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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헌터-53화 (54/186)

[53화] 믿는 마음 (2)

“괜…찮아요?”

그게 강우를 본 유아라의 첫 질문이었다.

강우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어디서 맞았는지 눈이며, 두 뺨이며 퉁퉁 부어 있었으니까.

얼굴도 핼쑥한 게, 꼭 조난을 당했다가 막 구조된 사람 같았다.

여전한 건 감정 모를 눈빛과 최고급 브랜드로 바뀐 것 같은 검은 정장뿐.

하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물음에도 강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괜찮다. 별거 아니야.”

그러면서 그는 박도진에게 <사이트 스톤>과 검계용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유아라가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는 가운데, 강우가 말했다.

“고맙다.”

“그냥 보관만 했을 뿐입니다.”

“선물은?”

“계속 보냈습니다. 쪽지도 친필로 썼고요. 아, 그리고 그녀는 우승했습니다.”

그러자 강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보낼까요?”

“한동안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강우는 만남을 파했다.

이미 안전을 확보한 상태지만, 굳이 위험 요소를 감수할 필요는 없다.

강우는 홀로 구로구 저택으로 향했다.

석철 일이 끝나기 전까진 당분간 계속 홀로 지낼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찾은 집은 조용했다.

‘어색하군.’

적막이 어색해지는 날이 오다니.

확실히 과거와 뭔가가 달라지긴 한 모양이다.

주방에서 밥솥의 안전을 확인한 것을 끝으로, 강우는 방으로 향했다.

털썩.

그는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2주일 만에 느끼는 안락함이다.

시험이 끝나자 석철이 과분하다 싶을 만치 잘 챙겨 주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곳은 적의 품.

그 시간이 편할 리 없었다.

‘이렇게 피곤한 건… 오랜만이군.’

강우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 * *

“뭐냐? 왜 이렇게 열심히 해? 아니, 원래도 열심히 하긴 했지만…….”

“…….”

하지만 청익의 우려에도 유아라는 계속해서 ‘Death and Shadow’를 휘둘렀다.

열 번, 스무 번, 백 번, 천 번.

베고, 베고, 또 베어서, 마침내 세상의 모든 걸 베어 버리기라도 할 기세였다.

청익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댔다.

‘뭐야? 또 왜 이래?’

청익이 보기에 유아라는 강우에게 감정이 있었다.

그게 동경인지, 남녀 간의 감정인지는 그녀 자신도 잘 모르는 듯했으나, 마음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강우 그 녀석이 돌아왔다길래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들의 재회를 위해 일부러 강우를 찾아가는 것도 미룬 청익이었다.

그런데 강우를 만나고 왔다던 유아라는 어딘가 시무룩했다.

아니, 거기에 더해 새로운 독기가 또 생긴 듯했다.

그녀의 눈에도, 검에도, 그 동작 하나에도 어마어마한 맹독(猛毒)이 묻어 나왔다.

― 괜찮다. 별거 아니야.

유아라는 아까 강우의 대답을 수천 번은 더 곱씹는 중이었다.

꾸욱.

그런 얼굴로 그런 대답이라니.

그 말을 들은 순간, 유아라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베어 물었다.

그건 서운함이었을까, 아니면 분함이었을까.

어쩌면 둘 다였을 거다.

그는 자신에게 너무 비밀이 많았다.

― 고맙다.

그러면서도 박도진에겐 중요한 무언가를 맡겼다.

그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어딘가 서운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박도진 씨보다 내가 먼저 만났는데…….’

아무래도 강우는 박도진을 더 가깝게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아직 내가 너무 약해서? 그래서 믿고 뭔가 맡길 수 없는 건가?’

그도 아니면 박도진이 같은 남자라서?

내가 여자라서 불편한가?

아니, 여자로 보기는 하나?

‘자기들끼리만 치사하게!’

유아라는 속상했다.

어딘가 자신만 왕따당한 기분이었다.

매일 사라지는 나날들을, 간직한 비밀들을, 김민정이라는 여자를.

왜 자신에겐 말해 주지 않지?

“자세 흐트러졌다.”

그때, 지켜보던 청익이 유아라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발을 걸었다.

“아……!”

균형을 잃은 그녀가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재빨리 마력을 운용하지 않은 탓에 땅에 쓸린 손바닥에서 피가 흘렀다.

청익이 혀를 찼다.

“그러게 왜 훈련 중에 딴생각을 하나? 내 훈련이 만만해?”

“…죄송해요.”

유아라는 다시 일어났다.

그러고는 다시 검을 휘두르고 찔렀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뿐이니까.

자신은 아직 목소리를 낼 처지가 아닌 거다.

여전히 그들 사이에 설 실력이 아닌 거다.

‘오호?’

유아라가 다시금 묵묵히 검을 휘두르는 동안, 청익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녀는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나, 몸에서 미세한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건 <이무기의 비늘>로 마력 방출을 경험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비늘은 사용자의 신체를 보다 3차 각성에 가깝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었으니까.

물론, 청익은 그 사실까진 알지 못했다.

‘이 애의 마력은 검붉은 색이로군.’

원래라면 붉기만 했을 마력.

하지만 강우를 만난 뒤, 그녀의 마력은 조금 차분해졌다.

‘곧 그 집에 3차 각성자가 하나 더 늘겠는데? 부러운 새끼.’

유아라는 몰랐으나, 자신의 바람처럼 차곡차곡 성장하고 있었다.

* * *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강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시간은 밤 10시.

석철은 자신에게 이틀의 시간을 주었다.

모든 걸 정리하고 용병단에 들어가는 데 주어진 시간이다.

진심으로 자신을 받아들였는지, 놈은 흔한 감시자조차 붙이지 않았다.

‘나름 서열 2위에 대한 배려인가.’

하지만 놈은 모를 것이다.

그 이틀간의 시간이 제 목을 조를 올가미를 고르는 시간이 되리라는 걸 말이다.

이윽고 주변에 느껴지는 마력이 없음을 확인한 강우가 품에서 <사이트 스톤>을 꺼냈다.

그는 곧장 마력을 불어넣지 않고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이 귀중한 걸 어째서 박도진에게 맡겼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특별히 맡길 사람이 없던 탓도 있지만,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떠올렸다.

그의 강함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어쩐지 박도진이라면 이걸 무사히 지켜 줄 것만 같았다.

‘그들을 믿게 된 건가.’

믿는다니.

강우는 저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렇게 지독한 일을 겪고도 또 누군가를 믿다니.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건 인간의 숙명인 모양이다.

‘그나저나 한 소리 듣겠군.’

탑에 가지 않은 지 벌써 2주를 넘겼다.

<데스 나이트>가 잔뜩 뿔나 있겠다고 생각하며, 강우는 <사이트 스톤>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츠츠츠츳!

오랜만에 찾은 <사이트 스톤>의 세상이다.

스타트 지점에 떨어져 있던 <피바라기>를 주워 든 강우는 천천히 탑을 향해 걸었다.

[…늦었군.]

탑에 들어서자, <데스 나이트>가 여전한 자세로 강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 3주 만의 만남.

이곳과 밖의 시간이 약 여섯 배 정도 차이 나니, <데스 나이트>의 입장에선 약 120일 만의 만남인 셈이었다.

“일이 있었다.”

[모르긴 해도 대단한 일이었나 보군. 얼굴이 그 꼴인 걸 보면.]

“뭐, 싱거운 일은 아니었지.”

오늘도 시작은 시답잖은 선문답이었다.

<데스 나이트>가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늦은 만큼 이번 훈련은 더 길 것이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고리를 위해 온 게 아니야.”

그러자 죽음의 기사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럼 대체 왜 온 거지?]

“이 세계에 관해 물어볼 게 있다.”

그간 너무 빠르게 달려온 탓일까.

석철에게 잡혀 있는 동안 강우는 잠시 잊고 있던 몇 가지 의문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뿐.

“이곳에 나 외에 다른 사람도 들어올 수 있나?”

그러자 <데스 나이트>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했다.

[묻는 이유는?]

잠시 고민하던 강우가 답했다.

“살(殺).”

[살(殺)이라…….]

그렇게 중얼거린 <데스 나이트>가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백귀들을 처치하고 나서 확실히 그는 한 단계 더 성장해 있었다.

특히나 백귀의 왕에게 ‘살(殺)’을 펼치던 장면은 뇌리에 박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석철의 고문을 묵묵히 감내하던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백귀들에게 죽음을 명(命)하던 날, 탑은 처음으로 쾌재를 불렀다.

‘또 어떤 죽음을 보여 줄 생각이냐.’

이윽고 <데스 나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게 너뿐만은 아니듯이 말이지.]

“그렇군.”

그것으로 되었다.

강우는 석철을 만난 후에 변경된 계획이 비로소 완전해짐을 느꼈다.

그는 놈에게 이 불지옥 같은 세상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이어서 강우는 두 번째 질문을 꺼냈다.

“혹시 백귀들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나?”

[그 왕족들을 말하는 거라면.]

이야기가 쉬워졌다.

“그럼 그 전설도 알고 있겠군.”

이번에는 조금 대답이 늦었다.

[…그 거렁뱅이 이야기를 말하고자 하는 건가?]

“그래. 백귀 균열에서 놈들이 석판에 기록한 내용을 봤다. 그런데 갑자기 마력이 흘러나오더니, 내게 그 장면을 주입하더군. 마치 기억하라는 듯이 말이야.”

[그건 기억 재생이다. 그래서? 무얼 묻고 싶은 거지?]

“그때, 머리에 아홉 줄기의 상처가 난 검은 개를 보았다. 느낌엔 악마 쪽 마물 같았는데, 혹시 알고 있나?”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데스 나이트>가 답했다.

[오수의 개로군.]

“오수의 개?”

[인과율을 담당한다는 신적인 존재다.]

“인과율을 담당한다라…….”

그게 정확히 뭘 담당하는 건진 몰라도, 그 검둥이가 일반적인 개가 아니라는 건 잘 알겠다.

“그는 왜 왕족들에게 저주를 내렸지? 영생을 원해서?”

[글쎄, 인과율을 담당하는 자이니, 인(因) 혹은 과(果)를 낳기 위해 그랬겠지. 나도 정확한 건 모른다.]

‘거짓이로군.’

강우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데스 나이트>는 만난 이후 처음으로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강우는 백귀의 전설에서 다른 비슷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영생을 얻으려다 되레 저주를 얻은 왕족들과 하늘에 닿으려다 그 벌로 추락하게 된 인간들.

어쩐지 백귀의 전설은 <바벨탑>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혹, 오수의 개라는 게…….’

하지만 강우는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어쨌든 지금 <데스 나이트>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입장.

대답을 피하는 자를 괜히 몰아세워서 관계를 스스로 깨뜨릴 필요는 없었다.

강우는 그쯤에서 질문을 거두었다.

“알겠다. 그럼 원하는 대답을 모두 들었으니 돌아가야겠군.”

[…여기를 인간들의 해우소(解憂所)쯤 되는 줄 아는 모양이로군.]

“그럼 넌 그 해우소의 주인인 셈인가? 그러길 원한다면 그렇게 생각해라.”

[…….]

“곧 다시 오겠다. 미뤄 둔 수련은 그때 다 받도록 하지.”

강우는 그 길로 정말 <사이트 스톤>의 세상을 떠났다.

120일간의 기다림이 질문 몇 개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런데 <데스 나이트>가 강우가 사라진 자리를 지켜보던 그때였다.

부르르―

갑자기 탑이 한 차례 몸을 떨었다.

그 속에서 짙은 아쉬움과 약간의 초조함을 읽은 죽음의 기사가 탑을 달랬다.

[아직은 때가 아닌 모양이지.]

부르르.

탑이 다시 투정을 부렸으나, 여전히 <데스 나이트>는 담담했다.

[조급해할 필요 없다. 어차피 선택은 그자의 몫이니까. 우린 그저 기다릴 뿐… 재촉하거나 일부러 자극할 필요도, 이유도 없어. 그들의 시간은 우리와 다르니까.]

부르르르.

[안다. 미쳐 버리지 않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애초부터 알고 행한 게 아닌가. 처음부터 셈할 수도 없는 희박한 확률이었어. 그런데 봐라. 그는 벌써 여기까지 왔다.]

그 말을 끝으로 <데스 나이트>는 탑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묵직한 발소리가 탑을 울렸다.

그리고 잠시 뒤.

희미한 목소리가 어둠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리고… 나는 어쩐지 그자를 믿고 싶어졌다.

좀 더 기다려 보지.

발소리는 곧 사라졌다.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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