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헌터-48화 (49/186)

[48화] 멕시코에서 온 용병들 (4)

강우가 석철을 만나는 사이.

‘늦으시는군.’

박도진은 같은 향락가 골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의점 간이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마시던 그는 강우가 한참 전에 들어간 룸살롱 건물 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여전히 두 명의 가드만 서 있을 뿐.

건물 밖으로 나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김 사장님, 조심히 들어가십쇼!”

“그래, 다음에 또 한잔하자고.”

주변은 시끄러웠다.

젊은 남녀든.

나이 지긋한 아저씨, 아줌마든.

한껏 취한 그들은 곳곳에 침을 뱉고, 시끄럽게 배웅하며, 어딘가에 구토를 쏟아 냈다.

<균열>보다 더 혼란한 모습이다.

“이 오빠랑 한잔 더 하자니까?!”

“야, 가자, 가자. 저거 미친놈 아니야?”

“뭐? 미친놈?!”

지금 당장 옆 테이블만 하더라도 두 여자를 향한 남자들의 진상 짓이 한창이었다.

“오빠, 몇 살이야?”

반대로 박도진에게 말을 걸어온 여자들도 벌써 넷이 넘었다.

“…….”

끔찍이도 싫어하는 분위기이지만, 박도진은 애써 참았다.

자신이 원해서 따라온 길이기 때문이다.

― 내가 공항을 떠나면 분명 내 뒤를 밟는 자가 있을 거다. 그 뒤를 쫓아라.

그는 공항서부터 강우를 따라왔다.

강우의 예상대로 그가 떠난 후에 링 귀걸이를 한 남자가 그 뒤를 쫓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석철이라는 자는 보기보다 의심이 많고 치밀한 자인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런 수고를 일부러 벌일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강우는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신을 남겨 뒀으니…….

역시나 사내들은 눈치조차 채지 못한 듯했다.

평상시엔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자신은 누군가를 미행하는 데 아주 제격이었다.

‘꼭 꼬리잡기 같군.’

문득 언젠가 세 가족이 하던 꼬리잡기를 떠올린 박도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건 수영이가 처음 쓰러지기 전, 말도 제대로 못 하던 때의 일이었다.

꺄르르 웃던 딸과 그런 손녀가 귀여워 항상 져 주던 아버지.

그리고 그 모습을 사진에 담던 자신.

여전히 그때의 풍경이 눈에 훤했으나…….

이제 아버지 박광석은 없으니, 그런 날은 다시 오지 않을 터였다.

“후…….”

텅 빈 한숨을 내쉰 박도진은 다시 건물 쪽을 주시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아버지는 없지만, 자신에겐 새로운 사람들이 생겼다.

수영이를 아버지처럼 예뻐해 주는 사람들.

묵묵히―비록 듣는 내내 무표정이라 어떤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수영이의 긴 이야기를 들어주는 강우와 친언니처럼 챙겨 주는 유아라.

종종 다짜고짜 집에 쳐들어와 안부를 물어오는 청익.

심지어 왕린은 얼굴도 모르는 딸을 위해 인형 놀이 수십 세트를 보내 주었다.

결국 지하 창고에 절반 이상 머무르고 있지만… 어쨌든.

수영이와 그를 아껴 주는 사람들을 위해라도 자신은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세 가족이 함께 살길 간절히 원하던 아버지의 바람과 같은 길이리라.

― 행여 내가 들어가고 나서 따로 찾아오는 이가 있으면 사진을 찍어 둬라. 내가 찾는 건 붉은 머리나 코밑에 점이 있는 구부정한 놈이다.

한동안 박도진은 테이블에 앉아 계속 건물 입구를 살폈다.

사실은 저번 <백귀 균열> 때 따라가지 못한 게 내심 아쉽던 박도진이었다.

유아라가 강우를 따라다녀 왔다고 했을 때, 어딘가 부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이상한 분이다. 꼭 이 세계 사람이 아닌 것처럼.’

수많은 베일에 가려진 남자.

박도진은 그런 강우가 늘 궁금했다.

어떻게 지하실에서 기척을 그토록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는지, 그런 실력을 감추고 지난날 왜 조용히 살아왔는지, 어떻게 야수병의 피를 치료제로 사용할 수 있으며, 검계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는지, 또 생전에 아버지와는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등등.

호기심이라고 해야 할지, 경외라고 해야 할지.

그건 인간이 알 수 없는 대자연의 신비를 마주한 기분과도 비슷했다.

하지만 박도진은 그 무수한 궁금증을 굳이 입 밖으로 내놓진 않았다.

그도 그랬기 때문이다.

강우는 자신의 과거를 물어보지 않았다.

그게 관심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자신을 향한 배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건 박도진에게 있어 그 저택에 남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돼 주었다.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가려 주는 가림막이라고 해야 할까.

그곳에서 수영이와 있다 보면, 정말로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 된 것 같았다.

그게 그가 살림에 더 열을 올리는 이유기도 했고.

“이년이? 넌 위아래도 없냐?!”

“위아래 따지는 새끼가 왜 애들한테 찝쩍대?!”

그러는 사이, 옆 테이블은 이제 싸움판이 되었다.

박도진이 자리를 옮겨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마침내 그가 기다리던 사람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강우는 혼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쫓던 남자들이 그의 옆에 함께 서 있었다.

더욱 이상한 건, 사이가 그리 나빠 보이지 않다는 점이었다.

수하들의 표정은 아리송했으나, 석철이란 자는 붉어진 얼굴로 신나서 껄껄 웃고 있었다.

“이 새끼, 존나 재밌는 놈이네? 어떻게 입을 다물고도 웃길 수가 있지?”

석철은 한참을 낄낄대더니, 이내 자신이 타고 온 차에 강우를 태웠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박도진은 잠시 멈칫했지만, 강우가 강제로 끌려간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만난 인간 중 가장 강한 존재니까.

그런 그가 저 차에 올랐다면, 그건 자의일 확률이 아주 높았다.

아니, 백 퍼센트였다.

‘…따라가야 하나?’

박도진은 잠시 고민했다.

강우가 말한 두 남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우가 건물 밖으로 나왔으니, 이미 말한 기한도 끝난 셈.

박도진은 강우를 태운 차가 떠나는 걸 확인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항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자신의 가림막이 없다.

이대로 따라가면 자신 역시 들킬지도 모르는 일.

그건 강우가 바라는 바가 아닐 터다.

결정을 마친 박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막 집으로 돌아가려던 순간, 그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저 남자는…….’

비록 강우가 말한 인물은 아니지만, 세상일에 어두운 박도진도 아는 얼굴이었다.

수하 둘을 이끌고 온 남자가 석철이 나온 건물 앞을 초조하게 기웃대고 있었다.

행여나 얼굴이 들킬 염려 때문인지, 마스크를 쓴 채 고개를 떨구고 있지만, 그 특유의 근육질 몸매와 거들먹대는 몸짓만은 숨길 수 없었다.

박도진은 몰래 스마트폰을 꺼내 그자의 행적을 카메라에 담았다.

석철이 떠난 탓인지 그는 곧 자리를 벗어났다.

‘이승우, 저자도 아는 사이였나?’

국내 1위 길드의 마스터가 몸소 찾아오는 남자라…….

박도진은 석철이란 자가 대체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지만, 강우가 들려주기 전까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곧 박도진도 자리를 떠났다.

오래 있진 않았으나, 향락가의 술 냄새와 진한 향수 냄새가 벌써 몸에 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영이가 자고 있으면 좋겠는데…….’

그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몸을 박박 씻을 예정이었다.

이런 냄새는 딸에게 조금도 맡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는 수영이에게만은 좋은 것만 주고 싶은 아빠였다.

* * *

“너 같은 놈이 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냐?”

차 안.

취기가 오른 석철이 한창 떠들어 제끼는 가운데, 강우는 묵묵히 놈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석철은 자신의 주량을 잘 따라오는 강우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단둘이서만 차에 오를 리 없지.

놈은 과거부터 엄청난 주당이었다.

아까 룸에서 혼자 마신 술만 해도 일반 각성자들은 며칠간 기절해 있을 양.

그 증거로 석철의 수하들도 이미 반쯤은 퍼져 나가떨어졌다.

당연히 강우에게도 엄청나게 퍼먹였으나, 그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무척이나 양호한 편이었다.

‘주사를 놓길 잘했군.’

물론, 미리 몸속에 회복력이 좋은 야수병의 피를 넣지 않았더라면 강우도 그들과 같은 꼴이었겠지만.

“어디로 모실까요?”

그때였다.

앞에서 묵묵히 차를 몰던,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백미러로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걸었다.

석철을 공항에서부터 태우고 온 그의 이름은 남궁민.

아마도 저자가 석탈해와 석철을 잇는 징검다리인 듯했다.

“음…….”

잠시 고민하던 석철이 물었다.

“오늘 경기가 있던가?”

“마침 리드코파배 준결승전이 있습니다.”

남궁민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런 걸 보면 아마도 석철이 그것을 물어볼 줄 예상한 모양이었다.

“리드코파? 처음 듣는 이름인데?”

“요즘 그쪽에서 잘나가는 단체입니다. 좀 유망하다 싶으면 전투적으로 스카웃해 가는 걸로도 유명하고요.”

“그러니까, 요즘 한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놈들이라 이거지?”

“예. 상금도 나름 괜찮아서, 참가자도 수준급입니다.”

대답이 흡족했는지, 석철이 껄껄 웃었다.

“그래? 운이 좋군. 거기로 가자. 애들은 모두 알아서 쉬라고 해. 술을 처먹든 떡을 치든 알아서 하라고. 단, 내일 일정에 늦으면 혼난다.”

“알겠습니다.”

차는 곧 방향을 바꿔 고속도로를 탔다.

순식간에 바뀐 행로에 강우는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경기라면… 파이트인가.’

<균열>과 각성자가 등장하면서 전 세계 스포츠도 많이 바뀌었다.

한때 유행하던 축구나 야구, 농구 같은 종목은 이미 쇠퇴한 지 오래.

사람이 반쯤 날아다니고, 마법을 쏘고, 심심치 않게 피를 보는 현실에서 옛 스포츠는 시시함을 넘어 따분해졌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반대편 골대에서 공을 차면 상대편 골키퍼와 골대를 떠나 경기장마저 뚫어 버리는데… 거기에 어떤 긴장감과 어떤 스포츠 정신이 깃들겠는가.

나중에 각성자는 스포츠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만들어졌지만, 그건 그것대로 스포츠의 쇠락을 가속화했다.

결국 시대에 맞춰 스포츠도 변했다.

전쟁 스포츠[War Sport]를 뜻하는 W―스포츠나, 역할 수행 스포츠[Role Sport]의 약자인 Rol―스포츠 따위가 바로 그것.

대부분 각성자들끼리 전략을 세워 각 미션을 수행하고 먼저 점수를 성취하는 쪽이 승리하는 식의 경기였다.

“너, 파이트 경기 본 적 있냐?”

고속도로를 탄 차가 열심히 달리는 가운데, 석철이 물었다.

하지만 놈이 묻는 ‘경기’는 W나 Rol―스포츠 같은 공식적인 게임이 아니었다.

파이트(Fight).

대부분이 서로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생사투였다.

“몇 번 있습니다.”

“오, 그래? 따로 취향인 놈은 있고?”

“그냥 지나가며 몇 번 본 수준입니다. 선수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하긴… 그래 봐야 몇 달 안 가서 뒈질 테니. 그런 걸 보면 테스가 참 대단한 거야.”

테스는 해당 파이트의 세계 챔피언이었다.

한 번 치르기도 힘들다는 방어전을 무려 아홉 번이나 이겨 낸 남자.

파이트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챔피언을 유지 중인 그는 4차 각성자니, 로봇이니 하는 소문이 무성했다.

물론, 실제로 확인된 바는 없다.

파이트에서는 마력을 방출하는 순간, 실격이기 때문이다.

신체나 무기에 마력을 두르는 2차 각성자 수준의 마력만 활용하는 게 파이트의 룰이었다.

실제로 4차 각성자가 그런 파이트에 참가할 이유도 희박했고.

테스는 라스베이거스의 황제라 불리는 후버의 선수였다.

“후버가 테스한테 얼마나 많은 돈을 처발랐을지 상상이 안 간다, 안 가. 근데 내가 비밀 하나 알려 줄까? 사실은 내가 하도 궁금해서 저번에 테스 놈을 만나러 간 적이 있는데 말이야, 그 새끼가 꼴에 나를 노려보는 거야! 그래서 내가 옆에 있던 후버 새끼 목을 움켜쥐었더니… 아니, 글쎄, 그 새끼가 갑자기 오줌을 지리더라니까? 하! 후버 놈이 얼마나 교육을 잘 시켰으면…….”

그렇게 석철이 파이트에 대해 이런저런 추억을 늘어놓는 사이, 달리던 차가 목적지에 멈춰섰다.

“도착했습니다.”

검은 헌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