한강우… 저승사자 한강우… 그림 리퍼 한강우…….”
한동안 석철은 강우의 이명을 중얼거리더니, 이내 손바닥을 주먹으로 치며 말했다.
“그래! 오늘부터 한강우, 넌 사신(死神)이다.”
“사신…입니까?”
“그래! 어감이 그게 제일 좋다!”
어째서 석철이 직접 이명을 골라 줬는지는 며칠 지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이 순간, 사신이라는 이명은 강우로서도 그리 나쁜 어감은 아니었다.
<사신(死神) 한강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신을 그보다 더 잘 표현할 말은 없어 보였으니까.
사신의 탄생일이었다.
석철이 신나서 외쳤다.
“자, 그럼 연회를 시작하지!”
강우를 위한 환영 파티가 이어졌다.
환영 파티라 봐야 밤새 술을 퍼마시고, 몇몇 사내들이 저질스러운 개인기와 각자의 무용담을 선보이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은 자기들끼리만 놀았다는 점.
용병단의 환영식에는 외부인을 들이는 게 금지라고 했다.
그런데 파티가 한창 무르익을 때였다.
“잠깐 나 좀 볼까?”
말을 걸어온 건 다름 아닌 핸더슨이었다.
강우가 슬쩍 보니, 흠뻑 취한 석철은 다른 수하들과 마작(麻雀)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
자리에서 일어난 강우는 핸더슨을 따라나섰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술판에 짐짓 피로함을 느끼던 터.
바깥바람도 좀 쐬고 싶었다.
핸더슨이 강우를 데리고 간 곳은 건물 옥상이었다.
“한 대 피울래?”
강우는 시가를 내미는 핸더슨에게 손을 내저었다.
잠시간 내민 손을 공허하게 바라보던 놈이 곧 자신의 시가에 불을 붙였다.
후.
한바탕 하얀 연기가 옥상으로 퍼져 나갔다.
“난 말이야, 네놈을 믿지 않아.”
대뜸 뱉은 핸더슨의 말에 강우가 담담하게 고개를 돌렸다.
놈이 싸늘한 어투로 계속 이야기했다.
“너 같은 놈이 뜬금없이 나타난 것도 그렇고, 마치 석철 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구워삶은 것도 그렇고. 난 너 같은 능구렁이들을 잘 알거든.”
핸더슨은 고작 두 모금 피운 담배를 발로 짓이기더니, 코앞까지 다가와 사나운 기색을 내비쳤다.
금방이라도 강우의 살점을 물어뜯을 듯한 눈빛으로 놈이 으르렁거렸다.
“조심해. 그 가면이 손톱만큼이라도 벗겨지는 순간, 그 얼굴을 전부 찢어발겨 줄 테니까.”
…적당히 까불어라, 뭐 이런 건가.
한동안 강우를 노려보던 핸더슨은 이내 몸을 돌려 옥상 문을 나섰다.
조금 전까지 놈이 내뿜은 사나운 마력이 아직 주변에 잔재해 있었다.
“…….”
남겨진 강우는 놈이 방출한 마력을 느꼈다.
노골적인 분노가 담긴 마력.
행여나 이 마력이 일으킬 일반인 피해자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양이기도 했다.
그걸 마주한 강우의 감상은 간단했다.
‘…죽여야겠는데.’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