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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헌터-47화 (48/186)

[47화] 멕시코에서 온 용병들 (3)

석철을 태운 차량이 향한 건 다름 아닌 강남의 한 향락가.

아직 해가 저물기도 전이건만, 거리에는 수많은 남녀와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가득했다.

‘여전하군.’

눈이 아플 정도로 반짝이는 불빛들에 강우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석탈해를 만나는 것보다도 향락이 먼저라니.

예전부터 주색을 즐기던 석철답다 싶으면서도 어딘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달라지지 않았다니 오히려 다행인가.’

<피바라기>를 다시 얻던 날.

그의 마음 한편엔 작은 불안이 피었더랬다.

혜진이가 없는 것처럼 혹여 자신이 알던 놈들이 없을까 하는 우려에서 온 불안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놈들은 온전하고, 여전히 같은 성향을 갖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회귀한 이유는 충분하다. 내가 이 시간을 다시 걸어갈 이유.’

한동안 강우는 차 안에서 석철 일당이 들어간 룸살롱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놈들이 들어간 뒤로 벌써 십여 대에 이르는 봉고차가 그 앞을 오갔다.

전부 접대부를 태운 차들.

오늘 밤 탑이라도 세울 생각인가.

안으로 들어간 숫자만 얼추 계산해도 마흔은 넘을 듯했다.

룸살롱 앞을 지키는 건 장정 둘인데, 그들은 석철 이후로 다른 손님을 일절 받지 않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터다.

놈이 하룻밤에 쓰는 돈이라면, 이곳 일대를 들썩이게 만들고도 남을 테니까.

운이 좋다면 당장 내일 아침에라도 2호점 건물을 세울 것이다.

그만큼 놈은 흥이 나면 전 재산이라도 하루아침에 불태울 만치 기분파였다.

‘예상보다 늦는군.’

한참을 기다려도 건물 밖으로 나오는 이는 없었다.

굳이 몰래 들어갈 이유도 없으니, 강우는 이만 돌아갈 생각이었다.

꼭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차 번호를 외워 두었으니, 그 차를 조사하면 놈을 태워 간 게 누구인지 알 수 있겠지.

그런데 강우가 막 차에 시동을 걸려던 찰나.

똑똑.

마력이 느껴진다 싶더니, 누군가가 운전석 창문을 두드렸다.

커다란 링 귀걸이와 코 피어싱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가벼운 평상복 차림의 그는 창문에 얼굴을 딱 붙이고 있었는데, 짙은 선팅 탓인지 연신 차 안을 향해 눈알을 굴리는 중이었다.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안을 살피는 그 모습이 사뭇 기묘하기까지 했다.

‘…양반은 못 되겠군.’

보다 못한 강우는 천천히 창문을 내렸다.

“앗!”

남자는 과장된 몸짓으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이내 강우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이윽고 그가 껄렁이는 말투로 물었다.

“자기, 여기서 뭐 해?”

“…….”

하지만 강우는 대답 대신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뺨에 남은 작은 흉터와 검게 그을린 피부.

몽골계 혈통으로 보이는 그는 마력이 느껴지는, 분명한 각성자였다.

‘3차…인가.’

기억을 더듬어 보니, 황한수가 보내 준 명단에서 본 얼굴이다.

이름이… 조릭 바타르였던가?

하도 어려워서 맞는지도 헷갈리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놈이 석철의 패거리라는 것뿐.

애써 마력을 감추고 있으나 연신 새어 나오는 기세를 보면, 아마도 3차 각성자가 된 지 석 달이 채 안 돼 보였다.

많이 봐줘야 이한의 김 실장보다 조금 나은 수준?

“자기, 뭐 하냐니까? 귀머거리야?”

강우가 대꾸 없이 바라만 보자, 남자가 혀를 차며 미간을 좁혔다.

“문 좀 열어 볼래? 자기, 공항에서부터 우리 따라왔지?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안 열면 이대로 차랑 같이 구겨질 거야.”

아마도 그는 석철이 차에 태우지 않고 뒤에 따로 남겨 둔 한 명인 듯했다.

그제야 강우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뭐야? 자기 보기보다 키가 크네?”

강우의 키는 179센티미터.

장신들에 비하면 큰 키도 아니지만, 남자는 그보다 5~6센티미터가량 작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강우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따라왔어? 정체가 뭐야?”

“…….”

어느새 남자가 꺼낸 단검이 강우의 배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강우의 눈빛이 담담하자, 그가 의외라는 듯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 이것 봐라? 깡 좋은데?”

협박이 소용없음을 깨달은 남자는 순순히 단검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강우의 어깨를 붙잡았다.

“따라와.”

남자는 그대로 강우를 끌고 룸살롱 건물로 향했다.

강우는 별다른 저항 없이 끌려갔고, 그들은 입구를 지키던 장정 둘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다다르자, 카운터에는 이미 도착한 접대부들로 북적였다.

언뜻 봐도 수십의 여자들이 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비켜.”

링 귀걸이 남자는 요란스럽게 그녀들을 지나쳐 갔다.

모든 룸이 비어 있는 가운데, 가장 안쪽에 있는 방만이 시끄러웠다.

그 앞으로 또 줄지어 선 여자가 수십.

그들이 강우와 남자를 힐끔 쳐다봤지만, 감히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이윽고 문 앞에 도착한 남자가 강우를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형님, 데려왔습니다.”

예상대로 그곳에서는 거한 술판이 한창이었다.

수십 병의 양주, 수십의 남녀, 수천의 돈다발.

안을 둘러보던 강우는 천천히 덩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질려 버릴 만치 우람한 체격의 남자가 다리를 쩍 벌린 채 앉아 있었다.

한때 장난삼아 벌인 씨름 대회에서 우승한 장사(壯士)답게, 그의 몸은 이미 인간의 범주를 한참 벗어난 상태였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에게 온전히 힘으로 당해 낼 자는 없을 듯했다.

겉으로는 살처럼 보이는 모든 게 사실은 근육이었으니까.

그는 맨주먹으로 <미노타우르스>의 머리통을 부숴 버리던 괴물이었다.

마물의 피와 살을 먹고 사는 남자.

마물보다 더 마물에 가까운 남자.

마남자(魔男子) 석철.

그게 좌천랑으로 불리기 전, 눈앞의 남자를 이르는 수식이었다.

강우는 그 얼굴을 눈에 새기며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석철.’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익숙한 얼굴이 과거와 똑같았다.

짙은 송충이 눈썹과 기형적으로 변한 만두 귀.

호랑이같이 크고 부리부리한 눈.

바위처럼 뭉툭한 코.

심지어 털이 많이 자라 구레나룻과 목덜미에 항상 수북하던 머리털까지도.

그간 수천 번을 되새기고 꿈꿔 온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조금 전까지 무얼 했는지, 반쯤 헐벗은 놈이 강우를 보며 물었다.

“그놈이야?”

“예. 밖에서도 계속 이곳을 지켜보고 있더라고요. 왜 따라왔느냐고 물었는데, 계속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패기는 있던데요?”

“그래?”

석철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눈치를 보던 여자들이 서둘러 룸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 앞으로 걸어온 놈이 강우를 눈으로 훑었다.

“보기에는 비리비리한 게, 꼭 젖도 제대로 못 먹고 자란 여우 새끼 같은데, 속은 또 다르단 말이지? 흠.”

잠시 긴장된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한참 동안 강우를 뚫어져라 살피던 석철이 물었다.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얼굴인데… 너 뭐야? 대답 안 하면 손발톱부터 뽑고 시작한다.”

“…….”

하지만 강우는 잠시 묵묵히 있었다.

몇 번이고 계획한 바이지만, 놈을 눈앞에서 마주하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강 형, 건강하시오.

놈이 마지막으로 뱉은 말이 여전히 생생했다.

당장이라도 그 혓바닥을 뽑고, 머리통을 부숴 뇌수를 쏟고, 두개골을 씹어 삼키고 싶다.

계획이고 뭐고, 그 사지를 잘라 이 안을 전부 피바다로 만들고 싶다.

네놈들의 말대로 다시 찾아왔다고.

그 지옥을 거슬러 이곳으로 내가 다시 왔다고.

마침내 내가 그 심연을 넘어 네놈들에게 닿았노라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강우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종착역은 이곳이 아니니까.

석철은 고작 그 첫 시작일 뿐이다.

겨우 복수를 위한 첫걸음이자, 잘 벼려진 칼의 첫 시험대일 뿐이다.

이제야 겨우 닿게 됐는데 일을 망쳐 버릴 순 없는 일.

머릿속을 온통 수놓은 핏빛 향연에도 강우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입을 열었다.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는, 당찬 목소리였다.

“석철 님을 만나고 싶어서 따라왔습니다.”

“…응?”

예상치 못한 대답에 강우를 데려온 링 귀걸이 남자가 무슨 소리냐는 듯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석철은 아니었다.

한쪽 입꼬리를 씰룩인 놈이 흥미로운 듯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너, 나 알아?”

“예. 멕시코에 계실 때부터 익히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팬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하, 이놈 봐라?”

석철은 강우의 대답이 우스웠는지 껄껄 웃었다.

‘멕시코’라는 말에 잠시 굳어 있던 수하들도 뒤늦게 표정을 풀고 같이 웃음에 합류했다.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들.

한동안 룸에는 조소가 울려 퍼졌다.

웃지 않는 건 강우와 그를 데려온 남자뿐이었다.

놈이 조금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석철 님! 이런 놈은 일단 손모가지부터… 악!”

그런데 남자가 막 강우의 어깨에 손을 얹던 찰나.

강우는 곧장 그 손을 붙잡고 비틀어 버렸다.

“아! 아! 이거 안 놔?! 죽여 버린다… 아악!”

팔이 꺾인 남자가 상체를 숙인 채 비명을 질렀다.

한눈에 봐도 그의 팔목이 훨씬 두껍지만, 그는 강우의 손아귀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몇 번 저항해 봐도 마찬가지.

그는 강우의 손길에 어린아이처럼 다뤄지고 있었다.

“…….”

웃음으로 가득하던 룸의 분위기가 어느새 싸늘해졌다.

수하들이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몸을 들썩이는 가운데, 얼굴을 굳힌 석철은 말없이 강우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수하들과는 의미가 조금 다른 시선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력이 희미하던 놈인데…….’

그런 놈이 대번에 자신의 수하를 제압했다.

그건 강우가 마력을 다루는 데 능한 것을 넘어 신체를 자유자재로 강화할 수 있다는 뜻.

철저히 육체파인 석철은 마력에 조예가 깊거나 크게 의지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는 월등한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쪽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신체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마력의 활용.

그건 제 잘난 맛에 사는 호공 놈이 항상 떠드는 이야기니까.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석철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이놈…….’

자신은 보통이 아니다.

그런 걸 말하고 싶은 건가.

‘어리어리한 줄 알았더니… 저런 눈빛을 숨기고 있었군.’

석철이 보기에 강우는 처음 이 방 안에 들어왔을 때와는 정반대의 인간이 된 듯했다.

그는 어느새 맹수의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비록 느껴지는 기세는 자신보다 한참 아래였으나, 석철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놈은 호랑이 새끼다.

생존하기 위해 사냥하는 놈이 아니라, 상대를 지배하기 위해 사냥하는 놈이다.

그 위에 군림할 줄 아는 놈이다.

숲 하나쯤은 충분히 제 발 아래 둘 수 있는 놈이다.

석철은 단번에 강우가 범상치 않은 인간임을 알아챘다.

‘재밌는 놈이 나타났네. 주군이 보면 좋아하시겠어.’

그러는 사이, 강우는 붙잡고 있던 사내를 풀어주었다.

석철의 용병단은 평등하다.

선임이든 후임이든 실력에 따라 대우받지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석철뿐.

그럼에도 그들 사이에 암묵적인 서열은 있다.

지금 강우에게 손목을 붙잡혀 쩔쩔맨 건 무려 서열 4위.

이 안의 공기가 차갑게 변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간신히 풀려난 서열 4위 조릭 바타르가 자신의 손목을 어루만지는 가운데, 강우는 석철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곳에서 자신만큼 놈을 잘 아는 이는 없을 터였다.

놈은 행동으로 증명하길 원하는 자.

어떻게 보면 놈은 황 노인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이윽고 강우의 입이 열렸다.

“석철 님의 용병단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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