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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헌터-52화 (53/186)

[52화] 믿는 마음 (1)

강우가 집을 떠난 지 닷새째.

병원에서 퇴원한 유아라를 청익이 찾아왔다.

“퇴원 축하한다.”

“어떻게 알았어요? 원래 퇴원은 내일인데.”

유아라가 조금 놀란 어조로 묻자, 그가 평소같이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스승이 제자 퇴원도 몰라서 쓰나. 이거나 먹거라, 제자야.”

아마 이번에도 사람을 남겨 자신을 돌본 모양이다.

하여간 검계라는 곳의 인간들은 하나같이 오지랖 넓고, 차가운 듯하면서 따스한 인간들뿐이다.

검계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청익이 건넨 봉지를 받아 든 유아라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병원에서 퇴원했는데, 왜 두부를 먹어요?”

“퇴원하면 꼭 뭐 먹어야 한다는 법 있냐? 좋아하는 거 먹으면 되지.”

“저 두부 안 좋아하는데요. 두부 좋아하세요?”

“…이제 퇴원했으니까 내일부터 다시 훈련 시작이다. 맹세하건대, 두부 한 모, 콩기름 한 방울이 간절할 정도로 굴려 주마.”

“…조금 치사하네요.”

하지만 말은 그래도 유아라는 두부를 소중하게 챙겼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청익이 물었다.

“아직 한강우, 그놈은 연락 없고?”

“어디 연락하고 다닐 사람인가요.”

“하긴, 그렇긴 하지. 그래도 혹시 돌아오거나 연락 오면 알려 줘. 훈련 늦지 말고.”

“알겠어요.”

“안 데려다줘도 되지?”

“네.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청익은 여느 때처럼 할 말만 하고 사라졌다.

그 길로 유아라는 곧장 택시를 타고 예전에 검계가 마련해 준 임시 숙소로 향했다.

원래대로 퇴원했으면 내일 박도진이 데리러 왔을 텐데, 굳이 그런 신세까지 지고 싶진 않았다.

‘수영이가 보고 싶네.’

대신 수영이는 계속 생각났다.

입원해 있는 내내 어찌나 보고 싶다고 전화를 하는지, 마음마저 뭉클해질 지경이었으니까.

― 당분간 그 집에는 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강우는 주택의 출입을 금했다.

어째서 그 좋은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지 의아했지만, 그의 뜻이라니 더 묻진 않았다.

어차피 그의 뜻은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더 아리송해질 테니까.

하지만 그녀가 끝내 감출 수 없는 의아함도 있었다.

* * *

강우가 떠난 지 일주일.

“…김민정이 누구예요?”

“저도 모릅니다.”

박도진은 당분간 박광석의 아파트에서 지내기로 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로 찾지 않은 집이었으나, 이제야 마주할 용기가 난 모양이다.

오늘은 유아라가 퇴원 이후 처음으로 수영이를 만나러 온 날이었다.

수영이가 하도 보고 싶어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박도진이 그녀를 집에 부른 것이다.

다행히 그녀의 몸은 괜찮아 보였고, 그간 계속 한집에서 같이 지내 온 터라 큰 거부감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런 편지를 보내는데요?”

“…그것도 모릅니다.”

강우가 김민정이라는 여자에게 쪽지와 쿠키, 연고를 선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아라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다.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을 넘어 적대감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

박도진은 유아라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오늘도 똑같은 문장을 쪽지에 적었다.

『당신의 팬으로부터.』

고개를 내밀어 그것을 본 유아라가 물었다.

“…팬? 강우 씨가 그 여자 팬이래요?”

“…저도 모릅니다. 여자인지도 모르고요. 그냥 쓰라고 하셔서…….”

왜 죄인이 된 기분이지?

얼떨결에 성별도 모른다고 거짓말까지 해 버렸다.

박도진은 서둘러 포장을 완성했다.

오늘은 진한 버터 향이 가미된 아몬드 쿠키였다.

추가로 강우의 서비스가 살짝 더해진.

‘뭐야?’

유아라는 부랴부랴 포장지를 싸는 박도진을 보며 호기심이 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민정은 여자 이름 같았다.

‘천 년 쌓인 빙하처럼 딱딱한 그 남자가?’

쿠키에, 연고들에, 심지어 쪽지까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설마 집을 비운 것도 그 여자 때문일까?

대체 둘이 무슨 사이이지?

수많은 의문이 유아라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한강우를 팬으로 거느리는 여자라…….

그런 여자는 과연 어떤 자일까?

유아라는 잠시 강우가 김민정을 만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 * *

김민정의 팬 미팅 날.

앞으로 긴 줄이 늘어선 가운데, 드디어 강우의 차례가 되었다.

대개 스타를 마주한 팬이라면 예쁘다느니, 아름답다느니, 매일 같은 티(T)만 입는다느니, 호들갑을 떨기 마련.

하지만 김민정의 앞에 선 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아해진 그녀가 묻는다.

“어째서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죠? 막상 실물로 보니 별로인가요?”

그러자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강우가 마침내 입을 연다.

“잠시 고민하는 중이다. 널 보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결정 못 했거든.”

잠시 뜸을 들이던 강우가 말한다.

“그렇군. 넌 형언하기 조차 어려운 존재로군.”

그 차분한 어조에 김민정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아아……!”

* * *

팬 미팅에서의 인연을 계기로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 가는 중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둘은 고급 와인 바에서 만난다.

예약제로 소수의 인원만 받는 최고급 주점이다.

요염하고 능숙하게 와인 잔을 돌리던 김민정이 묘한 눈빛으로 말한다.

“당신은 참 신기해요. 어떻게 저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죠? 꼭 날 경험한 것처럼. 혹, 당신은 미래에서 왔나요? 미래에 우린 어떤 사이죠? 지금과 같나요?”

“…….”

그러자 오늘도 특유의 담담한 눈빛으로 김민정을 바라보던 강우가 손을 뻗어 그녀의 입술에 묻은 와인을 훔친다.

“난 그런 건 잘 모른다. 다만…….”

김민정의 눈빛이 방금 부은 와인처럼 흔들리는 가운데, 강우가 말을 잇는다.

“네 눈이 말하고 있다. 김민정, 지금 넌 내게 완벽히 빠져 있다고. 난 네 눈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아아……!”

레드 와인보다 더 진한 눈빛들이 오간다.

* * *

치기를 이기지 못한 두 남녀는 결국 호텔을 찾는다.

화려한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칠성급 호텔.

하지만 두 남녀는 그런 전망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다.

곧장 침대로 향한 둘이 두 손을 마주 잡는다.

하지만 얼굴이 붉어진 김민정과 달리 강우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다.

그녀는 대뜸 그의 목에 팔을 감싼다.

가까워진 얼굴이 곧 입술마저 닿을 것만 같다.

김민정이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숨결로 말한다.

조금 억울한 듯이.

“당신은 어떻게 그런 표정을 지을 수가 있죠? 난 이제 당신 없인 안 될 것 같은데… 두려워요, 당신이 날 떠날까 봐.”

그러자 강우가 한결같은 눈빛으로 답한다.

“날 좋아해 달라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다소 퉁명스럽기까지 한 말투.

김민정이 어깨를 작게 흔들며 투정을 부린다.

“…미워요.”

하지만 강우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우수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아아……!”

그걸로 됐다.

서로의 진심은 충분히 통했으니까.

먼저 눈을 감은 건 김민정이다.

그 모습이 귀여운 듯 피식, 작은 웃음을 흘린 강우의 고개가 틀어진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두 개의 입술.

세상이 멈춘 듯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포개지려는 두 개의…….

“아앗! 언니! 아파요!”

* * *

“아… 미안, 미안! 괜찮아?!”

박수영의 비명에 화들짝 놀란 유아라가 다급히 아이의 손을 살폈다.

여리디여린 수영의 손바닥에 작은 손톱자국이 남아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잡고 있던 손을 세게 움켜쥔 것이다.

“아아… 아파요.”

“미안해.”

유아라는 눈물을 찔끔 흘리는 박수영에게 연신 사과하며, 그 고사리 같은 손에 호, 하고 입김을 불어 주었다.

그때, 박도진이 물었다.

“유아라 씨, 괜찮습니까?”

“예?”

“얼굴이… 엄청 빨갛습니다. 귀도 빨갛고. 열이 있는 것 같은데요?”

“아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기가 좀 더, 더워서!”

“…선풍기라도 드릴까요?”

“괘, 괜찮아요!”

박도진이 그런 유아라를 잠시 걱정스럽게 바라봤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다행히 박수영도 곧 괜찮아졌는지 얼굴이 풀렸다.

수영이가 신나게 유아라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

“언니, 우리 상상 놀이해요!”

“사, 상상 놀이?”

상상 놀이는 이미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유아라는 두근거리는 감정을 빠르게 진정시키며, 박도진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간 한 번도 안 해 본 놀이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새로운 놀이를 발명한 모양이다.

선물 포장을 마친 박도진이 말했다.

“요즘 어린이집에서 특별 실시 중인 놀이랍니다. 여러 가지 상황극으로 아이들의 창의성을 길러 주는…….”

아이들의 창의성을 길러 준다니.

의도부터 무척이나 좋은 놀이다.

그런데 박도진의 표정이 어딘가 어두워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어쨌든 유아라는 수영이의 ‘상상 놀이’를 이해했다.

“좋아. 우리 무슨 상황으로 할까?”

“음… 언니가 정해 주세요! 제가 오늘 언니 온다고 해서 상상 놀이를 88개나 생각해 놨거든요!”

“여든여덟 개나?”

역시 아이의 상상엔 한계가 없는 모양이다.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숫자에 잠시 당황했으나, 유아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 살짜리 꼬마가 하는 상상이라 봐야 인형극 수준일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박도진이 슬금슬금 방으로 도망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신난 박수영이 말했다.

“음, 첫 번째는 ‘엄마는 무슨 요리를 준비했을까?’예요! 아빠가 술에 취해서 늦게 집에 들어왔는데, 엄마가 부엌에서 요리 중인 거죠. 시간은 밤 12시. 그런데 아차! 그 전날은 결혼기념일이었던 거예요!”

“…응?”

어딘가 여섯 살짜리 소녀의 상상에서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진행 방향이었다.

유아라가 미처 이상함을 다 인지하기도 전에 박수영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결혼기념일을 깜빡한 아빠는 서둘러 엄마한테 다가가요. 어떤 말로 사과해야 할지 고민하면서요. 그런데 이상해요! 중식도를 든 엄마 앞에 도마가 비어 있어요!”

“주, 중식도?”

“예! 과연 엄마는 무슨 요리를 하려는 걸까요? 우리 상상해 봐요!”

“…….”

황당해진 유아라가 빠르게 박도진을 찾았으나, 이미 그는 자리에 없었다.

어느새 방에 들어간 그가 살짝 열린 문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어딘가 안쓰러워하면서도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그가 속삭이는 입 모양이 선명했다.

― 잘 부탁합니다.

아아, 당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수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두 번째는 ‘엄마의 선물’이에요! 엄마는 아빠의 생일선물로 소파를 샀어요! 작업실 소파가 오래됐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래서 옛 소파를 치우고 새 소파를 놓으려는데… 이상해요! 소파에서 돈이 나와요! 황금 거위처럼 돈이 나오는 소파예요! 그 소식을 들은 아빠의 기분을 생각해 봐요! 엄청 기쁘겠죠?! 그 기분을 색으로 표현하면 무슨 색일까요? 우리 상상해 봐요!”

“…….”

“세 번째는…….”

그렇게 유아라는 박수영이 말하는 여든여덟 가지 상상 놀이 주제를 모두 들어 주었다.

하나같이 혀를 내두를 만치 엄청난 상상들.

역시 아이들의 에너지는 어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모양이다.

‘수영이가 다니는 유치원에 대해 알아봐야겠어. 고소를 준비해야 하는 걸까? 법은 잘 모르는데…….’

유아라는 박도진도 겪은 고민을 똑같이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박수영의 상상 놀이가 고소감이라면, 자신의 상상(이라 쓰고 망상이라 읽는다)은 무기징역감이라는 걸.

그녀는 박수영과 시간을 보내면서 종종 아까의 기억을 떠올렸다.

레드 와인을 사이에 두고 나누던 눈빛들.

한 뼘 간격을 두고 아슬아슬 외줄 타기 중이던 입술들.

언뜻 김민정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이 오버랩된 듯했다.

‘상상 놀이’ 내내 두 뺨과 귀가 뜨거운 유아라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 주일 뒤.

강우가 돌아왔다.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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